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68
168화
ep49. 어두워진 낮 (1)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구의 별자리는 제법 잘 보는 편이지만 이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아마도 엘신이 어디에서 반짝이는지 알 수는 없겠지. 검은 태양은 벌써 지평선 위로 올라와 이글거리고 있었는데 별은 여전히 보였다. 세 번째 태양은 제 형제들과는 달리 광채로 별을 가리지 못했다.
고개를 내리고 활을 바라보았다. 나무를 깎아 만든 투박하기까지 한 활과 겨우살이를 엮어 만든 듯한 화살.
우리 눈앞에 생긴 작은 크레이터 한가운데에 떨어진 그것들은 연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고, 내가 움직이지 않자 리리와 서지아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내가 오랜 시간 그러고 있자 제일 인내심이 안 좋은 서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제야 활을 주시하고 있었던 손에서 시선을 떼고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뭔 생각?”
“아니, 반응을 안 하길래. 무슨 고민을 하고 있나 싶어서.”
“기다리는 건데?”
“뭘?”
“식을 때까지.”
“…….”
서지아는 내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어 보이길래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연기가 충분히 사라지고 나서야 손을 댔다. 내 생각대로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걸 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서지아에게 내밀었다.
“자.”
“……나?”
서지아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 활을 내려다보았다.
“엘신이 꼭 나한테 줬다는 보장도 없고…… 뭐 잠깐이라도 써 보면 좋지 않을까?”
“…….”
서지아는 내가 건네는 활을 잠깐 바라보았다. 확실히 엘프가 드니까 더 어울리는 활이다. 활이란 게 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서지아는 특히 화살을 인상 깊게 바라보았다.
“나는 이 화살을 무서워했어.”
“왜?”
서지아는 잠시 화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허벅지춤에 찬 퀴버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서지아는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짜 엘프가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다는 이 화살이 서지아가 반쪽짜리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켰겠지.
“…….”
솔직히 공감하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엘프의 삶과 문화 속에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이해는 충분히 해 줄 수 있다. 사람의 감정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렇게 느끼는 것뿐, 그 기분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니까.
서지아는 잠시 활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노미나 산맥을 올랐다. 앞으로 몇 주, 운이 조금 안 따라 주거나 여유를 좀 부리면 한 달이 넘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꽤 고생이겠지.
조금은 타이트하게 일정을 잡고 나아갔다. 이틀 뒤 미리 준비한 식량이 떨어지고, 오늘 밤부터는 사냥에 나서기로 했다. 아니, 사실 밤이라는 말은 옳지 않았다.
“태양이 지지 않아.”
“검은 태양은 원래 안 져.”
내 대답에 서지아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태양은 남쪽 지평선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북쪽에서 다시 올라온다. 쌍둥이 신이라는 두 개의 태양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즉, 지금 천공은 온전하게 검은 태양의 무대다.
삐빅- 삐빅- 삐빅-
손목에 차고 있었던 스포츠 시계에서 울리는 알람을 껐다. 다음부턴 진동으로 해 놔야 할지도 모르겠네.
“알람은 왜 맞춰 놨어?”
“두 시간마다 알람을 맞췄어. 열네 시간마다 두 시간 야영 준비하고 여덟 시간 휴식을 취할 거야.”
“아, 밤이 안 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에게 있어서 행동 루틴은 생각보다도 훨씬 중요하고, 그건 전적으로 태양의 움직임에 의지한다.
“물론 이계는 지구보다 하루가 좀 더 길어. 정확히 측정해 본 건 아니지만 대충 32시간인 거 같은데, 그게 또 일정하지 않고 이래저래 바뀌는 거 같아서…… 중요한 건 규칙성을 지키는 거야.”
활동 시간 기준이 20시간이든 30시간이든 이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저 같은 루틴을 기준으로 행동하는 것.
지금 내가 알람을 맞춘 것도 그 이유였다. 나는 텐트를 간단하게 완성한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햇빛이 많이 비출 법한 곳을 찾아.”
“왜?”
“거기에서 잎이 넓은 식물이 자라날 거야.”
여전히 고지대로 올라오지 않아 대수림의 연장선처럼 울창했다. 리리와 서지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발했고, 곧 내가 찾는 걸 찾아냈다.
“그냥 넓은 게 아닌데.”
그렇지. 거의 1인용 이불 크기지.
“올 때는 이런 걸 못 봤는데.”
“검은 태양이 뜰 때 자라는 식물들이야.”
“검은 태양이 뜰 때만?”
서지아는 금시초문인 모양이었지만 리리는 들은 게 있다는 투였다.
“신화에 있었어. 검은 태양이 떠오르는 시기에만 활동하는 생물들이 있다고.”
둘의 당황을 뒤로하고 나는 땅에서 연잎처럼 자란 그것의 줄기를 잘랐다. 그리고 휴대용 삽을 꺼내서 흙의 축축한 부분이 나올 때까지 충분히 땅을 팠다.
그리고 그 잎들을 차곡차곡 접어 그대로 묻었다. 그날은 20시간이 지나도록 휴식을 취했다. 며칠 동안 빡세게 온 터라 나무 군집 지형은 이제 슬슬 끝나 가니 이제 척박한 바위산이나 설산 지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로 뭐 하려고?”
서지아가 물었다. 나는 모닥불을 피운 뒤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댔다.
자려는 게 아니다.
시각을 차단함으로써, 청각과 촉각을 곤두세우려는 심산이다.
검은 태양이 떴을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통—
아주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와 분명히 느껴졌다.
역시 녀석들이 나왔구나.
서지아는 예민하다는 엘프인 주제에 방금 전 진동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일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얘네들이 그거 보면 얼마나 놀랄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당신, 검은 태양을 경험해 봤지?”
“응.”
“언제까지 이 상태야?”
“생각보다 오래 지속돼. 하루의 개념이 달라져 버리니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따로 계산할 수가 없었어. 그리고, 생물들은 거기에 적응해. 주변을 한번 봐 봐.”
리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변화를 깨달았다.
“……벌레가 안 울어.”
“사소하지만 큰 변화지.”
검은 태양도 주신이며, 태양이다. 악의를 가진 시선으로 지상을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던 조난 생활 시절의 내 시선으로 생각해 봐도 이건 그저 자연 현상일 뿐이다.
“적응하는 건 생물이 할 일이야.”
적응하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조금은 차갑게 들리는 그런 수많은 현상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검은 태양은 그저 동식물들의 행동 방식을 조금 바꾸는 소소한 우주적 현상일 뿐일까?
그건 아니거든.
띠디딕- 띠디딕- 띠디딕-
8시간을 설정해 놓은 시계가 다시 울렸다. 이거 진동으로 바꾸어 둔다는 걸 또 깜빡했네. 아마도 그렇게 긴장하고 있지 않아서였을 거다.
그와 동시에.
쿠우웅—
이전에는 아주 미세하게 느껴졌던 그 진동이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왔다.
“이거 뭐야?”
쿠웅—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던 리리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며 벌떡 일어났다.
쿠웅—
나도 여유롭게 일어났다.
“읏차.”
“당신, 잠깐, 이게 뭐야? 당신은 아는 거지?”
이제 눈치가 빨라진 리리는 내 여유로운 태도를 보자마자 의도를 간파해 냈다. 나는 빠르게 아까 묻어 뒀던 이파리들을 꺼내서 툭툭 털었다. 새하얗던 그것들은 어느새 희미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억셌던 질감도 살아지고 천처럼 나풀거리는 유연한 재질로 바뀌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아니…….”
쿠우웅—
“이거 뭐냐니까?”
서지아도 당황하며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잎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둘러.”
서지아와 리리 모두 이파리를 두르고 망토처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 순간.
쿠우웅—!
나무 사이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만큼 큰 무언가가.
그건 어깨를 포함한 상체가 하체보다 넓은 기묘한 체형의 인간 형상이었는데, 높이만 2~3m 정도로 덩치가 정말 컸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우리를 습격할 듯 명확한 태도로 다가왔다. 서지아와 리리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품속에서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둘 다 꽤 훈련이 잘된 훌륭한 인재였다.
그래도 그럴 필요는 없지.
“…….”
음영조차 없는, 그저 그림자처럼 검은 실루엣뿐인 그것은 이곳까지 온 기세가 무색하게 멈춰 서더니 우두커니 선 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오던 길을 다시 떠났다.
“……저게 뭐야?”
“나는 당시에 그림자 거인이라고 불렀거든?”
하지만 거인이라고 부르면 이름이 헷갈릴 수도 있겠지. 진짜 거인들만 아는 게 두 명이니까. 그러고 보니 묘지기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어 낸 뒤 말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고산 지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저런 놈들이 많을 거야.”
“……그럼 이 이파리를 준비한 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잎을 땅에 묻은 건 독기를 빼기 위해서. 그리고 이렇게 뒤집어쓰면 검은 태양 생물들이 제대로 감지를 못 해. 단순히 공격성을 잃어버린 건지 감지를 못 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다. 살아남고 문제가 없으면 그만. 나는 이것 덕분에 조난 생활 시절 검은 태양을 견딜 수 있었다.
“가자.”
“응.”
우리는 계속해서 집을 향해 나아갔다.
* * *
서지아는 평야에 들어서며 길들인 말 위에서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산은 베이스캠프가 이제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움직이다가 지치면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웠으며 사냥을 했다. 어쩔 때는 실적이 좋지 않아 제대로 끼니를 떼우지 못했고, 어쩔 때는 너무 많은 식량을 얻어서 근처 동물들의 밥으로 남겨 두기도 했다.
지나가다가 일제히 진 해바라기들을 보며 감탄했다. 태양신이 존재하지 않는 동안 겨울잠 비슷한 상태에 들어간 그것들.
언제나 보이는 별과 검은 태양이 흐르는 하늘을 구경하기도 했고, 가끔은 갑자기 몰아치는 고산지대의 폭풍 속에서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강선후와 리리는 이 모든 게 익숙하다는 듯 나아갔다. 그들과의 여행이 처음인 서지아는 이 모든 게 신선했다. 저 둘이 벌써 지구 시간으로는 반년이 넘게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런 모험을 하고 있었구나. 서지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도 더 거칠고 더 고생스러웠다. 하지만 그 모험에는 뭔가 근본적인 즐거움이 있었다.
리리와 강선후의 표정이 시종일관 밝고 열정으로 가득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기도 했다.
베이스캠프는 가까워졌다. 좌측에서 다시금 떠오르는 검은 태양은 보통의 태양에 비해 세 배는 커 보였기에, 복귀하는 이 풍경에서 서늘한 감정을 느꼈다.
서지아는 저 멀리서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베이스캠프가 보였다. 어떤 상태일까? 조금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강선후도 내심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린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검은 태양이 뿜어내는 빛은 좋은 시야를 제공해 주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조금 더 다가가야만 했다.
그렇게 거리를 좁혔다.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발생한 그림자 생명체에게 습격당하고 있을까? 강선후의 말대로라면 그것들은 대체로 호전적인 성격을 타고났다고 했는데.
그런데 의외로 마을은 안전해 보였다. 이유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는데, 묘지기 거인이 삽을 들고 마을 옆에 선 채 이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지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강선후는 아니었다. 그는 벌써 무언가를 포착하고 복잡한 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사람들 뭐지?”
강선후의 말에 다시 전방을 바라보니, 강선후의 오두막 근처에 캠프가 처져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 찾아왔다는 의미인데, 그게 지구인은 아니었다. 텐트는 딱 봐도 이계의 사람 것이었다.
다가가자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이계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호위병으로 보이는 수십의 사람과 뭔가 그럴싸한 탐험복을 입고 있는 몇 명의 드워프들. 이들은 딱 봐도 심부름꾼인데.
강선후는 그들을 슬쩍 바라보고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풍경. 아무도 없는 걸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누군가 강선후를 반기는 반가운 목소리.
“왔어? 와, 드디어 왔구나? 이번에도 사고 제대로 친 모양인데?”
차소희였다.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을 켰다.
“밖에 있는 사람들 뭐야?”
차소희의 태도를 보니 최소한 나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강선후도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조금은 경계심을 푼 듯한 모습이었다.
“제국에서 왔대.”
“제국에서?”
“응. 근데…….”
차소희는 여전히 자신이 말하는 이 사실이 믿기 힘들다는 듯 말을 이었다.
“OWIC 간부를 찾던데? 이 사람들, 여기에 도착하더니 OWIC 요원들이랑 같이 지구로 넘어갔다?”
“…….”
“조만간 다시 찾아오겠대. 강선후 널 꼭 만나고 싶다면서.”
“나를?”
“널 알고 있었어.”
강선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계의 사람.
게다가 그들이 제국 소속이라니.
그 순간,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강선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까이 있었던 서지아가 문을 열었고.
그곳에 서 있는 건 시종으로 보이는 이계 쪽 인간 한 명과 양복을 입고 있는 OWIC의 간부.
그리고, 허리 높이 만큼도 오지 않는 거적때기 뭉치였다.
“……웬 거적때기가.”
“당신이 강선후입니까?”
거적때기에서 작은 손이 튀어나와 얼굴을 드러냈다.
어린아이만 한 키지만 얼굴은 이미 성인의 그것인 대머리 수염쟁이 남성이 눈썹을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그 얼굴에는 여유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소. 귀인.”
“날 알아요?”
“그럼. 우리 동업자가 제일 중요시 여기는 인간을 누가 모르겠어.”
그러면서 노움은 수염을 잡아당겼다.
“그렇지 않소?”
“그렇지요.”
OWIC의 간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