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ep48. 꽃 위, 외로운 여행자 (1)
리리를 데리고 채집에 나섰다. 서지아를 데리고 가지 않은 건 엘신과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대모와 대녀가 서로 대화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잘 안다. 적당히 둘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적당한 채집 포인트에 도착한 뒤 가방을 내려놓으며 리리에게 말했다.
“썩지 않은 나무뿌리 근처를 파 보면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게 뿌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을 거야.”
리리는 내 말을 듣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파냈다. 적절하게 헌팅 나이프로 뿌리를 헤쳐 가는 게 이제는 제법 요령이 생겨 보여 왠지 뿌듯했다.
“이거?”
리리가 뭔가를 들어 내게 보여 줬다. 탁구공처럼 보이는 그것은 약간 갈색빛이 도는 하얀색이었는데, 내가 아는 그것이 맞았다.
“응.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건 내버려 둬. 어차피 아무 맛도 안 나니까.”
“이거 맛있어?”
“어? 안 먹어 봤나?”
“나는 안 먹어 봤어. 당신이 먹는 건 봤던 거 같기도.”
생각해 보니 평소에는 챙겨 온 식량에 의존하고는 했다. 애초에 난 탐험 때는 식도락에 크게 신경 안 쓰는 편이고, 리리는 뱀파이어인지라 의미 있는 식사를 하려면 피를 먹을 수밖에 없었으니 주야장천 선짓국만 데워 먹거나 내가 챙겨 온 페미컨을 오물거렸지. 이번 여정이 워낙 길어진 터라 리리는 처음으로 야생 동물의 피를 먹었다. 질릴 법도 했을 텐데.
“생각보다 음식 투정을 안 하는 편이었구나.”
“나 말하는 거야?”
“응.”
리리는 여전히 땅 파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좀 하는 편이었어.”
“그래? 좀 더 얘기해 봐.”
“아버지가 나한테 설산 여우의 피만 먹이기로 결정하셨을 때, 방 안에서 안 나갔었어. 사흘 동안이었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 안에 처박혀서 사흘 동안 나오지 않는 리리라니, 지금과 비교하면 절대로 상상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포기했지.”
리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지금은 철들었네.”
“당신, 5년만 일찍 만났어도 영혼 연결이고 나발이고 그냥 도망쳐 버렸을 거야. 이렇게 사는 남자랑 영혼을 연결하다니. 그때는 상상도 안 했던 일이라고.”
“아이고, 고마워라.”
“알면 됐어. 이거 이 정도면 돼?”
리리는 보자기를 들어 보였다. 거기에 가득 채워진 버섯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느끼는데 리리는 손이 빠른 편이다. 귀족이라기보단 노동자의 솜씨에 가까운 느낌마저 든다.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쥐고 있는 줄기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으읏…… 차!”
뿌리째 뽑혀 나오는 덩굴 식물. 그 아래쪽에는 덩이줄기가 송골송골하게 맺혀 있었다. 실한 놈이네.
“그건 뭐야?”
“몰라? 그냥 맛있길래 자주 먹은 거라서.”
덩이줄기라는 점에서 감자와 비슷한데, 그 질감이나 맛은 차라리 무나 당근에 조금 더 가까웠다. 파스닙이라고 서양 향신채가 있는데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어쨌거나 먹을 수 있고 심지어 맛도 있으니 조난 생활 시절 정말 자주 애용하던 식물이었다. 농사마저 시도했고 일부 성공했지. 대충 뿌려 놓고 나중에 자란 걸 채집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가자.”
“…….”
리리는 어느새 우두커니 선 채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쪽으로 다가가고 나서야 리리가 뭘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이번에 대수림에서 한 판 붙었던 기생체의 시체였다. 아주 길게 늘어진 몸통의 한 부분. 아마 대수림 전역에 길게 늘어져 있을 거다.
“그 녀석 시체네.”
“……응.”
리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을 그곳에 계속 두었다. 나도 역시 올려다보았다.
“당신, 기억하고 있지?”
“뭘?”
“로얄 블러드는 누군가의 피를 먹어서 그것의 영혼을 닮아 가. 내 아버지는 십 년 동안 늑대의 피를 먹고 늑대의 용맹함을 가지셨어.”
리리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 역시 나랑 영혼을 연결해서 그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걸 알고 있다. 첫 번째 기생체를 먹어서 그 금속 부식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 생각보단 쓸 일이 많이 없었지만.
나는 리리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체를 한동안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 기생체. 정말 거대한 영혼을 가지고 있겠지? 리리도 아마 그 의도로 한 말일 거다.
“안 할래.”
“응.”
리리는 따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납득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인간임에 자부심을 느껴서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하겠다. 당장 별의 자손이 허공에 별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니까.
그저 그러고 싶어서 그럴 뿐이고, 언제나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리리랑 같이 복귀했다. 리리는 아까 전부터 무언가 신경 쓰이는 눈치였는데, 딱히 입을 열진 않아서 내가 먼저 물어봤다.
“뭐 신경 쓰이는 거 있어?”
“……엘신 님이 고기를 먹을까?”
리리가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엘프 수도승은 뭔가 스님이나 도사의 느낌이 난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수행자들이 흔히 그렇듯 먹는 것부터 제한하기 마련이었다. 나도 사실 생각하긴 했었다. 알아서 되겠거니 했을 뿐.
“음, 나중에 생각하지 뭐.”
“참 속 편해서 좋겠어.”
“고마워.”
“……칭찬 아닌데.”
우리는 금방 복귀했고 바로 식사를 준비했다. 냄비를 꺼낸 뒤 불쏘시개를 만들고 땔감을 모으려고 했는데, 이미 거처 앞에 나뭇가지들이 충분히 모여 있었다.
“오셨나요?”
뒤를 돌아보니 엘신과 서지아가 오는 길이었다. 품에 한 아름 안은 나뭇가지와 물이 한가득 담긴 양동이. 우리가 없는 동안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대화나 나누라고 일부러 쉬는 시간을 준 건데.
엘신은 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내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이 정도면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장면에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최초의 성좌가 식사준비에 손을 보태는 모습이라니. 황제가 부엌칼 들고 도마 앞에 있는 걸 보는 상황이나 다름없는 거 아냐? 성좌는 심지어 황제라는 입장에 비유하기도 부족하잖아.
그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자 엘신이 말했다.
“내 몸에 필요한 걸 구하는 과정 역시 수행의 일부였답니다.”
“먹을 것도 막 구하고요?”
“농사도 짓고, 흉년이 들어 며칠 내내 굶어 보기도 하고, 늑대들의 습격을 받아서 며칠 밤낮을 맞서 싸우기도 하고요.”
“……내가 생각하는 수행자랑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아니, 생각해 보면 그게 오히려 맞는 건데.”
“수행은 결국 살아가는 일상 위에 쌓여 가는 거니, 수행을 위해서는 삶을 유지하는 것부터 선행해야 하는 법이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돌 위에서 고고하게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는 모습만 생각했지, 그 외의 삶 역시 계속해서 이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았었다.
“으음…….”
조금 신기한 기분을 느끼면서 냄비에다가 재료를 다 때려 박았다. 아공간 가방은 무게에 여유가 있었기에, 가끔 기분전환 하려고 챙겼던 토마토 캔이라든가 고기 스튜 통조림, 향신료 믹스를 꺼내 나열했다. 동유럽 쪽을 여행하다가 초대받은 곳 아줌마에게 배운 요리법이다. 재료는 간단하지만 맛은 보장하지.
옆에서 지켜보던 서지아가 초조해했다.
“엘신께서 이런 음식이 입에 맞을까? 그래도 수행자로서 살아오셨는데…….”
우리는 전부 조금 떨어진 곳 바위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엘신을 바라보았다. 엘신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다가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뜨고 우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지아, 리리는 냄비를 바라보았다. 콩과 고기, 그리고 향신료와 양념, 직접 공수한 채소를 제외하면 통조림이 뒤섞여 있는 이 요리.
“……자신 있어?”
뭔가 갑자기 요리 오디션에 출전한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는데?
나는 살짝 불안한 얼굴로 끓기 시작한 냄비를 바라보았다.
……뭐 어떻게 되겠지.
* * *
“맛있어요.”
엘신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순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한숨을 나는 무시했다. 아니, 왜 니들이 긴장하는데? 엘신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의 반응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나도 왠지 안심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최초의 성좌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도 그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신선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평소에 궁금한 질문을 꺼내 보았다.
“언제부터 지상에 내려와 있었어요?”
“당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요.”
엘신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 번째 태양이 뜨는 모습을 이 탑 위에서 봤어요.”
세 번째 태양이라면…… 검은 태양. 나도 본 적 있었고 리리에게 관련 신화를 들었던 그것이었다. 페미컨을 먹던 리리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건 수백 년에 한 번씩 뜨는 건데. 마지막으로 뜬 게 수백 년 전이었고.”
그럼 엘신은 수백 년 전부터 이미 성좌가 아니었던 거다. 서지아는 엘프가 엘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의문을 꺼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프는 엘신께서 가호하는 종족이 아니었던 건가요?’
“제가 엘프를 가호하고 있었다고요?”
엘신은 아예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성좌가 아닌 지금은 물론이고, 성좌인 시절에도 그런 적이 없다는 투였다.
“엘프를 가호하는 건 성좌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엘신은 하늘을 가리켰다. 두 개의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피롯과 살라미오. 생명을 끌어안고 세상을 덥히는 쌍둥이 신.”
우리 셋 모두 하늘을 바라보았다.
“엘프는 주신의 가호를 받는 종족이에요.”
“…….”
서지아는 이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는 듯했다. 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까.
엘프는 생명을 끌어안는 두 신의 가호를 받는 종족이었던 거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일이지.
우리는 식사를 끝낸 뒤 간단하게 정리까지 마쳤다. 가방을 둘러메는 나를 바라보며 리리가 말했다.
“이제 뭐 할 거야?”
나는 안주머니에서 황금 지침을 꺼내 들었다. 황금 지침은 저 멀리에 있는 꽃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체였던 그 꽃을.
따로 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제 내가 향할 곳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약간 문제가 있었다. 저 행성의 높이가 높아도 너무 높았다는 것.
저 정도면 거의 저고도 위성 수준의 높이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늘에 거대하게 떠 있는데 그 자체로 흐리게 보인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높이 떠 있다는 의미가 되니까.
렐릭시나가 벽을 타고 달릴 수 있다지만, 그건 일시적일 뿐이었다. 저 정도의 높이는 무리일 수밖에 없지.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던 엘신이 입을 열었다.
“도와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우리 모두의 시선이 서지아에게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멍 때리고 있었던 서지아는 우리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네가 그럴 짬이야?”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아니라…… 그…….”
서지아의 표정을 보고 다음에 할 말을 먼저 알 수 있었다.
“자신 없어?”
“……어.”
세계수와 영혼을 연결했더라도 세계수가 진정으로 자신의 형제가 되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야 저 느낌을 모르니 함부로 단정 지을 이유도 없었다.
“당신, 당신의 친구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어요.”
엘신은 세계수의 싹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서지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눈을 감았다. 표정이 보다 평안해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구그그그——
땅이 가볍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뿌리가 ‘아주 살짝’ 움직였다.
무슨 변화가 있는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중요한 건 세계수가 서지아의 바람에 응답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가자.”
나는 가방을 챙기고 리리와 함께 나아가려다 뒤를 바라보았다. 서지아와 엘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같이 갈래요?”
“그럴까요?”
“……나도 한번 만나는 봐야 하니까.”
두 엘프도 내 뒤를 따라나섰다. 나는 굳이 렐릭시나에게 올라타 빨리 달리진 않았다.
급할 필요 없었으니까.
세계수에 도착하자 그 뿌리가 거대한 성문처럼 열려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
어떤 강렬한 에너지가 위쪽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건 물처럼 보였지만 물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게 아주 농도 짙은 정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생명의 정령이 아니다. 그래서 정기의 흐름을 눈으로 봐도 뭐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이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산의 뿌리에서 흐르는 정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냐면, 우리가 그곳에 몸을 담그자 흐름을 타고 위로 떠오를 정도였다.
우리는 그렇게 천천히 위로, 위로 끝없이 올라갔다. 몇 시간 동안이나 이루어진 상승.
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
위쪽에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빠르게 가까워졌고, 정기의 흐름은 우리를 그 바깥으로 뱉어냈다.
바닥에 살짝 착지한 뒤 정신없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검었다. 여기서부터 바라본 위쪽은 하늘이 아니라 우주였다. 별은 더욱 명확하게 빛났고, 은하수와 우주를 유영하는 정체불명의 반짝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지상은 어떨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지상은 볼 수 없었다.
이 꽃 위는 하나의 섬. 아니, 섬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
우리 주변에는 온통 노란색으로 가득 찬 꽃밭이었다.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었다.
[찌르르—] [찌르르르르———]꽃밭 안에서 벌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하늘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멀리 날아갔지만, 그곳도 여전히 세계수의 꽃 위일 뿐이었다.
“……천국에 온 거 같아.”
리리가 간단하게 입을 열었다. 서지아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나는 황금 지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침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작은 언덕 위, 그곳에 건물 하나가 있었다.
교회를 연상시키는 그 건물은 외롭게 이곳에 홀로 남아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문명의 흔적이었다. 어째서 세계수의 씨앗 안에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 존재하는 걸까? 우주에서 신이 가져온 이 씨앗에는 무슨 이야기가 있는 걸까?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