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ep48. 꽃 위, 외로운 여행자 (5)
이계에는 세 개의 태양과 두 의 달이 있었다. 나는 조난 생활을 하면서 그 모두를 다 본 적이 있었다. 그게 신이라는 사실은 리리에게 듣고 나서야 알았지만.
두 개의 달은 하루도 빠짐없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그래서 이계의 밤은 지구보다 훨씬 더 밝았다.
하지만 태양은 평소에는 두 개만 뜨고는 했다. 달보다는 훨씬 더 변덕이 있는 편이라 어느 기간에는 한 개만 뜨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이계에는 겨울이 찾아왔다.
그렇게 평소 눈에 보이지 않는 세 번째 태양.
그게 바로 검은 태양이었다. 나 역시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잘 아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살아왔고, 태양의 작용 같은 거시적인 현상 따위는 알 바 아니었으니까. 그게 내 목숨과 삶에 주는 영향에만 민감하게 반응했을 뿐이었다.
이 말을 달리하면,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내 목숨과 삶에 영향을 주는 만큼은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검은 태양이 뜨는 것 자체는 거대한 재앙은 아니었다. 골치 아픈 일은 있을지 몰라도. 검게 물든 불길한 태양일지라도 결국 아홉 주신 중 하나인 셈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서둘러야 하는 것 맞기에 몸을 일으켰다.
지평선 너머에서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검은 태양을 잠시 바라보다가 일행과 세계수 아래로 내려왔다. 밑에서 기다리던 렐릭시나와 존슨이 서로를 물어뜯고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싸우는 줄 알았다.
“……니들 좀 얌전하게 놀면 안 돼? 놀랐네.”
“컹!”
“크르릉—!”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최악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됐지 뭐.
엘신의 안식처에 잠시 방문해서 짐을 정리했다.
세계수의 꽃 위에서 가지고 내려온 건 딱 두 개였다.
하나는 여섯 번째 황금의 유물.
“연금술사의 시약병…… 정도 되려나.”
“응.”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연금술사가 쓴 일지였다. 이곳에 적혀 있는 연금술에 대한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만큼 재료도 까다롭겠지만 언젠가 쓸 일이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 안에 적힌 두고두고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
“뭐?”
“당신 예전에 연금술사랑 잠시 같이 살았다고 하지 않았어?”
기억을 떠올려 봤다. 확실히 나를 거둬 줬던 그 노인을 연금술사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리리는 이 일지의 주인과 내 과거 속 인물이 동일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하고 있었다.
나도 생각에 잠길 만한 추론이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아닐 거야.”
“왜?”
“그냥 느낌이긴 해. 그런데……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아니야.”
“응.”
리리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일지를 내려다보았다. 이 일지의 주인이 지금 어떤 운명 속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는 챙겨 간다고 뭐라고 하지 않겠지.
연금술사의 시약병은 다시 노란색 보석으로 만들어 황금 지침 뒤에 끼워 놓고 일지는 아공간 가방에 넣었다. 짐을 정리하던 중 잠시 잊고 있던 걸 발견했다.
“……저걸 까먹고 있었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가죽 주머니 안에는 선악과가 들어 있었다. 저걸 어떻게 하지? 아공간 가방에도 들어가지 않고,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먹을 일은 없을 게 분명했기에 처분이 애매해졌다.
“리리.”
“응?”
“저거, 가져다 팔까?”
“……선악과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잔소리를 하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는 모습을 포착하고 내가 먼저 선수 쳤다.
“아니, 잘 생각해 봐. 우리가 갈 곳에서부터는 이제 슬슬 돈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들어?”
나는 북쪽에서 명확히 문명의 흔적을 느꼈다. 베이스 캠프를 중심으로 한 모든 여정과는 다르게 이제는 어느 정도 문명의 틈 사이에서 어울릴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야영을 하는 걸 피하진 않지만, 구태여 돈을 써서 조금 더 체력을 안배할 수 있다면 그 선택을 하는 쪽이 옳을 때가 있다.
내 의견을 들은 리리는 우선 이유를 받아들인 듯했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아 보였다.
“……당신이 만약에 작위를 받고 영지 두세 개를 당신 소유로 둘 생각이라면 팔아도 돼.”
“어?”
“그 물건의 가치가 어떤지 감을 잡으라는 뜻이야. 게다가 그 정도 물건이면 가치를 증명받는 데에만 년 단위로 걸릴걸?”
“그런가?”
생각해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지구에서야 무언가를 감정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여기는 이계니까.
리리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야. 운이 안 좋으면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어. 세계수가 맺었다는 단 두 개의 열매 중 하나인 선악과. 이게 세상 사람들한테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해 봐.”
“음…….”
듣고 보니 리리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나는 이런 쪽으로는 많이 둔감한 편이었다. 탐험은 여러 나라의 영토를 돌아다니는 일이고, 그래서 생각보다 정치적인 일에 자주 시달리는 일이었다. 이건 지구에서도 통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난 언제나 이런 부분에 둔감해서 여러 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린 적이 있었지. 리리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한 나는 우선 선악과를 다시 리리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저게 선악과라고?”
“어.”
“……어디서 구했는데? 아니, 여기가 대수림이니까 어딘가에 선악과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대체 그걸 어디서? 그리고 그건 필멸자의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유혹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둘 다 멀쩡한 건데?”
서지아는 생각보다 많이 혼란스러운 듯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짐을 완전히 다 싸고 두 엘프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엘신이 말했다.
“떠나시는 건가요?”
“네. 검은 태양이 뜨기 시작했으니까 서둘러야 할 거 같아서요. 좀 경황없지만…… 밥도 같이 먹었고, 세계수 위도 돌아다녔으니까 꽤 시간을 많이 보냈네요.”
“당신이 원한 걸 얻은 건가요?”
엘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루었군요.”
“엘신도요?”
엘신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감정을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눈동자도 여전했다.
“저는 즐거움을 얻었어요. 그리고…….”
엘신은 그 표정 그대로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내 친구를 맡길 후계자도. 이제는 더 이상 제가 숲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지요.”
서지아는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지만, 그 와중에도 엘신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이 녀석에게 물을 차례였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여기 남을 거야?”
그러면서 우리는 세계수의 싹을 바라보았다. 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거대한 꽃. 이건 이제 서지아와 영혼을 연결한 나무였다.
내가 엘프의 문화에 대해서 아직 잘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서지아였다면 대수림에 남고 싶지 않았을까? 엘프들 마음의 고향이라니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서지아는 한동안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왠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넉넉하게 기다려 주었다.
“돌아갈래.”
“그래도 되겠어?”
나도 세계수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쟤가 허락해?”
서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인 나는 여기를 고향으로 여기지만…… 하운드 서지아의 집은 거기야.”
“…….”
서지아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계수와 대화를 나누느라 잠시 감상적으로 변했던 그 눈빛이 평소의 날카로운 그것으로 돌아오며, 동시에 굉장히 난처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아니, 되게 너답지 않아서.”
“그게 무슨 말이야? 나다운 게 뭔데?”
“엘프다운 말이었어요.”
엘신이 대신 대답했다. 최초의 성좌에게 말대꾸를 차마 할 수 없었는지 그저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그건 아마도 고개를 살짝 돌린 리리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뒤 한동안 반쯤 토라진 서지아를 상대해야만 했었다.
“아니, 지가 혼자 감상에 젖어 놓고 왜 나한테 승질이야?”
“내가 언제 성질부렸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아무튼 아니야.”
어느새 출발 준비를 마쳤다.
나는 렐릭시나 고삐를 잡은 채 뒤를 돌았다. 엘신은 오두막 앞 작디작은 공터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신은 남아요?”
엘신은 대답을 보류한 채 그저 미소만 지었다. 하긴, 그녀는 남는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사람이니까. 이제는 그저 친근하기만 한 미소 덕분에 저 표정 뒤에 있는 존재가 뭔지를 자꾸 잊게 된다.
나는 렐릭시나에 올라타려다 말았다. 서지아는 말이 없고, 어차피 조금 가다가는 다시 지독한 산악지대를 돌파해야 했으니까.
그저 엘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검은 태양 아래 불그스름하게 물든 그 금발이 돋보였다.
“두 쌍둥이 신이 그대의 길에 온기를 더할 겁니다.”
“엘프식 인사법인가요?”
“제가 살던 시대의 인사법입니다.”
엘신은 황금 시대 이전의 사람이라고 했지.
“두 쌍둥이 신이 누구더라?”
“세피롯과 살라미오.”
두 개의 태양에 붙은 이름. 나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려다 말았다. 지금은 그저 검은 태양만 조금씩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엘신과 잠깐 시선을 나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통 이럴 경우에는 또 보자고 말하고는 하는데…… 우리가 또 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그건 의미가 없는 말이랍니다. 우리는 원한다면 언제나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멀어졌다. 여행 중 만나는 사람과 헤어질 때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내 철칙을 따랐다.
뭐,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뒤돌아보다가 눈 마주치면 조금 뻘쭘하거든.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걸었다. 문뜩 고개를 돌려보니 서지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 똑바로 뜨고 발 조심하라고 일갈하려다가 말았다. 서지아는 엘프고, 여기는 대수림이잖아?
눈을 감았는데도 울퉁불퉁하고 뿌리들로 가득한 땅을 자연스럽게 걷는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서지아의 염색한 머리 뿌리로 드러나는 금발 영역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서지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딴생각에 빠진 채 존슨의 등의 쓰다듬으며 걷던 리리가 입을 열었다.
“엘신께서는 우리 시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생각?”
“용은 우리 시대에 실망했어. 모두 일시에 이 세상에서 떠나버릴 만큼.”
“그렇지?”
“최초의 성좌가 직접 내려와 보시기에 우리 시대는 어때 보였을까?”
리리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고민이 생각보다 깊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헤매기만 한 우리들에게 실망하시지 않았을까?”
그때였다. 우리는 어느새 대수림의 가장자리에 도착한 이 시점, 공기가 팽창하는 듯한 진동과 멀리서 포탄이 발사되는 듯한 파열음이 뒤쪽에서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빛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태양으로 인해 어두워진 하늘을 광명으로 가득 채우는 빛줄기는 대수림 전체를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엘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빛줄기 속에 엘신이 있겠지. 아니, 어쩌면 저 빛줄기 자체가 엘신일 수도. 성좌가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있는 게 전혀 없고, 아는 것보다는 상상하는 게 더 즐거운 영역이기도 했다.
그때, 엘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각자의 별로 향하는 길.」
이제까지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필멸자가 아닌, 성계에 발을 들일 자격을 가진 이의 목소리.
「그곳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그 누가 모욕할 수 있을까.」
그때, 하늘에서 두 번째 빛이 느껴졌다. 그건 우리 바로 머리 위에서 시작되었는데, 유성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저 기현상을 만들어 낸 존재가 누군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으니까.
유성은 우리 발 앞에 떨어졌다. 모래와 땅 일부가 녹아서 이글거렸다. 매캐한 연기는 곧 걷히고, 그곳에 있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신의 활.”
과거 엘신이 수행 중에 사용했다는 활.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엘신의 화살.
세계수가 엘신과 함께 성장했듯, 엘신이 의지했던 도구 역시 그랬다.
「언젠가 다시 만나요.」
나는 하늘에 대고 말했다.
“거기서 다시 안 내려올 생각 아니었어요?”
엘신의 승천을 증명하는 찬란한 빛줄기가 천천히 소멸되었다. 엘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엘신이 대답을 보류할 때마다 보여 주는 그 미소가 왠지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저 미소를 짓고는 동쪽을 향한 발걸음을 서둘렀다.
검은 태양이라. 베이스 캠프에는 난리가 나 있을 거다. 복귀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