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3
153화
ep45. 하얀 숲과 오래된 탑 (2)
노미나 산맥은 아주 거친 곳이었다. 어쩌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거리가 멀다는 것 빼고는 별 장애물을 만나지 못한 게 천운일 수도 있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지금 우리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기 때문이었다.
리리는 겁도 없이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높진 않아 보여.”
“아닐 수도 있어.”
나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눈대중으로 보면 대략 20~30m 정도 되어 보였는데, 이건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었다.
“아닐 수도 있다니 무슨 뜻이야?”
“지금 바닥이 보이는 게 아니라 나무들의 꼭대기가 보이는 거잖아?”
리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래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건 숲의 정수리라고 할 수 있다.
“응.”
“저 나무들 크기가 어떤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구나.”
저 나무들의 높이가 50m일 수도 있다. 당장 지구에서도 십수 미터씩 자라는 나무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데, 하물며 이계라면 어떨까.
이런 상황이 오지 탐사에서 굉장히 위험한 요소가 된다. 막상 내려갔는데 높이는 생각보다 높고, 줄 길이는 한참 부족해 버린다면 다시 올라갈 수도, 마저 내려갈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까.
그 와중에 체력까지 떨어져 버린다면?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버린 거다.
“으음…….”
그렇기에 고민을 해야 한다. 나는 가치가 없는 위험은 사양인 사람이니까. 이럴 때만큼은 기꺼이 쫄보가 될 자신이 있다.
목적은 잠시 잊고, 마음을 차분히 두고 눈앞의 절벽을 돌파할 방법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평소 당신이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했어?”
“둘 중 하나였어.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여기에서 바로 캠프 펴고 이틀 정도 쉬거나.”
“이틀을 쉰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갔다가 상황 안 좋으면 되돌아 올라갈 체력까지 비축한다는 마인드야. 조금은 무식한데, 가끔은 그게 유일한 선택지인 경우도 있거든.”
리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으로 걸어가 나무에 등을 기댔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아래를 빤히 바라보다가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뒤 딸깍 하고 굴리듯 보석을 꺼냈다.
사자(死者)의 지팡이.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이 지팡이를 꺼낸 뒤, 어절 하나씩 정성스럽게 내뱉었다.
이 단어는 아직까지도 입에 그렇게 잘 붙지 않는단 말이야.
“탈레talle.”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서늘한 기운이 모이는가 싶더니, 물방울이 맺히듯 허공에서 한 덩어리의 에너지가 출렁거린다. 그리고, 내게 익숙한 형태가 된다.
“왕—!”
“안녕.”
무릎을 굽혀 앉아 녀석을 내려다본다. 녀석의 꼬리가 아주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며,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여전한 순수함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불러냈는데도 서운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불러내지 않을 때 녀석은 어디서 뭐 하고 있는걸까?
궁금하지만, 굳이 지금 해결할 필요는 없겠지.
가방에서 밧줄을 몽땅 꺼냈다. 연결하면 못해도 총 사십 미터는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이.
나는 그걸 존슨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존슨.”
“왕—!”
“이 밑으로 내려가 봐. 이 밧줄로 그 아래까지 갈 수 있는 높이인지 확인해 줄래?”
가만히 듣고 있었던 리리가 뒤에서 난처한 듯 말했다.
“……늑대한테 그런 복잡한 명령을 내린다고?”
믿을 수 없는 모양인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라고.
존슨은 그 구슬 같은 눈으로 밧줄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왕—!”
나를 바라보며 한 번 짖고는 갑자기 부풀기 시작했다. 다시금 서늘한 명계의 기운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존슨이 그 모습을 바꾼다.
작은 시골 강아지 같았던 모습에서, 억센 털로 가득한 거대한 늑대의 모습이 되더니, 절벽 아래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리리와 나는 동시에 절벽으로 다가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존슨은 무협 소설 속 보법을 쓰는 것처럼 살짝씩 튀어나온 절벽의 돌출 부분을 밟으며 순식간에 숲 아래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리리는 아직도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스으으윽—
갑자기 존슨이 우리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으앗…….”
리리는 조금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절벽 바로 앞에서 저렇게 움직이니 위험한 것 같아 잡아줬지만, 리리는 그렇게 자기 몸을 서툴게 다루는 녀석은 절대로 아니었다.
존슨은 다시 주저앉아 꼬리를 흔들면서 우렁차게 짖었다. 덩치에 비해서 하는 짓은 강아지 같았지만, 나는 저게 뭘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없대.”
“……당신.”
리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동물이랑 의사소통이 되는 거야?”
“응?”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의사소통?
……그런가?
“렐릭시나는 명계의 사냥마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존슨은 당신이 키운 늑대였다며.”
“그렇지?”
“사냥개가 훈련받으면 인간의 명령을 잘 알아듣는다고는 하지만, 이건 뭔가……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잖아. 이건 엘프도 잘 못 하는 행동이라고.”
“……음.”
리리가 저렇게 말하고 나서야 나도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내가 동물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된다면 기생체랑 싸우지 않고 말로 해결하려고 들었겠지. 동물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말이야.
“……글세, 언제부터 된 거지? 지금 존슨이 유령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당신, 인간 맞아?”
“내 피 먹어 봤잖아? 어땠어?”
“…….”
리리는 뚱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인간 피였어.”
“그렇지?”
나는 그저 웃었다. 그러면 된 거지. 뭐.
“내려가자.”
“응.”
“렐릭시나는 미안하지만 여기서 조금 기다려야겠는데? 혹시 내려가는 길을 따로 찾으면 뒤늦게 내려와도 돼.”
“크릉…….”
우리는 말뚝을 박고, 근처 나무와 바위 등에 몇 개나 매듭을 지어 단단히 묶은 뒤 조심스럽게 절벽을 내려갔다.
찰팍—
한참 내려간 뒤 바닥을 밟자 물이 튀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절벽 표면을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야.”
“어딘가에서 지하수가 용출되고 있는 거야. 융기된 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는 간혹 절벽 한가운데서 물이 흐르기도 하거든. 아니면 최근에 소나기가 내렸던가.”
“자연 철학자같아.”
우리는 그런 잡담을 내뱉으며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내리막은 여전히 가팔랐다. 산의 영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는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거대한 경관은 직접 부딪혀 봐야 그 진짜 규모를 느낄 수 있단 말이지.
이게 내가 탐험을 좋아하는 이유다. 직접 부딪혀 보면 눈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걸 느낄 수 있으니까.
그 경험은 절대 잊지 못한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는 조금 갑자기 몰려오는 감상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건 목적지를 향한 힘겨운 여정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이 내가 원하던 경험의 연속이니까.
“뭐든 마음 급할 필요가 없지.”
“……그런가.”
황금의 왕좌만을 바라보고 살던 리리도 이제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같이 서서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같이 감상했다.
허공에 떠 있는 동그란 행성. 고리를 가지고 있는 그건 어떤 비유로도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아름다웠고, 그 아래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하얀 숲은 쓸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액션캠의 전원을 켜고, 눈앞의 풍경을 사진기에 남겼다.
찰칵—
갑자기 뒤에서도 찰칵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리리도 나처럼 카메라를 들고 전방을 가리키고 있었다.
위잉— 하며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사진이 나온다. 아직 검은색일 뿐이지만 조금 공기에 노출시키면 화상이 떠오르겠지.
살짝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거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잡고 흔들어 봐.”
“……이렇게?”
시키는 대로 잘 따르자, 사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진 위쪽에는 잘린 행성의 아래쪽, 그리고 사진의 아래에는 하얀 숲이 잘 담겨 있었다.
“잘 찍네.”
“……유령을 사냥하는 기계가 아니었구나.”
조금 더 사진을 감상하도록 기다려 줬다.
내친김에 식사까지 해결했다. 숲에서부터 계속해서 들려오는 허밍을 눈 감고 감상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건, 숲 안에 있는 가느다랗고 드높은 탑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출발했다. 여기에서 하얀 숲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이틀의 시간이 꼬박 걸렸다. 거리도 거리고, 지형이 워낙 험한 탓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민둥산이나 다름없는 바위 구역을 지나, 넓게 펼쳐진 분지 형태의 평야에 다다랐다.
우리 눈앞에 좌우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숲을 바라보았다.
“하얀색이야. 그리고…… 영혼이 보이지 않아. 죽은 숲인가?”
리리는 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숲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대리석처럼 새하얗고, 여기저기에 재 같은 가루까지 휘날리는 모습이니 신기하게 볼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내가 집중하고 있는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이거, 익숙한데.”
위에서부터 느꼈던 기시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몰라도 계속해서 익숙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익숙하다고? 이런 숲이?”
나도 이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대답을 미루고 그저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 * *
리리는 어느새 아무런 말도 없이 숨을 죽인 채, 그저 강선후의 뒤를 따라만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로 위까지만 해도 여유가 가득했던 그였다. 이 순간뿐만 아니라, 강선후는 어떤 풍경을 맞닥뜨리든 열정과 기대감만을 품고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의 강선후도 언뜻 보면 그렇게만 보였다. 이곳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움직이는 것처럼 판단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와 같이 있었던 리리는 영혼을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강선후가 아마도 처음으로, 아주 강렬한 욕망을 원동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숲에 처음 들어갈 때 항상 보여 주던 신중함, 그리고 조심스러움을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강선후는 거의 뛰는 속도로 이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숲 어딘가에 있는 탑을 향해서 가는 걸까? 지금도 계속해서 귓가에 맴도는 허밍에 홀려 버린 걸까?
그건 아니었다. 강선후의 의식은 언제나처럼 또렷했다.
지금 강선후를 지배하는 감정은 조급함이나 공포,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그건 폭발할 것만 같은 열망이었다. 마치 어제도 돌아다녔던 것 같은 익숙한 발걸음, 그리고 너무나도 반가운 듯한 느낌.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의심하면서도 또 반대로 확신을 가지기도 하는 모순적인 눈빛.
강선후는 이 숲을 너무나 익숙해하고 있었다. 오래전 머물렀던 고향에 오는 것처럼, 마치 눈을 감고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강선후는 전혀 뛰지 않았는데도, 리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게 벅찼다.
그렇게 며칠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이동했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도착했다.
그곳의 풍경은 리리마저 생각을 정지하고 바보같이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이곳에 누군가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데.
눈앞에 있었던 건 캠프의 흔적이었다. 얼기설기 지었던 울타리의 무너진 흔적들.
천장이 날아가 버린 오두막의 나무 벽.
무언가를 훈제하고 요리를 하는데 썼을 것 같은 야외 부엌. 그리고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깊게 파 들어간 화로.
그 옆에 놓인 건 돌삽인 걸까? 너무 삭아서 원 형태를 잃어버려 잘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이건 분명히 사람이 살던 흔적이었다.
강선후는 그 앞에서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리리는 그의 얼굴을 언뜻 바라보았다가, 눈을 떼지 못했다.
강선후는 지금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살던 캠프야.”
“……당신이.”
리리는 그제야 다시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스쳐 지나간 손길이 바로 옆에 있는 남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했다. 강선후가 나무를 깎을 때 쓰는 특유의 기법이 모든 부분에서 보이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저 기분 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당신이 조난당했을 때, 살던 곳이라고?”
“……반년만이네.”
반년만? 리리의 눈에는 못해도 수천, 수만 년 전의 흔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리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비밀을 처음으로 엿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고,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이 남자의 감상을 방해할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리의 배려 덕분에, 강선후는 추억 속에 충분하게 몸을 담그고 나왔다.
그리고,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쿠크리를 꺼내서 무너진 천장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리리도 옆에서 도왔다.
그 아래에 드러난 건, 트랩 도어였다.
지하실로 향하는 문.
“…….”
강선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리리는 기대하고 있었다.
저 아래에서 고대 대수림의 비밀, 그리고 그 옛날 포식자의 비밀을 조금 엿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