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ep47. 엘프와 엘프의 나무 (3)
강선후와 엘신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시선에 반가움은 별로 없었다. 둘 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었고 그 뜻이 맞았기에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강선후가 서지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자 그녀의 팔과 고개가 축 처졌다. 검갈색으로 염색한 그 장발이 땅에 끌렸다. 머리카락의 뿌리 부분에서 꽤 올라온 금발에 눈이 갔다. 어느 순간 서지아는 지구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염색을 하지 않았다.
엘신은 앞장서서 걸었고 강선후는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리리는 둘의 뒤를 따랐다.
세계수에서 풍겨 오는 향기, 그리고 바람이 나무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이 이곳에 가득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세계수의 꽃가루가 소복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이었다.
이 침묵에 짓눌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리리는 용기 내서 입을 열었다. 맨 앞에 걸어가고 있는 신비로운 여성이 엘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흑성을 만난 적이 있어요.”
리리는 과거 태양탑에서 만났던 흑성을 떠올렸다. 승천하지 못해 지상에 남아 버린 반쪽짜리 성좌.
맨 앞을 걸어가는 엘프는 따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리리는 그 고개가 끄덕거리는 걸 분명히 보았다.
최소한 내 말을 들어 준다는 의미가 될 터, 리리는 조금 더 용기를 얻었다.
“그 흑성은 태양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의 힘을 억제하고 있었는데도요.”
“힘을 억제하고 있었나요?”
엘프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꺼냈다. 리리는 순간 놀랐다. 성좌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엘프 수도승. 엘시니들 중 수백 년간 수련에 매진한 사람마저 저토록 이나 평온한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을 텐데.
리리는 금방 당황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네. 성좌란 찬란한 존재. 지상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은 빛으로 보일 뿐, 그들이 품고 있는 힘은 우리 같은 미천한 필멸자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리리는 여기에서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성좌의 힘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실례일까? 하지만 리리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저 엘프처럼 보일 뿐이었다.
“저는 성좌가 아니에요.”
엘프는 고개를 돌아 보였다. 조금 경직되어 있을 거라 예상했던 그 얼굴에는 의외로 희미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 말대로 성좌는 지상에 영향을 끼치기 힘들어요. 그래서 성좌의 지위를 포기하고 내려온 것뿐이에요. 아주 오래전에요. 숲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저 탑에서 엘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답니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성좌가 되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년, 아니 차마 셀 수도 없는 시간 동안 모든 인생을 깨달음에만 바쳐야 할지도 몰랐다. 타고남이나 방향성에 따라서 그 시간을 온전히 바쳐도 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조차 없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성좌의 길에 들어갔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죽어 나갔는가?
그런데 엘신은 스스로 성좌의 지위를 포기했다 말하고 있었다.
리리는 다시 한번 무례를 무릅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나요?”
이는 리리의 역린과 관련이 있었다.
성좌가 되는 것이 이 자의 숙명이었다면, 어째서 그것을 기꺼이 내버린 거지?
엘신은 대답했다.
“엘프는 함께 자라는 영혼의 단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네. 태어남과 동시에 나무와 영혼을 연결한 뒤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고 알고 있어요.”
엘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세계수에 핀 꽃을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태어나고 자란 나무는 내가 하늘로 올라간 뒤 지상에 홀로 남겨져 점차 시들어 버렸답니다.”
“…….”
“그 나무는 시들기 전 정말 크고 아름다운 숲을 만들었어요. 그 숲마저 시들어 버리는 건 볼 수 없더라고요. 내 자식이었으니까…… 그래서 내려왔습니다.”
“그럼, 당신의 영혼 나무가…….”
“후대 언젠가부터는 세계수라고 불리는 모양이더라고요.”
세계수. 그건 최초 엘신과 영혼을 연결한 작은 나무에서 출발했다.
기나긴 수행 끝에 엘신은 성좌가 되고, 그 영혼 나무는 세계수가 되었다.
이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리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당신은 성좌가 되었잖아요. 그 순간부턴 지상의 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는 것 아니었나요? 성좌란 천계를 누비는 이들이니까요. 숲을 지킨다는 게 평생을 쌓아 온 공덕을 없던 일로 만들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나요?”
엘신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이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죠.”
엘신은 오히려 무례를 무릅쓴 리리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 온화한 성품에 오히려 리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이들은 어느새 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이제는 세계수의 뿌리에 뒤덮인 탑과 꽤 떨어져 있는 오두막.
강선후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과거 엘신이 그를 치료해 준 오두막이었다.
리리는 서지아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또 존경했다.
그녀는 자신의 숙명을 끝마치고 엘프의 고향인 대수림에 몸을 뉘었으니까.
그 끝은 명예로웠다.
리리가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다시 이곳에 자라났으니 엘신께서 다시 세계수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 주시는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엘신, 그리고 강선후도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서지아가 있었다.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리리가 보기에는 서지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잖아.”
리리가 그렇게 말하자.
“늦었다는 건 없어.”
강선후는 대답했다.
“내가 그걸 증명해.”
죽어서 명계에 갔음에도 의지만으로 이승으로 기어 올라온 그는, 그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유물을 꺼내 들었다.
사자의 지팡이였다.
* * *
서지아는 꿈을 꾸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없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왜 쫓겨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서 엘신의 화살과 황금의 유물을 훔쳐 나왔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아 있었을 뿐.
그 뒤 서지아는 숲속에서 엘시니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하지만, 엘시니들은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프의 삶을 살 수 없는 아이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단다.”
어린 서지아에게 엘시니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반쪽짜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랑자의 상이 발현된 건 그맘때쯤이었다.
그 뒤 수십 년을 방황했던 서지아를 구원한 건 뱀파이어였다. 자신을 도이나 신카라고 소개한 그녀는 젊었고, 고풍스러운 귀족이었다. 그 뒤 십몇 년을 그 가문의 심부름꾼으로 살았다.
그리고 신카 가문이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
「내 딸에게 이걸 꼭 건네줘. 그리고, 언젠가 가문의 지하실로 돌아와 달라고…… 전해 줘.」
도이나 신카는 그녀에게 황동 열쇠를 건네며 말했다. 은인에게 받은 마지막 부탁이었다.
서지아는 그 부탁을 위해 몇 년 동안 세상을 떠돌았다.
그러면서 우연히 서울이라는 새 터전을 찾았다.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반쪽짜리인 자신도 살 수 있는 곳이라 여겨졌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서는 도망칠 수 없었다. 엘프로 태어나 엘프가 되지 못한 이는 엘프의 삶에 묶일 뿐이었다. 자신의 허리에 새겨진 방랑자의 문신은 항상 그녀를 괴롭혔다.
서지아는 눈을 떴다. 눈앞에 검은 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게 사후 세계인가? 명계인가? 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명계의 유령도, 끝없이 펼쳐져 있는 무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옥에 떨어진 건가? 서지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염없이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을 그저 걸었다.
어느 새부터 서지아의 곁에 풍선이 따라 걷고 있었다. 풍선이 걷는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이상했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서지아가 물었다.
“넌 대체 뭐야?”
“네 친구의 친구.”
“이제 그런 건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네 친구 찾아가서 전해. 그리워해 봤자 이미 늦었다고.”
서지아는 이 순간마저도 조소 섞인 농담을 내뱉었다. 이게 서지아의 방식이었으니까.
“늦었다는 건 없어.”
서지아는 고개를 돌려 풍선을 바라보았다.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이목구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부활이라도 하게? 애초에 불가능하잖아.”
“물론 성좌는 신의 자손을 살릴 수 없어. 세계수의 옛 친구도, 오랜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 온 그냥 인간도, 비극적인 뱀파이어 가문의 후계도 할 수 없지.”
“…….”
풍선의 줄이 어느새 서지아의 손목에 묶여 있었다. 풍선은 그대로 천천히 위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면 전혀 다른 길이 열려.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
“……그게 무슨 유치한 억지야.”
“유치한 억지를 부려도 되는 시대가 오고 있으니까.”
서지아가 눈을 뜬 건 그 순간이었다.
꿈속에서 듣던 목소리의 마지막 말이 끝까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내 친구가 그런 세상을 바라고 있으니까.」
* * *
“당신이…… 죽은 사람을 살렸어.”
서지아가 눈을 뜨는 모습을 보며 리리가 그렇게 말했다. 강선후는 탈레의 룬에 생명을 발아시키는 문자를 조합한 뒤 사자의 지팡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리리는 뱀파이어 귀족의 혈술을 사용해서 서지아의 신체에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으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강령술이 실현되었다. 고대의 엘드리치가 만들었다는 룬 마법.
그 어떤 마법사도 재현하지 못했다는 그 마법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리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생명의 정령, 셀피의 기운이 느껴졌다. 셀피가 도와줘서 가능했을까? 강선후의 생각에는 아니었다. 생명의 정령이 도와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강선후는 엘신을 바라보았다. 이 고귀한 엘프는 엘프 수도승이 극한까지 수행했을 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대수림을 가득 채운 특별한 정기가 극한까지 정제되어 죽음의 룬을 보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된 건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큰 힘이 한데 모였지만 강선후가 판단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했다. 단 한 발자국이 부족했다. 아주 작지만 동시에 도달하기 힘든 거대한 한 발자국이.
그 한 발자국을 방금 누군가 채웠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대체 누가? 강선후는 저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이 오두막의 천장에 매달린 등불만 삐걱거리며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강선후는 눈앞에서 몸을 일으키는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서지아는 아직 잘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살아났다.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지아의 마음속에 밀려 들어오는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죽음으로서 끝내 숙명을 이루고 엘프로서 완성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살아남으로써 다시 반쪽짜리 엘프가 되었다.
수백 년이라는 수명 동안 서지아는 다시 반쪽짜리 엘프로 살아가야만 했다.
“야, 살아났는데 처음 하는 생각이 그런 거야?”
강선후는 짐짓 웃으며 말했다. 서지아의 눈빛에서 그 허무함을 읽었고,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지아는 쓰게 웃었다.
“살려 줬는데 고작 이런 반응이라서 미안한데. 나 원래 표현 잘 안 하는 거 알지?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다고.”
서지아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엘신은 그런 서지아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강선후마저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깊은 눈동자였다.
서지아는 엘신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묻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분은 모든 엘프의 선구자, 선지자.
“엘신 님? 당신이 왜 여기에…….”
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아는 그녀를 보자마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는 반쪽짜리인지라 드높은 분과 같은 자리에 있기도 조금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하나예요. 반쪽짜리 같은 건 없어요.”
엘신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깥을 가리켰다. 창문 밖에는 거대한 줄기와 그것을 감싸고 자전하는 고리, 그리고 그 꼭대기 하늘 너머 희미하게 펼쳐진 거대한 꽃이 보였다.
“저게 뭔지 아세요?”
“……세계수입니다.”
“아뇨. 세계수는 제가 승천한 뒤 시간이 지나며 시들었답니다.”
“그럼…….”
“저건, 세계수가 남긴 씨앗에서 피어난 싹이에요.”
엘신은 그렇게 말하며 제 자식을 보는 것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굉장히 희미해서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 막 고개를 든 갓난아기죠.”
서지아 역시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하늘을 꿰뚫고 있는 크기인 저게 그저 싹일 뿐이라고?
“세계수는 지금 막 태어난 거예요.”
엘신은 그렇게 말하며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서지아는 엘신의 의도를 깨닫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가 세계수와 영혼을 연결하라는 말씀…… 이신가요?”
서지아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엘신의 의도를 부정했다. 그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다. 자신이 그런 자격이 있고 없고를 떠나 애초에 불가능한 것 아닌가?
“저는 영혼 연결 의식을 할 시기가 지났습니다! 그건 막 태어난 엘프나 가능…….”
“그 의식에 필요하다는 거 여기 다 있네.”
그때, 강선후가 끼어들었다.
“이제 막 태어난 엘프, 그리고 이제 막 싹을 틔운 나무. 그리고…….”
“그들의 영혼 의식을 거행해 줄 대모.”
엘신이 말했다. 자기 자신이 그 대모를 자처하겠다는 의미였다.
“영혼 연결 의식에 필요한 전부가 여기 모였잖아요?”
“저는 이제 막 태어난 엘프가 아닌데…….”
“거, 참. 눈치 없네. 평소에도 그렇다고 많이 느꼈는데.”
강선후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어투와는 관계없이 얼굴은 웃고 있었다.
“엘프는 은혜를 갚기 위해서 목숨마저 바친다며?”
서지아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강선후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대수림을 사랑하고 숙명을 지킨 엘프를 그 누가 엘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데리고 와. 이마를 까 버리게.”
“당신은 여기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온전한 엘프로.”
서지아를 바라보는 엘신은 아마 처음으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엘신이 당신의 완전함을 증명합니다. 필요하다면 최초의 성좌라는 지위를 빌려서라도.”
이제 막 싹을 틔운 나무, 그리고 영혼 연결 의식을 거행할 자격이 있는 대모 엘프.
이제 막 태어난 엘프는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