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ep51. 북쪽, 먼 여행길 (1)
우리는 바로 짐을 챙기려고 했지만, 머리가 차가워지고 보니 바로 북쪽으로 떠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오후가 된 지 한참 지난 시점이니 곧 휴식 시간이 찾아올 게 분명했다.
검은 태양이 떠오른 이후로는 하루를 셀 수 없어 타이머에 의존했기에 생활 패턴 문제는 계속해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벼운 토의 후 정확히 열두 시간 뒤에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 거 같아?”
차소희의 물음에 살짝 고민했다. 답을 생각해 놓지 않은 건 아니다. 탐험 기간을 추측하는 건 필요 자재를 구비하는 데에 기준이 되는 요소니까.
그저 이 대답을 듣고 차소희가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넉넉잡아 두 달?”
“왕복?”
“편도. 거리 자체가 그 정도로 멀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근데 중간에 산맥도 있고 가다가 날씨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변수가 많을 것 같아서 조금 넉넉하게 잡아 봤어. 실제로는 더 짧을 수도?”
“……다음에는 반년은 지나야 얼굴 보겠네.”
이런저런 일 처리까지 한다 쳤을 때 저건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차소희는 내심 아쉬운 듯 말했다.
“그렇게 자리 비울 거면 조금 더 오래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차소희. 이번에 시작해 보기로 한 유튜브 채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같이 봐 줬으면 하는 마음인 모양이었다. 이해 간다. 오랜만에 맘 다잡고 무언가를 시작해 볼 때는 누군가 그걸 옆에서 지켜봐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갔다 오면 적당히 성장해 있겠네. 결과 보고 성과 판단하지 뭐.”
“됐어. 괜찮으니까 갔다 와.”
차소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정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 검은 태양이 보였다. 처음에는 소름이 돋았는데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진다.
“이 현상도 언젠가 끝난다며,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까 서둘러 움직이는 게 좋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서 출발하려는 이유였다. 피라미드의 신기루를 만들어 내는 게 검은 태양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으니 이 현상이 끝나면 자칫 시기를 놓칠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허용 못 하지.
방으로 들어가니 리리가 가방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번 탐험에 챙겨 갈 건 총 세 개. 리리와 내가 들고 다닐 5kg이 조금 안 되는 가벼운 가방 두 개와 아공간 가방 하나였다.
이제까지는 아공간 가방 하나만 들고 다녔다. 그나마 따로 챙긴 건 리리의 보조 가방뿐.
하지만 이번 탐험은 제대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소희 말마따나 이런저런 변수를 따지면 반년은 훌쩍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생각을 달리했다. 별로 대단한 생각은 아니고, 렐릭시나의 지구력과 근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한 거다.
리리는 아공간 가방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힘을 주다가 인상을 썼다.
“……뭐야?”
안간힘을 다하면 못 드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등에 짊어지면 반나절 만에 진이 다 빠지고 어깨에 격통이 올 만한 무게.
그래서 리리가 앉는 안장 뒤에 가방을 올릴 만한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리리가 낑낑대며 아공간 가방을 안아 올리길래 내가 도와줘서 한편에 대기하고 있는 렐릭시나의 등에 올렸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 둔 고정 장치에 단단하게 걸었다. 렐릭시나가 웬만큼 날뛰어도 움직이지 않을 거다.
“이제 이건 이동형 창고 느낌으로 쓰고, 너하고 내가 들고 다니는 가방은 즉석에서 필요한 물건들 휴대하는 용도로 쓸 거야. 너무 무겁지 않게 유지해.”
“작은 짐마차 역할을 하는 거구나.”
리리는 렐릭시나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좀만 더 고생해 줘.”
“크르릉…….”
렐릭시나는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앉아서 투레질을 할 뿐이었다. 하긴, 절벽도 수직으로 오르는 녀석에게 이 정도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우리는 그 뒤 휴식을 취했다. 리리는 내 권유에 위로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침대에 푹 빠지기로 했다. 은근히 잠이 많은 녀석이지.
나는 마당으로 나왔다. 진서연과 차소희는 커피잔을 앞에 두고 테이블 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한쪽 텃밭에는 리리가 관리하던 식물들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한동안 관리를 못 해서 무성했던 약초들은 일주일 만에 원래 텃밭의 모습을 찾았다.
“차소희. 나 없는 동안 저거 좀 관리해 줘.”
“응. 근데 너무 기대하지 마라?”
“기대 안 해.”
“죽이지만 않아 볼게.”
“걔들 쉽게 안 죽어.”
리리가 나오면서 말했다. 이제는 한국어를 꽤 익숙하게 하게 된 리리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놀랐다. 리리는 단순하게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순식간에 천재 컨셉으로 스타덤에 올랐을 정도.
그런 대화를 나누던 우리의 시선은 어느새 서지아에게로 향했다. 복귀 후 서지아는 이계에서 가만히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도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세계수의 싹이 있었다. 공기의 산란으로 인해 뿌옇게 보이는 그것은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든다.
세계수는 온 세상에 정기를 흩뿌리는 역할을 한다지. 땅 아래 산의 뿌리를 흐르는 정기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대수림은 계속 성장하고, 세계수가 존속할수록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그날의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니 직접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열두 시간이 정확히 지난 뒤, 자고 있는 리리를 깨우고 렐릭시나의 등에 탔다.
“조심히 갔다 와. 다치지 말고.”
우리는 이제 퍽 단출한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이제는 이런 헤어짐이 익숙해졌으니까.
북쪽을 가로지르는 강에 도착했다. 지난번처럼 OWIC 상주 요원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건넌 뒤 계속해서 향했다. 좀 나아가다가 만난 작은 평야 귀퉁이, 바위 아래에서 첫 번째 휴식을 취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 끝에 지난번보다 빨리 고열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전에 마주했을 때는 땅이 펄펄 끓고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시릴 정도로 뜨거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식어서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 리리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는지 가까이 다가가 땅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앗 뜨거!”
“……그걸 만져 보고 있냐.”
만남 초기의 시니컬한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런 성격은 아직도 남아 있긴 하지만, 리리는 점점 더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렐릭시나의 등에 타고 달렸다. 가다 보니 지난번의 태양탑이 보였다. 이제는 식어 굳어 가는 땅 안에 단단히 박힌 채, 꼭대기 몇 층만 간신히 드러내는 그 탑.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며 흑성과의 만남을 추억했다.
“이제는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
리리가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고열지대를 지나, 우리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에서 성녀 비바치시모에게 맨 처음 비프로스트의 존재를 배웠다.
비프로스트를 통과하고 우리는 설산에 돌입할 수 있었다. 위를 바라보자 천공섬과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당신이 만들었던 나무야.”
“숲이 줬던 씨앗으로 만든 나무.”
그때, 저 나무를 타고 천공섬으로 들어갔었다. 그곳에서 세 번째 유물 예언자의 서를 얻었고, 키호테와 만났지.
당시에는 거대한 넝쿨이었던 저 식물은 지금 잎과 가지를 뻗어 나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당신이 풍경을 바꾸고 있네.”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리리는 농담조가 아니었다. 그렇게 잠시 천공섬을 바라보다가 다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러다 문뜩 남쪽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계곡이 있었고,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고딕 양식과 비슷한 거대한 교회 건물이 있었다.
장벽이 세상을 쪼개기 전에는 주신교의 총본산이었다는 곳.
하지만 장벽이 발생한 후에는 제국의 변방인 남부 지방에나 간신히 영향을 미친다고 했지.
성녀, 아니 이제는 이름을 아니까 벨라라고 불러야지.
벨라는 저곳에 있을 터였다. 지난번 벨라의 동생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언니가 대주교가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면 벨라는 저곳을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뜻.
여행자로서의 벨라가 아니라 대주교이자 주신교 성녀로서의 벨라를 보고 싶어졌다.
시계를 보니 곧 쉬는 시간도 찾아올 터, 설산 한복판에서 침낭에 낑겨 쉬느니 저곳에서 하룻밤을 부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은 길고,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놔야 하니까.
리리도 내 의견에 동의했고, 우리는 설산을 반대로 내려가 계곡 안쪽으로 진입했다. 이쪽에서는 낭떠러지의 구조인지라 반대쪽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꽤 먼 거리를 돌아가야 했다.
* * *
주신교의 교회는 예상한 분위기였지만,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좁고 긴 내부 구조. 가운데로 길게 늘어진 복도에 좌우로 연결되어 있는 각종 방들.
그리고 그 끝에는 예배당이 보였다. 전반적으로 황금 왕국의 유적지와 비슷한 건축 양식이었고, 그 사실은 이 건축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사제 한 명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인사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못한 나 대신 리리가 예를 갖추었고, 늙은 사제는 온화한 표정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대주교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운 상황입니다.”
“어…… 그래요? 멀리 갔어요?”
사제의 눈동자에 흐르는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의 자손은 그 신비로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근시일 내로는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다. 속죄의 고행을 위해 북쪽으로 떠나셨거든요.”
“속죄의 고행이요?”
“검은 태양이 뜰 때마다, 황금의 시대를 실망하게 한 모든 신의 자손을 대표하여 성녀가 떠나는 여정입니다. 대주교께서는 대주교이자 성녀시기도 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태양도 주신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맞춰 종교적인 행사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도 아쉬운데.
“하지만, 성녀께서 그대가 방문할 때 건네라 하신 물건이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
나한테?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접객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씁쓸한 허브차를 대접받으며 잠시 기다렸다.
세 명의 주신교 사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 중 둘은 꽤 무거워 보이는 석제 상자를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뚜껑을 열자 안에 들어 있는 건 원형의 거울이었다.
대한민국의 유물이라는 청동거울과 흡사한 형태. 금속 재질의 뒷면은 검은 태양을 상징하는 풍성한 양각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앞면은 살짝 울퉁불퉁한 은빛의 금속 재질 거울이었다
“이게 뭐예요?”
“영웅 여정의 지도라는 유물입니다.”
“황금 유물인가요?”
내심 기대하고 그렇게 물었지만, 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황금 유물이었다면 내가 들고 있는 지침이 먼저 반응했겠지.
“검은 태양 숭배라는 고대 단체의 유물이라고 합니다.”
그 말만 들어도 지금 내 상황에 도움이 될 법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제는 말을 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건 지도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도 그 이상의 구체적인 건 알지 못하지요.”
“교회가 이 물건을 어떻게 가지고 있어요?”
“검은 태양 역시 주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신교회에서 확보의 의무가 있는 건 당연하지요. 과거 장벽이 대륙을 조각내지 않았던 시절 주신교의 발굴단이 확보한 물건입니다.”
고고학적 유물은 언제나 시선을 빼앗기 마련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이 물건이 사용되던 시절이 상상되고는 하니까. 과거 언젠가 이 물건을 만졌던 사람의 손길이 여전히 묻어 있다는 걸 상상하면 즐거워진다.
나는 그 물건을 바라보다가 다른 의문을 품었다.
“……내가 여기 올 건 어떻게 알고 이런 물건을 준비하셨어요?”
“예언 때문 아닐까.”
옆에서 리리가 말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다. 내심 놀랐다. 예언이란 그렇게 정확한 거구나.
하지만 사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녀께서는 여전히 악마의 단검을 물고 있기에 예언을 하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여전히 그 물건을 물고 있구나. 예언을 거부하고자 했던 그 가치관을 생각해 보면 그럴 법하다.
「우리는 신의 장기말이 아니야.」
성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신앙인이라고 하기에는 퍽 파격적인 사상. 예언은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미래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성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난 개인적으로 그 말이 마음속 깊이 남았다. 좋은 문장이잖아.
사제는 이어서 설명했다.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녀는 어째선지 당신이 이곳으로 올 거라는 확신을 하고 계셨던 듯합니다. 그녀의 수호 기사가 대신해 준 말이지만…….”
사제 역시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투였다. 벨라의 수호 기사라면 그 사람이지? 레베카. 뱀파이어 기사.
레베카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그 사람은 검은 태양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분명 북쪽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 교회를 방문할 겁니다. 저와 성녀님이 확신합니다.’
사제는 말을 이었다.
“무슨 근거도 없이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무 확고한 주장이라 우선 알겠다고 했지만…… 그런데 진짜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왠지 웃음이 나와서 낄낄거렸고, 리리도 입꼬리를 올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너무 간파당하기 쉬운 성격 아니야?”
“그런가?”
성녀도, 레베카도 내가 눈 돌아가서 북쪽으로 달려들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알기 쉬운 성격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사제에게 이곳에서의 하룻밤을 부탁했고, 사제는 흔쾌히 수락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