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ep45. 하얀 숲과 오래된 탑 (1)
“그게 뭐야?”
“뭐?”
“가슴에 매단 거. 당신네 세상의 펜던트 같은 거야? 아니면 부적?”
부담 없는 속도로 가볍게 달리는 렐릭시나. 뒤에서 리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슬쩍 고개를 내려 가슴 한편에 매달려 있는 렌즈를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된 액션캠.
“영상 촬영 장비야. 예전에 설명했었지?”
“응.”
우리 세상이 카메라라는 물건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이제는 리리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차소희의 제안이었다. 이번 여정을 액션캠으로 촬영하는 것.
‘굳이 이유가 있어?’
‘이번에 갔다 오면 알려 줄게!’
차소희는 당장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항상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던 녀석이니 우선 그 말에 따라보기도 했다. 딱히 추억을 촬영으로 남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굳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니까.
“렐릭시나, 조금 천천히 가 줘.”
“크릉.”
지도를 펼친 뒤 전방 상공에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소행성과 방향을 맞춰보았다. 대충 서쪽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쭉 깔린 노미나 산맥의 전경이 엿보였다.
리리가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지난번에 악마를 마주친 곳, 그러니까 최초의 전쟁터보다 저기가 훨씬 멀어 보여.”
“그럴 거야. 그곳도 여기에서 북서쪽인데, 거기에서 봤을 때도 서쪽이었으니까.”
운이 따라 주는 게 아니라면 저기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꽤 긴 여정이 될 거다.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지.
“리리, 좀 빠르게 이동할 거야.”
“응.”
리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렐릭시나가 속도를 높였다. 푸른 갈기가 길게 늘어졌고, 키호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폐광 바위산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평야를 지나쳤다.
“꽃들이야.”
“지난번에 왔을 때는 없었지?”
평야에서 자라난 얕은 풀들은 꽃봉오리를 품고 있었다.
신이 두고 간 행성이 이 땅에 가한 영향력이다.
“……처음에는 저 소행성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대수림을 생각했었는데.”
“저 소행성이 대수림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이 아무 생각 없이 저걸 가져다 놓은 게 아니란 말이지.
부지런히 달린 결과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산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근처 옹달샘에서 대충 씻은 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산맥을 넘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테니까.
다음 날, 다시 노미나 산맥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렐릭시나에 타고 올라갈 수도 없는 거친 환경. 우리는 내려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나무가 우거지나 싶더니 계곡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바위와 자갈 위주의 환경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우리는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렸다.
“말이 왜 여기 있지?”
야생마 한 마리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이곳에서 어슬렁대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특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동물도 간혹 고독을 즐길 때가 있는 법이니까.
리리와 내가 이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리가 조심스럽게 말의 뺨을 쓰다듬었다. 조용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는 야생마. 야생마로서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다.
“길들여져 있어.”
리리의 말대로였다.
대체 왜 여기에 길들여진 말이?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는 환경에 버려진 길들여진 말. 물론 이 말은 곧 무리로 복귀해서 잘 살아가겠지만, 중요한 건 왜 여기에 이런 말이 있느냐인 거다.
“누군가 저쪽으로 간 흔적이야.”
우리는 잠시 우리의 진행 방향을 바라보았다. 리리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비프로스트 없이 이렇게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건 얼마 만이지? 우리는 며칠 동안이나 산속을 걸었다. 거의 히말라야 산맥의 고산 등반, 혹은 순례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여정.
리리는 오히려 나보다도 더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산악지대를 고향으로 하는 종족에겐 오히려 이런 곳이 정겨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체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 터라 우리 둘 다 고생을 많이 했다.
“크릉.”
“……아니, 셋이지. 렐릭시나도 고생이 많아.”
“컹.”
“이거 봐.”
리리가 고개를 숙이며 꽃을 가리켰다. 자갈 사이에서 자라난 넝쿨 식물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꽃 머리를 담그고 있었는데, 그 암술이 도톰하게 뻗어 나가 물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작은 물고기가 흐름을 거슬러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리리가 쪼그려 앉아서 흥미로운 눈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아는 식물이야?”
“수생동물들이 물고기인 줄 알고 접근하면 꽃봉오리를 닫아 버려. 그리고 그 안에서 소화시켜.”
“나는 처음 봐.”
“이 식물을 물가에 뿌려 놓으면 그 자체로 천연 그물 역할을 해서, 예전에 많이 썼어. 그리고 물속에서 소화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소화액 산성도 굉장히 강해서 화학용제 용도로 쓸 수도 있거든.”
“……당신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었거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들이 더 거칠어지고 잎사귀의 면적이 좁아진다. 물이 귀하고 서늘한, 그리고 고도가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생태 특성이다. 여정이 진행될수록 식물들의 활동성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지금 신비함을 느끼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이곳의 환경과 지형에서 향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일까? 나는 왜 이곳에서 익숙함을 느끼고 있는 거지?
왜 내가 언젠가 이런 풍경 속에서 살아갔던 기분이 드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리리.”
“응.”
그동안에도 리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황금의 왕좌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던 녀석이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저기 봐.”
리리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일어났다.
“……아.”
리리가 멍하니 전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느새 이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전방은 조금 가파른 내리막길이었고, 그렇기에 그 너머로 넓게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지척까지 가까워진 소행성은 이제 꽤 고개를 잔뜩 치켜들어야만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 펼쳐져 있는 건 일종의 분지 지역이었다. 산맥의 한가운데,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
고원 지대였기에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반나절이면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의 높이.
그곳에는 평야가 있었다. 끝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 평야.
그리고 그 평야를 가득 채우는 건 숲이었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지구상에서는 찾을 수나 있을지 의심이 갈 정도로 거대한 숲.
우리가 입을 열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그 규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숲이라는 말로 설명이 불가능했다.
대리석으로 된 대륙을 깎아서 숲 형태의 조각상을 만들면 저런 모습일까?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숲은 온통 하얀색을 띠고 있었다. 두 개의 태양빛을 반사하여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빛.
“하얀 숲.”
그 한가운데는 아주 얊은 탑이 드높이 솟아 있었다. 소행성에 닿기에는 부족하나, 사람이 쌓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비현실적인 탑이었다.
그리고.
“……노랫소리?”
리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주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바람을 타고 흘렀다. 어디에서 들려오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여정도 그냥 끝나지는 않겠구나. 리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 기대와 걱정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난.
“……재밌겠는데?”
이 한마디만 하고 싶을 뿐이었다. 리리가 내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가자.”
이제는 조금 무덤덤해진 리리와 함께 아래로 향했다.
* * *
서지아는 하얀 숲을 헤매고 있었다. 이곳의 신비함에 매료되었지만, 그 기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곳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유기물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서지아는 허탈한 감정을 느꼈다. 이건, 완전히 지구의 인간식 사고방식이구나 싶었다.
어느새, 나는 그곳에 물들어 버렸구나.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계에서는 오히려 반쪽짜리 취급을 받아 몸을 뉘일 곳 하나 없었으니, 차라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지구가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서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가지밖에 남지 않은 나무가 머리 위에 있었고, 그 뻥 뚫린 풍경으로 하늘이 보였다.
눈을 감자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아름다운 허밍.
그건, 고대 엘프의 언어로 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볼 수 있었던 탑을 떠올렸다. 그곳을 향하고자 했지만, 이 안에서 방향감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물도, 먹을 것도 없었다. 나뭇잎은 만지면 푸석하게 부서졌다. 하루 이상 이 안에서 헤매자 낭패감을 느꼈다. 조금은 신중하게 행동할걸. 마음이 급해서 너무 먼저 움직인 탓이었다.
“……!”
갑자기 한 쪽에서 무언가 날아와 서지아를 스쳤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한 그녀는 두꺼운 나무 뒤에 몸을 가리고, 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무언가 땅을 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뱀.
활을 들어 올리고 화살 한 발을 장전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쉬이익—
소리가 가까워진 그때.
몸을 내밈과 동시에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코브라 같은 귀가 달려 있는 뱀은, 그곳을 통해서 독침을 뿜어내는 종이었다. 서지아가 알고 있는 동물이었으나, 이곳의 환경에 맞게 진화한 모습이었다.
뱀은 쩍 벌린 입안에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고, 꿈틀거리며 자지러졌다.
서지아는 그쪽으로 다가가 위험성을 확인한 뒤, 잭나이프를 꺼내 척추를 끊었다.
내장과 가죽을 손질해서 살코기만 남기고, 조금 주저하다가 입안에 넣었다.
과거, 부랑자나 다름없는 신세였을 때는 자주 이렇게 살았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하나, 육식을 금하는 전통적인 엘프의 삶을 지키지 않는다는 죄책감은 언제나처럼 찾아왔다.
모든 엘프가 지켜야만 하는 전통이 아니었음에도, 서지아는 이런 수도승의 규칙을 선망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걸 지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고는 했다.
그렇게 당장 급한 허기를 채운 뒤, 다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뭇가지에 묶인 끈.
누가 봐도 사람의 흔적이었다.
서지아가 믿기 힘들다는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본 이유는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탓만은 아니었다.
그건, 폴리에스테르 재질로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하면, 플라스틱.
지구의 사람들이 쓸 것만 같은 그런 색깔 끈.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 만지기만 해도 바스라졌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낡은 인공섬유 조각을 서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끈은 일정한 간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서지아는 신중한 걸음으로 향했다.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끝에서, 서지아는 울타리의 흔적을 발견했다.
반쯤 무너진 울타리 역시 이 숲처럼 하얗게 바래 있었다.
그 안쪽에는 마당이 있었고, 불을 피운 듯한 구덩이가 있었고, 몇 개의 오두막이, 그리고 건물을 지었던 터가 있었다.
서지아는 떨리는 손으로, 땅에 있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의 다 지워진 볼펜 브랜드 마크가 손으로 만져졌다.
한국산이었다.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다. 그건 이계의 균마저 버틴다.
아직은 증명되지 않은 이 사실을 서지아는 발견했다.
“이건…… 이건 설마…….”
서지아는 저도 몰래 뒷걸음질 쳤다.
툭—
무언가 뒤통수에 부딪혔다. 아주 가벼운 느낌. ‘통’ 하는 소리가 살짝 울렸고, 화들짝 놀라며 뒤를 바라본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으아악!”
서지아는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코입이 달려 있는 풍선이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