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ep50. 집, 출발 준비 (2)
리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붉은 눈동자로 강선후를 주시했다.
강선후는 선악과에 수직으로 든 검의 끄트머리를 가져다 댄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녹슨 경첩에서 들리는 듯한 기묘한 신음 소리가 어두운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선악과에 대해서 말로만 들은 진서연과 차소희는 그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강선후를 바라봤다. 서지아조차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 유혹에 시달린 경험까지 있는 리리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강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강선후가 저 검을 찔러 넣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악과는 그저 세계수의 열매가 아닌가? 선악과가 왜 신의 자손을 악마화시키는 힘을 가지게 된 걸까? 그게 세계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강선후는 집행자의 검을 가만히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선악과의 반응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선악과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일어나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었다.
“……아무 문제 없는 거지?”
차소희의 말을 듣고 리리 역시 의문을 품었다. 강선후는 무모해 보이지만 사실 대책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다. 필요하다고 느끼면 절벽 아래로 기꺼이 뛰어내리지만, 언제나 안전줄을 잊지 않는 신중함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강선후는 왜 지금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는 거지?
그 순간, 창문 하나 달려 있지 않아 어둠뿐인 이 실험실의 끄트머리에서 남색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건 사자의 지팡이었다. 강선후는 어느 순간 그 유물을 꺼내어 이 방의 한편에 박아둔 상황이었다.
그와 동시에.
“헉…….”
진서연과 차소희가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뱉을 정도의 빛이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빛은 룬이었다. 그리고, 그저 하나의 단순한 룬 문자가 아니었다.
탈레talle부터 모로스moros까지. 강선후가 사용하던 수많은 제어 룬이 겹쳐진 형태였다.
성질이 전혀 다른 룬들이 한 군데에 동시에 모여, 각자의 힘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서로 공명하며 새로운 힘을 만들어 냈다. 그건 고대 시대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기계장치처럼 하나의 아름다운 완성품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서지아가 내뱉었고, 리리는 여기에 동감했다.
리리는 강선후를 따라다니며 자신이 룬을 빠르게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강선후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성장하는 건 리리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도 강선후를 능가하는 마법사를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풍화의 시대에 강선후의 발치라도 따라갈 마법사가 존재할지조차 의문이었다. 드넓은 이 세상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 뱀파이어였으나, 감히 그런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강선후가 이 실험실에 장치한 룬은 아름답고 완벽했다.
죽음을 다루는 룬인 탈레talle는 홀로 창백하게 빛나며 선악과의 영혼이 폭주하는 걸 통제하고 있었다. 모두가 강령술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혼을 다루는 언어라는 사실을, 그리고 강선후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강선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 끝을 아주 신중하게 선악과에 찔러 넣었다.
선악과에 깃든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날뛰지 못했다. 왜?
“……영혼을 통제하는 룬에 짓눌리고 있어.”
선악과가?
선악과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인가? 리리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고, 그제야 아주 희미해서 눈치챌 수 없었던 영혼의 상, 그 단편을 엿볼 수 있었다. 선악과 안에는 어떤 영혼이 숨어 있었다.
그 순간 리리는 선악과의 본질에 대해 깨달았다.
선악과는 필멸자를 악마로 만드는 과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세계수, 그 거대한 존재에게 기생했던 악마 그 자체였다.
“세계수가 병들었던 이유가 그럼…….”
악마가 열매의 껍데기를 쓰고 세계수에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선악과의 갈라진 틈으로 악마의 영혼이 스며 나왔다. 육체를 가지지 못해 순수한 에너지나 다름이 없는 영혼.
영혼이 지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며, 그러지 못하면 촛불의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만다. 악마는 불멸을 베는 검에 영멸 당하느니 세상에 스며드는 걸 택한 것이었다.
그 순간.
“걸렸다!”
강선후의 왼손에서 황금빛 섬광이 발하는가 싶더니 시약병 세 개가 끼워져 있는 거치대가 발현되었다.
『연금술사의 시약병』
강선후는 비어 있는 하나의 뚜껑을 열고 악마를 그 안에 담았다.
병에 악마의 영혼이 담겼다.
“병에 순수한 에너지가 담긴 건가요? 그게…… 말이 돼요?”
진서연은 저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담길 수 없는 비물질을 담은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지아와 리리는 저 병이 뭔지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병에는 은하수가 담겨 있지 않은가?
연금술사에게 필요하지만 연금술사가 얻을 수 없는 물질이 담긴 병.
세간의 사람들은 구할 수 없는 물질이 연금술의 필수 재료라는 주장을 연금술사의 변명이라고 여겼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연금술사가 재료를 구하지 못한 탓으로 핑계를 돌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리리는 알았다. 그건 변명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연금술의 극의에 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했다. 저 시약병이 그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던 어떤 연금술사의 열정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고, 강선후가 지금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쥔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강선후는 병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거무스름한 에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로 첫 번째 재료 수집.”
대체 무슨 재료를 말하는 걸까? 저게 연금술 재료로 쓰인다는 것부터, 선악과에 대한 모든 사실까지.
강선후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 순간, 리리는 강선후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공책을 뒤늦게 발견했다.
연금술사의 일지 옆에 놓인 두꺼운 공책과 펜.
저도 모르게 노트를 집어 들어 펼쳤다. 그곳에는 강선후의 필체로 적힌 수많은 메모와 창발적 아이디어, 그리고 조금은 조잡한 방정식과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룬 문자의 샘플이 적혀 있었다. 그건 노트의 처음과 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리리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편안함을 누리고 있는 그 시간마저 강선후는 매일 밤을 새우며 이 모든 걸 공부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던 무식한 열정이 이 노트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
“공부는 혼자 조용히 하는 게 편하잖아.”
강선후는 속 편하게 그런 소리나 했다. 노트에 온갖 고생이 그대로 담겨 있는데도 불구하고.
* * *
나는 마당 테이블에 앉아 연금술사의 시약병을 나열하고 빤히 바라보았다.
연금술사의 시약병은 총 세 병이 제공된다. 하나는 은하가 안에 통째로 들어 있었다. 연금술사는 이걸 은하의 눈물이라고 불렀지?
두 번째 시약병에 선악과 악마의 영혼을 담았다. 검은색의 무거워 보이는 연기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탈출하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인데. 안쪽에 있는 물질은 자의적으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비어 있는 세 번째 병을 이용해서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보았다. 물 같은 건 당연히 담기고, 기체도 담겼다. 불꽃이나 태양빛 같은 물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마저 담겼다. 지구로 가져가 태양빛을 담자 은은하고 따뜻하게 빛나는 게 어디 장식해 두면 그럴싸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열려 있는 뚜껑을 존슨이 혀로 핥고, 깨무는 것도 보았다. 잘 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너무나 다행히 내가 지상에 불러온 유령은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자연스레 깨달았다.
“탈레로 부른 유령은 이 안에 안 들어간다는 건가?”
“애초에 영혼이 현실에 소환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수단으로든 고정화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리리의 말에 납득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음 탐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우선 서울로 넘어가 남대문에서 쌍안경과 80mm짜리 굴절 망원경을 샀다. 3키로 조금 넘는 물건이니 아공간 가방에 넣어도 부담 없고, 190배율 이상 확대할 수 있으니 정말 먼 거리를 탐색할 때 유용한 물건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별이나 달도 보면 좋겠지.
나를 따라 지구로 넘어온 리리는 눈을 보고 즐거워했다. 추운 지방에 사는 본성을 버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지구에서 돌아오자 휴게실에서 나머지 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차소희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핸드폰을 보여 줬다. 거기에선 영상 하나가 재생되어 있었다.
“뭐야?”
“봐 봐.”
내 바디캠으로 촬영된 녹화본의 편집 영상이었다. 30분 단위로 편집되어 1편만 제작되어 있었는데, 딱 봐도 유튜브의 형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차소희한테 이런 재능이 있었나? 내가 보기에도 편집이 깔끔하고 센스가 엿보였다. 심지어 엘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는 자막도 들어가 있었는데, OWIC의 도움이 있었다고 차소희는 설명했다.
“우리…… 유튜브 채널 만들면 어떨까? 대충 이런 영상을 업로드할까 싶어서 샘플로 만들어 본 거야.”
“채널?”
“응! 탐험가 길드 공식 채널!”
“…….”
눈빛을 반짝이는 차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별로일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돈 때문에 그러는 거야? 우리 이런 거 안 해도 적당히 잘 벌지 않나? 월급 올려 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음…… 솔직히 이야기할게.”
차소희는 핸드폰을 가져가 영상을 보며 말했다.
“나 이 영상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아. 평소에 네 탐험 이야기 들으면서도 그랬고. 나는 천성 회사원이라 도전이랑은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탐험가 길드원이라면 나름대로 어울리는 무언가를 하면 좋지 않을까 싶더라고. 그냥 집 지키고 돈 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만들어 본 거야? 심심풀이로?”
차소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보기에도 단순히 심심풀이는 아닌 걸로 보였다. 이런 영상을 편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누군가는 돈도 받으면서 하는 일이잖아?
차소희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네 모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 같이 즐기는 거지.”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영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문제 될 여지가 있나? 아니, 전혀 없었다. 애초에 내가 문제 될 행동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조금만 애매하거나 지루한 장면은 차소희가 전부 다 편집한 상황이었다.
요르문간드와 싸우고 엘프와 대화를 나누며 세계수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
퍽 충격적이지만 이게 나한테 불이익을 가져다줄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난 지구나 베이스캠프에 잘 있지도 않으니까.
그럼 뭐. 괜찮지 않나?
차소희의 말에는 나름대로의 울림이 있었고 그 감정은 나도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즐거움을 사람들이 따뜻한 침대에서 대리 경험할 수 있다면, 그건 꽤 좋은 일일 거 같으니까.
나는 옆에서 내 대답을 기다리던 진서연을 불렀다.
“서연 씨.”
“네?”
“이 영상이 올라간 뒤에 사람들이 날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OWIC에 부탁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제 역할이네요.”
고개를 돌려보니 마을 쪽에서 정지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다가왔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부탁할게요.”
“얼마든지요.”
“왜 OWIC이 이렇게 날 도와주는지 잘 모르겠네요. 빚은 진작에 다 갚지 않으셨나?”
“저조차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강선후 님의 활동이 회사에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나쁜 건가요?”
“장담컨대, 강선후 님의 심기에 거스를 일은 아닐 겁니다.”
“거스르면, 알죠? 그때 기억나죠? 서지아 피떡 됐을 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명심하겠습니다.”
난 물론 농담조로 말했고 정지훈도 웃으며 대답했다.
옆에서 다리를 꼰 채 듣고 있었던 서지아가 조소를 흘렸다.
“하, 좋은 추억이긴 하지.”
짐은 챙겼고 식량도 충분히 비축했으니 이제 내일쯤 출발해 볼까. 그런 생각이 드는 시점이었다.
“저거! 또 저런다!”
차소희가 손가락으로 북쪽 지평선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북쪽 지평선에서 떠오르고 있는 검은 태양이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뚝, 뚝.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저 검은 물방울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이번 여정은 그걸 알아내는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조금 익숙한 그 풍경을 여유를 가지고 관찰했다. 다시금 노미나 산맥 위로 거대한 신기루가 떠오르고, 그건 세 개의 검은 피라미드의 형상을 띤다.
“……?”
그리고 그걸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서로 겹쳐져 있는 세 개의 검은 피라미드.
이건 지난번에도 봤던 장면이니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풍경이 일부 바뀌어 있었다.
피라미드 근처에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이 창을 들고 서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딱 봐도 군세라고 할 수 있었다.
거인의 형상처럼 보였으나 저건 신기루였기에 크기를 함부로 추측하는 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떠나야겠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리리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사무실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