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ep45. 하얀 숲과 오래된 탑 (3)
강선후는 트랩도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리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 아래에 뭐가 있는지 강선후는 기억하고 있을까?
그 눈빛을 보고 가늠해 봤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역시 이 아래에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저 거슴츠레한 기억을 애써 더듬어 보다가는 포기한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이 아래에 있는 게 무엇이든 그건 강선후의 과거였다. 아마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될 그의 과거.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리리 역시 온갖 잡념으로 머리가 가득찰 무렵 비로소 강선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다시 우리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 상황을 말해 준 적 있었나?”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내 선택이 아니었어. 내가 항상 가지고 있는 일지 세 권 있지? 그걸 다 채우고 나니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시 우리 세상으로 끌려간 거야.”
“차원문 같은 게 생기고?”
“응.”
강선후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지구로 귀환하기 직전의 기억이라 그 내용은 꽤 선명했다.
그때, 예고도 없이 갑자기 빨아들였던 차원문.
그건 무지갯빛을 하고 있었다.
“……비프로스트처럼.”
강선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트랩도어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확 뿜어져 나오는 먼지 섞인 공기는 고대의 그것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 진한 밀도에 리리는 약간 아찔함마저 느꼈다.
“……?”
매캐한 냄새를 생각했던 리리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향기에 당황했다. 지하실에서 올라오고 있는 이 냄새는 달콤했다.
“……윽.”
정신이 아찔해지고 의지가 흐려지며, 나태와 탐욕의 고삐가 풀릴 정도의 지독한 달콤함이었다. 리리는 지금 느껴지는 이 모든 감정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역설적으로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반면에 강선후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듯 평소의 눈빛으로 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선후는 언제나처럼 룬으로 불꽃을 불러낸 다음 난간에 매달려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높지 않았다. 사다리는 완전히 삭아 그 흔적만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리리도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강선후는 손을 뻗어 리리를 받쳐준 뒤 주변을 살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구니나 상자의 흔적이 몇 개 보였지만 그것들은 전부 새하얗게 바래 있었고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었다. 창고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텅 비어 있는 느낌.
리리는 강선후의 과거를 엿보는 지금 상황에 살짝 기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포식자의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한 기반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선후가 어느 한쪽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떤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왜 저것만 멀쩡한 거야?”
리리는 그 모습에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하얗게 바래고 무너져 있는 이 숲에서, 저곳에 있는 탁자만이 바로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원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동그란 어떤 물체가 놓여 있었다. 강선후는 조심스럽게 룬의 불꽃을 그쪽으로 보냈다.
그 물체는 매혹적인 붉은빛을 띠고 있는 열매였다.
어떤 낡은 메모장 옆에 놓여 있는 열매.
리리는 그걸 보면서 아찔함을 느꼈다. 강력한 환각제를 한 줌 삼켰을 때의 기분.
저 열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색이 좀 짙은 사과처럼 보였으나 그건 단순히 사과가 아니었다.
리리는 저 열매를 생전 본 적 없었으나 그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선악과. 최초의 세계수가 맺었다는 두 개의 열매.
그중 검은 부분.
그게 강선후의 과거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많은 비밀이 풀렸다. 이곳은 과거의 대수림이었고, 언젠가 세계수가 하늘 가득히 드리웠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열매 중 하나를 강선후가 가지고 있었다.
선악과의 검은 부분.
그 정체는 전승으로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직접 본 이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유.
그건 모든 필멸자가 내면에 품고 있는 선악과의 열망 때문이었다.
그걸 먹는 이는 삶 속 모든 고통에서, 고뇌에서, 슬픔에서, 공포에서 해방된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가 항상 느낀다는 정순한 형태의 쾌락 속에서 살게 된다고 했다.
악마의 힘을 얻고 자유자재로 다루며 이 땅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했다.
죽지 않고 명계에서 언제든 다시 고개를 내밀 수 있으며, 땅 아래에서 신과 불멸, 그리고 필멸을 농락하는 존재.
그 힘을 필멸자의 그릇에 온전히 담을 수 있다고 했다.
이 힘이 있다면 왕좌로 향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왕좌는 어쩌면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숙명이란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숙명에 도달한다고 과연 행복해질까? 문을 지키는 용이 행복해 보였나? 정의에 배신당한 천공의 기사는? 끝내 도시와 함께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거인은?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잖아? 이 인간이 없었다면 그들은 영원히 그 고통 속에서 헤엄쳐야 할 운명이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리리는 생각했다. 숙명을 추구한 이들의 결말은 왜 항상 이런 거지?
리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회의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말했다. ‘네 마음에 솔직해져.’
천공의 기사에게 살해당한 황제도 악마의 유혹에 빠져 있었다. 그 황제는 살해당하기 전에는 성군으로 추앙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끝내 이걸 선택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 아닌가?
리리의 마음속 검댕은 다시 한번 말했다. ‘네 마음에 솔직해져.’
리리는 그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 차가움이 닿았고, 달콤한 냄새에 코에서 피가 흘렀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초점은 흐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리리.”
그 순간, 강선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리는 현실을 자각했다. 손에 들려 있는 위대하고 끔찍한 열매를 내려다보았다.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괴감, 죄책감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읏.”
리리는 안주머니에 넣어 둔 천 조각을 꺼내 거칠게 자신의 손목을 묶었다. 이가 빠질 정도로 강하게 물어 잡아당겨 풀 수 없는 매듭을 지었다. 쓸린 손목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피가 맺혀 나왔다.
리리는 풀썩 쓰러지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선악과는 땅을 굴렀다.
“미안해. 미안해…….”
강선후는 조심스럽게 리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쿠크리를 꺼냈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리리의 손목에 묶인 천 조각이 잘려 나갔다.
“뭐가 미안해?”
“내가, 내가 당신을 믿지 못하고 고작 이딴 열매에…… 너무, 너무 자존심 상해.”
강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랬어. 결국에는 먹지 않았잖아? 네가 이겨 낸 거야. 자부심을 가져야지. 저건 세계구급 존재의 힘이라고?”
강선후는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 말투 덕분에 리리는 더욱 차분해질 수 있었다. 이제 조금은 차가워진 시선으로 선악과를 바라볼 수 있었다.
강선후는 과거에 선악과를 획득했다.
그 순간, 이제까지 엿봤던 그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죽어서 명계에 간 뒤에 인간 둘을 이끌고 지상으로 다시 올라왔다. 그건 후대에 나크샤론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거인왕의 딸과 대면한 적 있었으며, 황금의 시대 때 살았던 흑성의 연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왕의 언어를 알고 룬을 사용할 수 있다. 가질 수 있을 리 없는 지배자의 문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는 업적들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리리는 모든 비밀이 풀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당신, 선악과를 먹은 거야?”
리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룬의 불꽃에 비춘 그 얼굴이 주황빛으로 빛났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악마가 된다. 그 이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도 강선후는 여전히 인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선악과를 먹고도,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야?”
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방금 전 선악과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몸으로 느꼈기에 더욱 그랬다.
강선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선악과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그것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순간, 리리는 깨달았다.
선악과에는 누군가 베어 문 흔적이 없었다. 완벽하게 처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모습이 의미하고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선악과를 먹지 않은 거야?”
강선후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리리는 그제야 정답에 도달했다. 이 순간 리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강선후가 들려주었던 조난 생활의 경험담이었다.
이계의 마력을 독기처럼 느껴서 수년간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매일 밤 비명을 지르며 해가 뜨기를 버텼다고 했다.
제정신을 찾다가도 꿈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환각에 시달렸다고 했다. 기억이 조각나고 부서질 정도라,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고. 결국 도시에서마저 외면당하고 쫓겨났다고 했다.
식량을 구하지 못해 날마다 배고픔에 시달리고, 몇 번이나 아사 위기를 겪으며, 이해할 수 없는 생물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땅에 떨어진 배설물을 주워 먹으며 오랫동안 버텨왔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강선후는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수단이 눈앞에 있었음에도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강선후는 지금 테이블 위에 놓인 메모를 들어 올려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를 도와준 엘프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 끝까지 인간으로 남겠다.
* * *
대수림이 아직은 대수림이 아니었던 시절.
강선후는 쓰러졌다. 몸에 양분은 없었고 상처는 곪았다. 아직 이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시절, 아주 작은 실수라도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강선후는 그 마지막 실수를 피하지 못했다.
강선후는 어느새 자신이 누워 있는 이곳이 흙바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푸라기로 이루어진 침대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 사이로, 투박한 나무로 된 물병을 들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얼룩진 흰색의 사제복. 앉으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지는 금빛 장발.
자신의 입가에 흘려 주는 물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그녀가 떠나는 걸 직감한 날, 강선후는 온 힘을 짜내서 목소리를 내었다.
“그…….”
“정신이 드시나요? 위급한 상태는 넘겼으니까 잘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누구…….”
엘프는 무릎을 굽혀 강선후의 상태를 살폈다. 그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승려 특유의 온화함을 품고 있었다.
“엘프예요. 이 숲에서 참선을 시작한 수도승.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사람이 쓰러진 걸 봤을 때는 좀 놀랐지만…… 당신을 치료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왜, 날…….”
“왜 구해 줬냐고요? 음…… 이것도 수행에 필요한 덕이지 않을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사람을 돕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나요?”
“이름…….”
“제 이름이 중요한가요?”
엘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조금 고민을 하다가 떠나기 전 한마디를 남겼다.
“엘신. 당신은요?”
* * *
서지아는 길을 걷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계에서 만들어졌을 리 없는 합성 고무 재질의 풍선. 게다가 눈코입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는 풍선이라니.
처음에는 혼비백산 놀라서 도망쳤다. 그리고 도망친 그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뒤에 다시 그 풍선이 있었을 때는.
“으아아아아!”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이제 슬슬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풍선은 자신을 어딘가로 인도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풍선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가자 그곳에는 이 숲 어딘가에 있는 바위산이 드러났다. 서지아는 우두커니 그 바위산의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는데…….
툭—
갑자기 위에서 풍선이 떨어지며 서지아의 얼굴에 부딪혔다.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도끼눈을 뜨고 풍선을 바라보았다.
“왜 이런 식으로 알려 주는 거야!”
서지아는 그 표현을 재촉으로 느꼈다. 그래서 더욱 서둘러 바위산 꼭대기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제단이 있었는데, 하얗게 바랜 돌 제단 위에 무언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어떤 문자였다.
그리고, 서지아는 그걸 바라보자마자 수 초 정도 의식을 잃었다.
간신히 눈을 돌리고 심호흡했다.
“허억, 허억…….”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으나 직감적으로 느꼈다. 실제로 들어 본 적이 있는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이건 왕의, 왕의 언어야…….”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없었던 풍선 하나가 돌멩이에 묶인 채 나풀거리고 있었다.
“넌, 뭐야. 대체 뭐야…….”
풍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날 도와주는 거야? 아니면, 이 언어를 그 남자한테 전달하라고?”
풍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풍선이니까.하지만 그 의도 자체는 명확했다.
이 풍선은 목숨을 걸고 대수림에 온 서지아를 답안지로 인도하고 있었다.
“……왜 날 도와주는 거야?”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풍선이 흔들렸다. 자연스럽게 뒤로 도는 그것.
거기에는 무언가 적혀 있었다.
룬도 아니었고, 이계의 언어도 아니었다.
그건 한글이었다.
「내 친구의 친구는, 내 친구.」
서지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