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ep46. 사냥, 검은 뱀 (2)
한 달이 지났을 때 검은 뱀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무언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습격자는 잊어버릴 때쯤 자신이 있다는 흔적을 의도적으로 뱀에게 보여 줬다. 뱀이 자신을 절대로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끝내 습격자는 모습을 드러냈다.
탕- 탕- 탕- 탕-
45구경 콜트 탄환이 영거리에서 검은 뱀의 두개골을 두드렸다. 뚫리진 않았으나 그 충격은 뇌를 흔들었다.
검은 뱀은 순간 눈앞이 흐려짐을 느꼈다. 뇌에 전달된 강렬한 충격이 신경을 뒤엉키게 만들었다.
위아래, 좌우가 구분되지 않았다. 시야가 돌아오고 지평선이 사선으로 기우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자신이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몸을 지탱하는 척추에 힘을 주었다. 물결치듯 다시 솟아오르는 몸. 머리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니, 애초에 그놈은 대체 뭐지? 검은 뱀은 방금 전 눈앞에서 아른 거리던 존재를 떠올렸다. 미간에 있었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뱀의 눈은 자신의 미간을 바라보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니까.
뱀은 머리를 뒤흔들며 생각했다. 떨어져 나갔을까? 아니면 여전히 진드기처럼 미간에 붙어 있을까? 그게 두려워져 검은 뱀은 온 시선을 미간에 집중했다.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없는 걸까. 보이지 않는 걸까. 그 판단에 온 신경이 쏠렸다.
그렇기에 뱀은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네발 달린 짐승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것의 존재를 다시 인지했을 때는 이미 목덜미 근처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뱀은 당황했다. 그곳은 뱀에게 있어서 약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꼬리도 닿지 않고, 혀도, 입도 닿지 않는 그 구간.
뱀은 그곳에서 달리는 말을 뒤늦게 눈치챘다.
하지만 이 뱀은 그저 기생체가 효율을 위해서 뱀의 형태를 했을 뿐이었다. 그 말뜻은 양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 뱀은 탑을 오르기 위해 땅 밑에서 정기를 충분히 흡수한 상황이었다.
「쉬이이익—」
뱀이 불길한 숨결을 내뱉자, 뱀의 가죽을 가득 덮은 비늘이 곤두서더니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말을 사정 없이 베었다.
이거라면 떨어지겠지. 검은 뱀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자신을 타고 오르는 게 명계에서 태어난 사냥마의 몸과 생명의 정령이 창조한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발굽과 발목을 지나치는 날카로운 칼날에 난도질당한다. 흑마가 입을 벌렸지만 흘러나오는 건 신음이 아니었다.
렐릭시나, 맹수의 영혼을 가진 명계의 사냥마는 오히려 분노를 끌어올렸다.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발굽을 이루는 불꽃은 푸르다못해 하얀빛이 나기 시작했으며, 끝내 푸르게 빛나는 발자국을 남길 정도로 강렬한 불꽃을 뿜어내었다.
거칠게 달려 나가는 그 등에는 리리가 타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납작하게 달라붙듯 올라탄 모습. 세차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눈을 부릅뜬 채 강선후가 말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렐릭시나, 부탁할게……!”
리리는 짐짓 긴장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리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검지에는 하늘색을 띠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기록관의 반지>
첫 번째 보석이 빛을 발하나 싶더니 저장된 룬 문자가 발사되었다.
발사된 룬 문자는 그대로 뱀 표면을 따라 새겨져 희미한 빛을 발했다.
마르크marlk.
‘표식’ 혹은 ‘목표’라는 뜻의 룬 문자.
이게 새겨지는 물건은 어디에 있든 강선후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뱀은 이걸 지울 수 있는 팔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렐릭시나! 됐어!”
“크아아악—!”
리리의 신호를 듣자마자 렐릭시나는 더욱 속도를 내서 머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수 초가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강선후는 뱀의 미간에 꽂힌 밧줄에 매달려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강선후가 아무리 강인한 인간이어도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저런 상태로 매달려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귀에 잠깐 힘이 풀렸는지 쭈욱 흘러내리다가 다시 고정되는 게 보였다. 강선후는 이를 악물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리는 허리를 쭉 폈다. 이제는 바람마저 따라잡을 속도로 달려나가는 렐릭시나의 등은 격하게 흔들렸다. 허벅지가 터져 나가도록 힘을 줬다. 이제는 고삐에서 손을 놓을 차례였다.
리리는 왼손바닥이 찢어지도록 부여잡고 있었던 녹색 보석에 정신력을 불어넣었다.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나 싶더니 순식간에 발생하는 금빛 화살.
<방랑자의 활>
서지아가 강선후에게 넘겼던 첫 번째 황금의 유물.
그건 지금 리리의 손에 있었다.
리리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아주 튼튼한 밧줄, 그리고 촉이 뭉툭하여 맞아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화살을 상상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은빛 밧줄 화살. 리리는 밧줄의 반대편 끝을 렐릭시나의 등에 한 바퀴 감았다.
“렐릭시나, 버텨 줘.”
시위를 당겼다. 기마궁술을 배운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거친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강선후는 리리에게 두 개의 황금 유물을 기꺼이 넘겼으며, 지금 뱀의 머리 위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전부, 강선후가 리리를 믿어 줬기 때문이었다. 리리가 맡은 바를 잘 해낼 수 있다는 아무런 의심이 없는 믿음.
뱀파이어는 영혼을 연결한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리고 그 상대 역시 마찬가지길 언제나 바란다.
강선후는 리리를 믿어 줬고, 지금 이 순간 리리는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자 맹세했다.
‘제발…….’
심호흡을 했다. 숨을 멈췄다. 달리는 말 위에서 그게 가능할 거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으나, 막상 해 보니 됐다. 시야가 좁아졌고, 목표물과 나 사이의 공간만이 눈앞에 일직선으로 펼쳐졌다.
시위를 부여잡고 있는 손이 멈췄다. 황금의 유물은 언제나 사용자와 감응하고 사용자의 의지가 순수하다면, 그것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뜻을 품는다.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허공을 갈랐다. 그 목표는 강선후.
정확히 말하면 강선후의 바로 측면.
좌우로 세차게 흔들리는 강선후의 옆을 정확히 지나가는 밧줄, 그 순간, 강선후는 그 밧줄을 부여잡아 매달렸다. 그러고는 아래로 추락했으나, 렐릭시나는 발목에 더욱 힘을 주어 그 무게를 지탱했다.
뱀 위를 달려나가는 렐릭시나는 어느새 머리 쪽에 도착했다. 강선후도 밧줄을 잡고 기어올라 다시 렐릭시나 등에 탑승했다.
“리리!”
리리는 뒤를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강선후는 리리의 뒤쪽 안장에 자신을 몸을 고정하며 말했다.
“잘했어!”
“……운이 좋았어. 너무 무모했잖아.”
리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세찬 바람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선후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리리 앞쪽으로 뻗어 고삐를 대신 잡았다.
“렐릭시나!”
“크릉—!”
“뛰어!”
렐릭시나는 뱀의 머리에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반 바퀴 돌아 다시금 탑에 네 다리를 박아 넣었다.
낙엽을 치우는 갈퀴처럼 네 다리는 탑의 벽을 긁어 내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탑을 이루던 석재가 부서지며 그들과 같이 땅으로 떨어졌다.
잔해 조각이 얼굴로 날아들며 상처를 내었다. 하지만 리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이 폭풍 같은 상황이 만들어 내는 흥분감이 모든 감정을 지배했다. 강선후를 만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격정적 감정이었다. 리리는 어느새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걸 깨닫고 흠칫 놀랐다.
강선후는 자신의 왼손에 들려 있는 얇은 밧줄을 들어 보았다. 이건 여전히 뱀의 미간에 꽂혀 있는 단검에 연결되어 있었고, 금속 재질이었다. 이걸 붙잡고 버틴 덕분에 손바닥은 만신창이였으나,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부여잡은 목적을 이제 달성할 차례였다.
강선후는 금속 줄을 꽉 부여잡은 채, 이를 악물고 외었다.
“테르마tterma.”
스파크가 튀며 강렬한 전류가 금속 줄을 타고 올라가 단검에 닿았다.
단검이 꽂혀 있는 곳은 강선후가 네 발의 총알을 박아넣어 뚫린 바로 그 구멍. 금이 간 두개골 바로 위.
전류는 기생체에 뇌에 바로 파고들었다. 강선후 스스로가 견딜 수 있어야 했기에 그렇게 강한 위력은 아니었으나, 뇌에 그대로 때려 박힌 전류에 위력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키익— 키이익! 키익!”
뱀은 경련했다. 신경이 요동쳤고 근육이 경직되었다. 유연하게 움직이던 뱀의 몸이 꼿꼿이 섰다. 거대한 검은색 막대기처럼 몸을 수직으로 세운 채 경직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쩍 벌린 입은 하늘을 향했고 혓바닥조차 가시처럼 곧추서서 부들부들 떨리기만 했다.
물론 이건 순간뿐이다. 강선후는 금방 밧줄을 놔야만 했다. 그 역시 감전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애초에 이 전류는 기생체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고정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지.”
지금 기생체는 경직 때문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이지 못한다면, 좋은 과녁이다.
강선후는 바닥에 도착한 뒤 땅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외었다.
“카츠kaahz.”
그 순간.
숲 여기저기에 설치되어 있었던 발리스타가 회전했다.
강선후의 명령은 이 탑을 중심으로 거대하게 그려진 룬 마법진이 전달했다.
발리스타를 움직이는 동력은 버뮤다 숲의 씨앗에서 막 태어난 식물들이었으며, 목표는.
“기생체의 목에 새겨진 마르크marlk.”
처음부터 그렇게 작동하도록 그려진 룬이었다.
한 달 동안 사방에 설치해 놓은 룬 동력 발리스타가 일시에 발사되었으며, 그것들은 전부 리리가 직접 새긴 룬 문자를 향해 직진으로 나아갔다.
화살은 땅에서 급속도로 자라나는 식물의 줄기였고, 그것들은 뱀의 목에 꽂히며.
쿠우웅—!
검은 뱀을 속박하여 땅으로 끌어내렸다.
땅에 처박히며 뱀의 입에 물려 있었던 십자 모양의 통나무가 위턱과 아래턱을 꿰뚫었다. 처음 습격이 시작되고 수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뱀은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인과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 * *
서지아는 한 달 동안 왕의 언어가 적혀 있는 제단 근처에 거점을 잡고 머물렀다. 이 숲에서 식량을 구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기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애초에 엘프는 인간에 비해서 그렇게 많은 걸 필요로 하는 종족도 아니었다.
강선후가 사라지고 한 달 동안, 저 거대한 검은 뱀이 이 숲을 온통 뒤지면서 그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쩔 때는 자신이 뱀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강선후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이 거대하고 온통 하얀 숲에서 그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괜히 신호를 보냈다가는 뱀에게 들킬 염려마저 있었다.
강선후는 저 뱀을 주기적으로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뱀의 분노가 쌓여 간다는 걸 서지아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서지아는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매번 리리가 말해 주는 강선후의 영웅담. 용과 마주하고 기생체를, 심지어 거인마저 사냥했다는 그 강선후의 전투를 목격할 수 있는 순간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무려 한 달 동안! 강선후가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쉬이이이이익—!」
저 멀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뱀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땅으로 처박힌 뱀의 주변으로 솟아오르는 모래 먼지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뱀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끝났다. 무력하게 잠들어 있는 동물의 목을 몰래 따는 것처럼 너무나 쉽게 모든 일이 일어났다.
서지아는 직접 보고 나서야 납득했다. 강선후가 사냥하는 방식은, 얼마의 시간을 쓰더라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는 최선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쉽게 행할 수 없는 기다림의 이론. 강선후는 그 인내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뱀의 피부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사냥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서지아는 언덕 위에서 검은 뱀의 변화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건 그냥 뱀이 아니라 기생체라는 사실을.
대수림에게 위기를 가져다줄 정도로 오랜 기간 양분을 축적한 존재임을.
그건 아마도 신화적인 존재에 근접할 정도로 강대한 힘이라는 사실을.
뱀의 피부가 폭발했다. 전신에 가벼운 화상을 입을 정도로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곳에 있는 건 더 이상 거대할 뿐인 뱀이 아니었다.
서지아는 저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숲을 뜯어먹는 뱀. 요르문간드.
지구와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존재가 이계에 있다는 건, 서지아에게도 항상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뱀은 이제 더 이상 대수림에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 * *
강선후는 천잠사의 망토를 걷어 내 전방의 상황을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하얗게 새어 있었던 숲들이 온통 불타고 있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온갖 것에 불이 붙어 있었는데, 불타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양초나 횃불처럼 계속해서 주황빛 불꽃이 일렁거릴 뿐이었다.
리리는 그런 강선후를 보며 생각했다. 강선후는 뱀의 머리가 땅에 처박히자마자 천잠사의 망토를 꺼내 리리와 자신을 감쌌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뱀이라기보단 동양의 용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 다시 몸을 일으키는 기생체의 완전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늘은 바위 갑옷을 연상시키고, 날개 두 쌍이 뻗어 나가는 모습.
고대 설화에서 표현하는 악마의 형상을 그대로 가져다 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면, 왜 저 뱀을 자극한 거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
강선후는 그렇게 말했다.
“끝장을 봐야지.”
“……끝장이라고?”
“내가 기생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리리는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지?”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인간이 기생체의 생태에 대해서 이렇게나 잘 알고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었다. 지금 와서는 그러려니 지나간 상황이었지만.
“예전에 기생체랑 싸웠던 적이 있었어. 한 번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처음에는 졌지. 그때 난 처음으로 죽기 직전까지 갔었거든.”
강선후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저 거대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리리는 그 눈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건 호승심이었다.
마치, 설욕전을 눈앞에 둔 투사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리리는 고개를 돌려 기생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게…….”
“나를 죽일 뻔한 녀석.”
강선후는 맞춰진 기억의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자신은 사람만 한 뱀에게 쫓기다가 쓰러졌다.
그런 강선후를 누군가 구해 줬었다.
그는 엘프였고, 자신을 엘신이라고 소개했다.
* * *
서지아는 극심하게 피어오르는 공포를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곳은 분명 대수림이었다. 그리고, 저 노래는 대수림의 마지막 영혼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기생체는 그렇기에 노래를 멈추려고 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해서 대수림의 영혼과 에너지를 탐식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대수림을 시들게 만들었던 존재.
저 존재를 없애야만 대수림이 살아난다.
하지만.
“……불타고 있어.”
대수림이었던 하얀 숲이 이제는 불타고 있었다. 여전히 품고 있는 막대한 에너지 때문에 잘 사그라들지 않을 테지만, 이마저도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대수림이 불타 사라진다. 대수림을 마음의 고향이라 여기는 엘프의 눈앞에서……?
‘너는 반쪽짜리 엘프잖아.’
그 순간 마음을 찌르는 문장 하나가 떠올라 서지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때문에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 순간, 그곳에는 어느새 다시 풍선이 하늘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청이 들렸다.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내가 해야 할 일?”
서지아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데?
“엘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엘프로서.
“반쪽짜리 엘프가……? 내가 대수림을 위해서 뭘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보다 훨씬 초라한 숲에게마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고.”
서지아의 목소리에는 격정이 없었다.
오히려 초연했다. 익숙한 취급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슬픔이 가시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풍선이 매달려 있는 줄이 끊어졌다. 풍선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네 친구를 위해서 해야 할 일.”
풍선이 날아가는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서지아의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 하나가 있었다. 그건 매우 선명했다.
그녀를 반쪽짜리 엘프라 탓하는 문장보다도 훨씬 더.
「엘프는 빚을 갚기 위해서는 목숨마저 바친다.」
그 순간, 서지아는 깨달았다. 지금 풍선이 날아가고 있는 방향이 하얀 숲 위 저 멀리 떠 있는 행성의 방향이라는 걸.
그리고, 다시금 깨달았다.
그것이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서지아는 퀴버의 뚜껑을 열었다. 겨우살이를 엮어 만들어진 초라한 화살을 들어 올렸다.
엘신의 화살. 세계수의 씨앗마저 발아시키는 최초의 성좌의 힘.
반쪽짜리 엘프가 쏜다면 그대로 영혼이 불탈 정도로 강한 힘.
하지만.
……빚을 갚을 수는 있겠지.
숲에게서 쫓겨나는 반쪽짜리 엘프라도. 엘프의 숙명 속에서 최후를 맞는다면.
“…….”
서지아는 엘신의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이 숲에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달려나갔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