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5
155화
ep45. 하얀 숲과 오래된 탑 (4)
내가 선악과를 먹지 않은 이유가 이 메모장에 적혀 있었다. 조금은 진정한 리리도 내 옆으로 다가와서 메모장을 바라보았다.
리리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조금 인상을 쓰더니 내가 비뚤하게 쓴 내용을 읽어 냈다.
“엘프? 엘프랑 인연이 있었던 거야?”
리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 줄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나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나 보네.”
“아직.”
리리의 말대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이 메모 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닐 게 분명했다. 필체에 당시의 심리 상태가 여실히 담겨 있었으니까.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선악과를 눈앞에 두고 적은 메모다. 그 유혹에서 어떻게든 이겼다고 쳐도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리가 없었겠지. 당장 정신력이 강한 편인 리리조차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내게 이 시절의 기억이란 항상 그랬다. 아예 떠오르지 않는 것도 많았고, 드문드문 퍼즐처럼 쪼개진 것도 많았다.
어젯밤 꾼 꿈의 내용처럼 기억이 날 듯 말 듯해서 조바심 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눈앞에 선악과를 두니 이게 뭐고 그 시절의 내가 어땠는지는 대충 기억이 날 것 같은데 조각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경우 생각을 깊게 하는 편은 아니다. 떠오르지 않을 기억은 아무리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아 봤자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생각하지 않고 아공간 가방의 입구를 풀어헤쳤다.
“챙겨 가려고?”
“응, 이런 데에 있기에는 아깝잖아? 나는 이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리리는 아는 것 같은데?”
리리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선악과의 유혹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그건 신화적인 보물이야. 황금의 시대보다도 이전의 것이라고 들었는데.”
아무튼 뭔가를 아는 듯하니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공간 가방의 입구를 풀어헤친 뒤 선악과를 쑤셔 넣었는데…….
순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잠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리리 역시 신속하게 뒤로 튀어 나갔다. 압축된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이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가방은 땅으로 떨어졌고 열매는 벽에 부딪힌 뒤 땅을 굴렀다.
“뭐야?”
얼굴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리리가 중얼거렸다. 나도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튕겨 나갔는데?”
아공간 가방이 선악과를 거부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선악과가 맛 없었나?
순식간에 차가워진 머리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선악과가 너무 강력한 물건이라 아공간 가방에 들어갈 수 없는 건가? 아니, 내 생각에 이건 아니었다. 황금의 유물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가방이잖아?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면 굳이 아공간 가방에 넣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가방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물건의 공통점은?
나는 언제나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디오네의 심장 조각을 꺼내 바라보았다.
이것 역시 아공간 가방에 들어갈 수 없다. 왜?
“……영혼이 담겨 있으니까.”
쉽게 말하면 아공간 가방은 생물을 넣을 수 없다.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 짓는 기준은 아마도 영혼이었다.
그렇다는 건.
“……선악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리리도 감을 잡은 듯 그렇게 이야기했다.
“저게 의지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
살아 있어서 사실은 우리 말을 전부 엿듣고 있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인데.
“음습한 놈이네?”
왠지 미소가 나왔다. 갑자기 웃음이 나오는 게 조금 뜬금없지만 숨어서 내 말을 엿듣덧 쥐새끼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이게 살아 있고 영혼을 품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공간 가방에는 들어가지 않으니 따로 챙겨 온 비상용 가방에 선악과를 넣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어디에 쓸지 연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땅이 흔들렸다.
저 멀리서 폭탄이 터진 것 같은 폭음이었다. 이계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건…….”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야.”
귀 보다는 피부로 느껴지는 진동. 후드득 하고 천장에서 모래 먼지가 떨어졌다. 이 지하실의 천장이 무너질까 걱정되어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리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좌우를 살피다가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곳은 새하얗게 바랬다곤 하더라도 숲의 형태를 온전하게 가지고 있으니까. 숲은 생각보다 조망이 안 좋은 곳이다. 온갖 시야를 가리는 것투성이라 간혹 햇빛도 들어오지 않으니.
리리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후, 바로 옆에 있는 튼튼한 나무의 기둥을 밟고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나뭇가지 하나를 잡은 후 빙글 돌아 올라탄다. 그 특유의 날렵한 몸짓으로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에 도착했다.
나는 조금 더 편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방랑자의 화살을 소환한 뒤 밧줄 화살을 위로 쏘아 낸 뒤 빠르게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확보한 시야에 보이는 건,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는 하얀 숲.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 구름 뒤편에 가려져 있는 고리가 달린 거대한 천체.
그리고 이 숲 가운데에 드높게 솟아 있는 탑. 이 감미로운 노래는 저곳의 꼭대기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구우웅—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진동 역시 그 탑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뱀이 탑을 오르고 있었다.
저 탑을 몸으로 감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뱀이 탑을 휘감으며 오르고 있었다.
구우웅—
가끔씩 멈춰 서 간헐적으로 탑을 물어뜯었다. 뱀의 치악력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뱀은 계속해서 물었다. 마치 부수고 싶은 것처럼.
그러다가는 또 포기하고 탑을 기어올랐다.
“왜 저러는 거지?”
뱀의 모습을 본 리리가 혼잣말을 했고, 나는 방금 답을 유추해 냈다.
“노래를 멈추게 하려고.”
“탑 꼭대기에서 나오는 노래를……?”
리리 역시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했다. 우리 둘 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이이이이—
뱀이 내뱉는 소름 끼치는 소리는 그 노래를 향한 증오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저건…… 그냥 뱀이 내는 소리랑 다를 바 없잖아.”
“사냥감을 앞에 둔 뱀이 내는 소리야.”
리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여러 번 들어 봤어.”
“…….”
리리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탑에서 나는 노랫소리와 그걸 멈추려는 뱀. 그리고.
“저건 그냥 큰 뱀이 아니야.”
“그러면?”
“기생체야.”
그 순간, 다시 리리의 동공이 붉게 물들었다. 리리는 영혼의 상을 볼 수 있는 눈으로 뱀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숲의 심장에 기생하여 그 양분을 자기 것으로 삼는 괴생물, 기생체.
나와도 많은 악연을 지니고 있는 그 녀석들은 이곳에도 여실히 존재했다.
우리는 지금 대수림에 기생한 기생체를 목도에 두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해는 언제 지는지, 저 탑과 이곳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지, 그사이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 가능성까지.
턱—
아공간 가방을 풀어 땅에 내려놓은 뒤 입구를 열어젖혔다. 리리는 이미 알지만 묻는다는 태도였다.
“다음에 할 건?”
“사냥.”
“왜?”
리리는 탑이 있을 법한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목표랑은 별로 관련 없을 가능성도 있잖아?”
“대수림에 기생한 기생체라니.”
나는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을 거 같지 않아?”
“그것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거지?”
새삼스러운 질문이라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리리 역시 답변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잠자코 품속에 있는 나이프를 점검할 뿐이었으니까.
“리리, 다시 수업 시간이야.”
“이번에는 뭘 알려 주시려고? 선생님?”
“거대 괴수를 잡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
“기동성.”
나는 탑이 있을 법한 위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외성.”
“해결 방법은?”
나는 숨을 한껏 들이켰다. 그리고, 외쳤다.
“렐릭시나!”
저 괴물이 내 외침 따위에 반응하진 않겠지?
사실 반응해도 상관은 없지만.
내 외침에 화들짝 놀란 리리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 * *
서지아는 가던 길을 멈추고 탑을 오르기 시작하는 뱀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강선후를 돕기 위해 엘신의 화살을 챙겨 왔고,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걸 쏜다는 다짐을 했지만, 어디를 향해서 어떻게 쏘아야 할지는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너무 대책 없이 온 건가?’
아까의 풍선을 바라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존재가 무언가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
그런데, 어느새 그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뭐지? 이계의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건가? 너무 지구에 익숙해진 건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다시 입술을 깨물며 탑을 바라보았다.
그 꼭대기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노랫소리. 그리고 그 노래를 증오하는 듯 탑을 오르는 거대한 검은 뱀.
신화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찾을 수 있는가? 최소한 서지아는 이 비슷한 이야기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서지아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너무 대책 없이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저하다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우선 상황이라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녀는 엘프였고, 숲에게 거부당하는 반쪽짜리 엘프라도 나무를 타는 데에는 익숙한 법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나무 위에 도착했을 때.
“……!”
서지아는 저 탑을 오르는 게 거대한 뱀 하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옆을 오르고 있는 건 푸른색 불꽃으로 이루어진 줄기였다.
아니, 저건…….
말?
푸른색 불꽃을 꼬리처럼 늘어뜨리며 달리는 흑마. 서지아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이었다. 심지어 그 이름마저 서지아가 붙여 주었다.
그러니까, 저게 지금 탑을 수직으로 달려 올라가고 있는 건데.
무슨 고스트 라이더야? 서지아는 절로 벌어진 입을 차마 다물지 못했다.
강선후는 수직으로 달려 올라가는 말에게서 뛰어내렸다. 말과 그의 몸은 밧줄로 묶여 있었다. 물론 리리 역시 그랬다.
강선후는 공중에서 황금 활을 꺼낸 뒤 시위를 당겼고, 그 등에 매달려 있는 리리가 유리병 하나를 뱀에게 던졌다.
깨지며 흩날리는 내용물, 그리고 그곳에 연달아 적중하는 화살.
화살에 매달려 있는 화합물 병이 산산이 조각나며, 폭발이 일어났다.
불꽃은 리리가 뿌린 기름을 따라 퍼져 나갔다. 팔다리가 없는 뱀은 등줄기를 따라 퍼져 나가는 불꽃에 어쩔 줄 몰라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서지아의 입에서 끝내 터져 나온 말은 이거 하나뿐이었다.
“저 미친, 대책 없는 놈이……!”
서지아는 밧줄에 매달려 활강하는 인간과 그 인간에게 매달려 있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리리도 서지아 자신처럼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나무 활을 들고 있는 그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려가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지? 그렇게 멀진 않은 거 같은데.
그 순간, 서지아는 문뜩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저 스스로 대책 없다고 자책하고 있었는데.
“……저 녀석이 더 그러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이상한 곳에서 용기가 생긴 게 퍽 우습게 느껴졌기에 그랬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 대책 없이 나가 보기로 했다. 나무를 미끄러지듯 내려가 화살을 한 발 장전하고, 탑을 향해서 달려나갔다.
그 순간, 문뜩 깨달았다. 탑에서 들려오는 노래의 언어에 대해서.
그건 아주 오래전에 쓰였다는 고대 엘프의 언어였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