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ep50. 집, 출발 준비 (1)
나는 한동안 북쪽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노미나 산맥 위로 예전에 봤던 거인의 석상보다도, 세계수의 꽃보다도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질적이라 느낄 정도로 거대했다.
검은 태양이 검은 눈물을 흘린 다음에 발생한 신기루였다. 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애초에 지구에서 신기루도 자주 볼 수 있는 형상이 아니며, 목격한다 하더라도 저렇게 장관을 만들어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엘리엇은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새 악마가 태어나겠군.”
“또 악마가?”
“악마는 신의 부정적인 부분에서 고개를 드는 법이니.”
“……그거 진짜 지긋지긋한 놈들이네요.”
눈물을 흘리는 게 부정적인 모습일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당장 성녀를 괴롭혔던 악마가 신의 비명 소리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엘리엇은 우려 가득한 모습으로 떠나면서도 반드시 찾아와 달라는 말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뭐 할 거야?”
이제는 뭔가 리리의 말버릇처럼 된 질문. 나는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 버리며 말했다.
“쉬자.”
“나 씻고 올게.”
2층으로 올라가는 리리에게서 후드득 하고 모래가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번 여행에는 진짜 고생을 하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음 여행이 더 힘들 거 같은데.
그때, 서지아가 리리와 마주치며 내려왔다. 반바지에 반팔 티. 나름 엘프 같던 모습은 사라지고 다시 내가 알던 서지아로 돌아와 있었는데, 다 젖어 미역 같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올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심술이 올라왔다.
“야. 내가 밑에서 어? 고객님 접객하는데 혼자 호다닥 기어 올라가서 아주 그냥 따뜻하게 씻고 내려오셨네?”
“무슨 말이야? 자기 일 하는 데에 방해 안 되려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건데.”
“핑계는 좋지.”
서지아는 피식 웃으면서 내 곁을 지나쳤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서지아는 서쪽을 향해 섰다.
“왕—!”
조금 더 현세를 즐기라고 일부러 소환을 해체하지 않는 존슨이 서지아의 발치를 맴돌았다. 서지아는 그걸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유령들은 원래 엘프를 질색하는데, 얘는 그런 것도 없나 봐.”
“가끔은 자기가 유령이라는 자각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이름이 뭐야?”
“강선후.”
“……자기 말고.”
“존슨.”
“자기다운 작명이네.”
서지아는 존슨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엘프는 생리적으로 유령을 혐오할 수밖에 없다며? 존슨이랑 잘 지내는 건 의왼데.”
“몰라.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서지아는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황무지가 시작되며 저 멀리 키호테의 진명이 적힌 바위산이 있었다. 처음 셀피를 만난 곳.
그리고 그 너머에는 끝을 모르는 노미나 산맥이 시작된다.
그 웅장한 산맥마저 압도할 정도로 높이 자란 꽃.
서지아는 그곳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솔직히 대수림에 남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쨌거나 그게 좋았다면 된 거겠지.
마음 같아서는 바로 북쪽을 향해 출발하고 싶었지만, 조금은 더 이성적으로 보기로 했다.
거대한 신기루는 검은 태양이 정오의 위치를 향하며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하지만 북쪽에서 무언가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엘리엇도 묘하게 복귀하는 태도가 다급해졌다는 걸 느꼈으니까. 무엇보다 악마를 언급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욱더 참기 힘들어지기만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북쪽의 저 산맥을 뛰어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 씻었어. 당신 차례야.”
뒤를 돌아보니 문을 빼꼼 연 상태로 리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야 좀 사람다워진 모습을 보니 조금은 더 이성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낮은 부분이긴 해도 산맥 하나를 통째로 넘은 거다. 검은 태양이 뜨고 나서 날짜를 세진 못했어도 한 달은 무조건 훌쩍 넘은 것 같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주일은 쉬어 줘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신기루를 잠시나마 잊으려고 노력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차소희의 도움을 받아 짐을 풀었다. 우선 연금술 재료로 쓸 법한 것들을 모았더니 산더미였다. 탐험 기간이 길어지고 다양한 환경을 만나다 보니 이것저것 채집한 게 어느새 이 정도.
“음…….”
창고도 부족하고, 연금술 실험대도 지금으로서는 그냥 임시 수준이었다. 평소에 자주 쓰는 폭발성 화합물이나 간단한 연고 같은 걸 만드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흠…….”
“어, 지훈 씨 부를까?”
“됐어. 통장에 얼마 있어?”
“사업자 통장? 저기 안에 장부 있으니까 직접 확인해. 보면 놀랄걸? 너 그냥 평소에 챙겨 오는 그런 것들만 팔아도 어마어마해. 의뢰 안 받고 장사만 해도 되겠어.”
최근에 내가 가지고 온 회복 효과가 있는 약초가 화장품 재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는 둥, 그런 식으로 마케팅을 조금 더 하면 훨씬 더 효과가 있겠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부분에는 여전히 관심 없지만,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부속 건물 하나가 필요해. 창고로 쓸 거니까 컨테이너 정도면 되고, 오두막 안에 창고로 쓰던 방 벽 헐 거야.”
“뭐 하려고?”
“방 하나로 합쳐서 실험실 넓히려고.”
“오…… 그거 본격적이구나? 알았어. 업자 알아볼게.”
확실히 차소희가 이런 부분을 맡아 주니 편한 게 체감되었다. 재정 관리 같은 거, 아무래도 나는 잘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이건 해결됐고.
“밥 먹자.”
우리는 짐을 다 푼 뒤 식사를 하면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냈다.
“맞다. 촬영은?”
“여기.”
식사 중에 차소희는 내 액션캠이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지를 궁금해했다. 내가 건넨 SD카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두근거렸다.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상만 옮기고 카드는 다시 줄게. 엄한 데 안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우리가 서로 의심할 짬은 아니니까.
휴식은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다. 리리는 하루 열두 시간은 잠만 자다시피 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번 여정이 꽤 고된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회복에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왔어.”
소파에서 옆으로 쓰러진 채 그대로 잠에 든 리리를 보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서연은 내가 찍어 온 영상을 거의 침 흘리다시피 바라보다가 문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회복이요? 그렇죠. 탐험은 길어질수록 소모전이라고 들었으니까요. 안 그래도 선후 씨가 가지고 있는 정글도 손잡이에 그런 효과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잡자마자 막 급속도로 회복을 하는 건 아니라서요. 저 하나 체력 회복하는 거야 가능할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효과지, 거기에만 기댈 수는 없게 된 거 같아요.”
“그건 그렇죠. 이번에 기간이 어떻게 되었죠? 거의 세 달 넘게 계셨다 오시지 않았나?”
“그렇게 오래됐어요?”
하긴, 그곳에서 기생체와의 전투만 해도 한 달이 넘었다. 한 달 동안의 싸움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지.
“지금 서울은 눈 와요.”
“…….”
이번 여정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를 체감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눈이라니.
물론 앞으로의 여정이 무조건 이렇게 오래 걸릴 거란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 거리는 점점 멀어질 거고, 탐험 시간도 늘어날 거다.
이제까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동 수단이 있다면 의외로 지구도 생각만큼 넓은 곳은 아니니, 그 정도의 기준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세계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저기요.”
세계수의 싹을 가리켰다.
“저 아래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제 생각보다도 훨씬 넓었거든요. 저 위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했어요.”
소파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젖히고 있었던 나는 시선을 돌려 진서연을 바라보았다.
“왕의 무덤에 대해서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셨죠? 거리를 측정할 수 있었어요.”
“……어떻게?”
“방법은 재미없으실 거예요. 대충 비유하자면…… 천문학에서 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계산하는 방법이랑 비슷해요. 측량 부서에서 힘을 크게 써 줬는데…….”
진서연은 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완전 들떠 있기 마련인데.
생각보다 별거 없는 정보인가?
나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거리가 얼마일까요?”
“글쎄요?”
진서연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 세 개가 펴져 있었다.
“3초 이상.”
“뭐가요?”
“빛의 속도로 3초 이상 걸려요.”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완전히 허리를 앞으로 숙인 채 진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서연은 차분한 게 아니라 완전히 얼떨떨한 상황인 거였다.
“이것도 확실한 게 아니에요. 물리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확실히 계산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 막말로 빛의 속도가 우리가 아는 대로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래도.”
“선후 씨 말이 맞아요. 여기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곳이에요.”
나도 모르게 고개가 서쪽으로 향했다. 세계수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왕의 무덤도 바로 저 방향이었다.
“……저쪽에는 바다가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애초에 그렇게 먼 거리라면 물리적인 방법으로 도착할 생각을 아예 하면 안 되겠지.
아마도 다른 이동 수단이 있으리라 믿었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나니 방법은 어쨌거나 있겠거니 싶었다.
공사가 시작되었다. 오두막의 내벽을 허물어 두 방을 하나로 합치고 단열재를 보강했다. 연금술에 있어서 온도 통제는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외부에는 조립식 컨테이너가 완성되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이계인들이 보기에 썩 어색하지 않은 모양. 창고 자재는 전부 이쪽으로 옮기느라 고생 좀 했다.
그렇게 완성된 연금술 실험대.
가만히 보고 있자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우리 연구실보다도 좋아 보이는데요.”
“네? OWIC이 이 정도도 안 만들어 줘요?”
“아뇨? 첨단 설비야 있죠!”
진서연은 내 연구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로망이 있잖아요? 선후 씨 탐험가에서 연금술사로 전직할 생각이세요?”
나는 웃으며 안쪽으로 다가갔다. 기역자로 꺾인 선반. 그리고 그 위에 올려진 실험 도구들. 몇 개는 진서연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온 거고, 몇 개는 내가 직접 재료를 공수해 와 수제작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모아 보니 정말로 그럴싸한 모습.
“이제 뭐 할 거야?”
나는 가방을 챙겨 왔다. 아공간 가방이 아니라 리리가 매고 있던 보조 가방.
* * *
리리는 강선후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선후가 연금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리리도 아주 기초적인 원리 정도는 공부한 상황이었다.
연금술은 제국, 혹은 대륙 전체에 퍼진 나름대로 대중적인 기술이었다. 어디 산골짜기 오두막의 노파마저 근처 약초로 연고를 만드는 법 정도는 아는 탓이었다.
하지만 강선후의 연금술은 뭔가 달랐다. 투박하며, 고전적인 방식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그 거친 방법론 속에는 일말의 우아함이 숨어 있었다. 날것 그대로가 가지고 있는 뭉툭한 우아함. 모순적인 말이었으나 리리는 이렇게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강선후는 이전 세계수의 꽃에서 가져온 연금술사의 일지를 펼쳤다. 그곳에서 뭘 본 걸까? 귀환하는 여정 중간중간에도 같은 페이지를 펼쳐 유심히 바라보았다. 따로 이유를 묻진 않았지만 조금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일지를 다시 바라보던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 속에서 어떤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차소희와 진서연은 그저 흥미롭다는 느낌으로 바라볼 뿐이었으나.
“……당신.”
리리는 동요한 얼굴로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선악과.
세계수가 맺었다는 최초의 열매이자 필멸자의 정신을 부숴 버릴 정도로 유혹하는 원죄의 과실.
먹으면 악마에 버금가는 힘을 얻게 되어, 영원한 쾌락 속에서 살게 된다는 과일.
“그걸로 뭐 하려고?”
강선후가 그걸 먹지 않는다는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선악과의 유혹은 떠올리기만 해도 손을 떨리게 만들었기에 리리는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신이 눈물을 흘리는 현상은 나도 처음 본 거 같지만. 북쪽에서 이번에 악마가 태어났을 수도 있대.”
“……나도 들었어.”
“그놈들 잡는 거 처음에는 꽤 재밌었는데, 너무 위험하기만 하고 맨날 길목 막고 있는 거 좀 골치 아픈 건 사실이잖아?”
악마를 그저 ‘골치 아픈’ 존재로만 취급하다니.
리리는 저런 강선후의 태도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원래 악마는 고작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존재로 취급되지 않으니까. 당장 아까 전 노움도 악마가 태어났을 가능성에 표정이 굳고 복귀를 서두르지 않았는가?
강선후는 가죽 주머니 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흔들릴 일이 없는 그 눈빛마저 선악과를 바라보니 살짝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버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선악과가 어떤 유혹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 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들어 보려고.”
“뭘?”
“불멸을 죽이는 맹독을.”
강선후는 일지를 덮었다. 그리고 황금 지침에서 푸른 보석을 꺼내 가져왔다. 그것은 광채를 발하더니 집행자의 검이 되었다.
검 끝을 가죽 주머니 안에 있는 선악과에 수직으로 가져다 댔다.
「키이이이—」
선악과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에서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또렷했다.
칼로 쇠벽을 긁는 소리 같기도, 공포에 질린 짐승의 신음 소리 같기도 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