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ep52. 검은 태양 숭배 유적 (3)
채찍은 석상의 목을 단단하게 감아 고정되었다. 채찍 자체가 내 의도를 깨닫고 그에 걸맞게 모양을 변형한 느낌마저 들었다.
파지지지직—
깊숙하게 흐르는 전류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경련만 하는 석상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기란 역시 만드는 게 조금 까다로울 뿐, 한 번 제어할 수 있다면 공학자들 입장에서는 가장 만만한 에너지인 모양이었다.
물론 지구에서 이런 말을 하면 당연한 소리를 새삼스럽게 한다며 이상한 눈으로 보이기 일쑤지만, 이계에서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정기에, 명계의 기운에, 태양빛에 룬 언어에…… 이계에서는 이런저런 에너지들이 많은데 말이야.”
그런데도 유적들을 보면 전기를 사용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그다음으로 룬이지. 하지만 룬은 일종의 명령어고 난이도가 높아 대체로 제대로 된 황금의 유적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고민은 상황이 다 끝나고 하면 안 될까?”
리리의 투덜거림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기기기긱—
검은 돌로 이루어진 석상은 팔다리를 있는 대로 휘저으며 전기에 저항했다. 생명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라 오류와 버그에 대응하려 노력하는 로봇의 느낌. 둘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머리는 더 차가워졌다. 이 석상이 생물이 아니라 그저 방어 로봇이나 다름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자기력의 힘으로 붙어 있었던 석재 외피가 다시금 갈라지고, 후드득 떨어지며 내부가 드러난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꺼운 인공신경계의 모습이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더니 이내 연기를 뿜으며 쓰러졌다.
리리는 자신의 앞으로 쓰러지는 석상을 피하려다가 하마터면 압력 발판을 밟을 뻔했다. 발판 위에 발끝을 살짝 대더니 깃털처럼 가볍게 튀어 올라 자리를 옮기는 리리. 진짜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우리는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상황 종료를 파악했다.
“……당신 그 채찍 뭐야?”
별세계의 이질적인 물건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나도 채찍을 들어 얼굴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리리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검은색인데 금속처럼 느껴지는 광택. 단단함이 보일 정도인데도 동시에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이질적이다. 무게도 가볍고 휘두를 때마다 적재적소로 이동하는 무게 중심은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어디서 난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상자 옆에 엎어져 있었던 해골을 바라보았다. 가죽으로 이루어진 상하의를 입고 있었는데, 딱 봐도 탐험가의 복장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묘하게 현대적이었다. 현대인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계 사람들의 복장과는 이질감이 많이 든다는 의미에 가깝다.
“저 시체가 쥐고 있었어.”
딱 봐도 꽤 오래전의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체인데도 역겨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백골화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 유적과 관련이 있는 사람일까?”
이제야 여유가 생긴 리리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리하게 찢긴 재킷의 등 부분과 부서진 척추, 갈비뼈는 아마 넘어진 충격으로 금이 간 거 같고, 사망 직전에 발목에 골절이 발생했어. 아마 급하게 몸을 돌리다가 생긴 걸 텐데, 사망 직후에 생겼을 가능성도 있지.”
석상이 들고 있던 창을 가져와 찢긴 부분에 대보았다. 뒤에서 찔렸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딱 맞았다.
“모든 게 공격받았다는 결론으로 수렴해. 이 사람도 침입자였다는 거지. 그리고 이 유적보단 훨씬 더 최근 사람이야.”
“어떻게 알아?”
“옷이 멀쩡하잖아. 보통 오래되면 가죽 자체도 삭기 마련인데 이 옷은 아직 입을 만할 정도로 멀쩡해.”
내 예상은 이렇다.
“수백 년 전에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고 했잖아. 그때 이곳을 발견했던 탐험가 아니었을까?”
리리도 납득했다. 동시에 탐험가의 시체를 바라보는 눈빛에 연민이 조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 역시 이곳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온 거지.
어떤 열정을 가지고 이곳을 탐사하러 들어왔다가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한 거다. 이전에 있었던 함정은 통과한 걸로 봐서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을 텐데.
“당신은 뭔가 익숙한 듯 말하네.”
“그런가?”
“이런 시체를 많이 봤어?”
리리는 아직 지구에 대해서 잘 모른다. 지구는 아무리 탐험가여도 이런 걸 흔하게 볼 정도로 죽어 나가는 곳이 아니다. 에베레스트 정도가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익숙하긴 해. 그런데 많이 봐서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내가 이렇게 된 상황을 자주 상상하니까.”
“…….”
탐험이란 어쨌거나 항상 낭만 있는 취미는 아니다. 사실, 오히려 의미 없는 고생을 할 때가 훨씬 많지. 이런 식으로 끝나도 할 말이 없으니 언제나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고.
어쨌든, 감상은 여기서 끝. 상자를 열었다. 물론 함정이 있을까 우려해서 이런저런 확인 절차를 끝낸 뒤였다.
상자 안에는 작은 부적 하나가 들어 있었다. 동양에서 자주 쓰이는 종이 부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적 삼아 들고 다녀라.’ 하고 건넬 법한 작은 장식품이다.
원형의 고리 안쪽에 수염이 길게 난 인자한 노인이 지팡이를 든 채 서 있는 모습의 입체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앞쪽보다는 뒤쪽이 더 세심하게 새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각 부위의 연결지점이 부실해 보여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역시나 재질은 알 수 없었다. 회색빛이 나는 금속 재질인데 또 투명했다. 광원을 반대편에 두면 그 빛이 확실하게 보일 정도다.
그럴싸한 가죽 파우치에 담겨 있는 걸로 보아 귀한 물건인 건 맞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스mohs.”
시험 삼아 조금 큰 광원을 만들어서 관통시켰더니 장식품을 관통한 빛이 괴상한 모양으로 산란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특이할 만한 게 있는 건 또 아니었다.
“우선 챙겨 둬야겠지?”
“중요한 물건일지도 모르니까. 아니, 중요한 물건일 거야.”
리리도 검은 태양 유적을 바라볼 때는 살짝 텐션이 올라 있었다. 황금의 유물을 바라볼 때랑 좀 다른 느낌. 황금의 유물을 볼 때는 열망에 가까웠다면 검은 태양 유적을 볼 때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이 보인다.
나는 장식품을 안주머니에 넣고 석상이 나왔던 환영의 벽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작은 방이 하나 있었고, 우리가 찾던 구조물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네비게이터를 들어 바라보았다. 푸른 모래는 이제 바늘처럼 날카로운 형태로 정면을 강력하게 가리킨다.
그 안에는 원형의 차원문 구조물이 있었다. 비프로스트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어두운 빛을 띠는 구조물.
이 역시 검은 태양 유적 중 일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프로스트는 황금 왕국의 유산인 줄 알았는데.”
“아니면 검은 태양 숭배 집단이 황금의 왕국과 비슷한 시기의 단체였을 수도 있지.”
“그게 제일 맞는 말 같긴 한데…… 황금의 시대에 다른 집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리리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황금의 시대는 통합의 시대. 모든 신의 자손들이 황금왕의 아래에서 화합하던 시대라고 들었는데…… 다른 집단이 동시에 존재했다면 앞뒤가 안 맞잖아.”
역사는 항상 그렇다. 정확한 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만날 때마다 즐거워지는 법이다.
우선 비프로스트로 들어가기 전에 렐릭시나를 데리고 왔다. 기둥 위에 떠 있던 두 개의 수정을 손상시키자 폭풍은 사라졌다. 렐릭시나가 지나가기 어려운 길은 다행히 별로 없었다. 원기둥 형태로 돌아 내려가는 길에서 몸이 낑겨 조금 짜증을 낸 것 빼고는 말이지.
나는 비프로스트의 중앙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테두리를 따라 적혀 있는 의문의 문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내 오른손에 새겨져 있던 벨라의 선물, 기도문도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지개빛 포털이 만들어진다.
“들어가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솔직히 이 방향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리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비프로스트 말이야. 우리를 어딘가로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 항상 우리가 필요한 곳으로 데려다줬잖아.’
미신이나 다름이 없는 리리의 이 말을 조금 더 믿었을 뿐이었다.
뭐, 의미 없는 곳이면 다시 돌아가지 뭐.
그런 생각이나 하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뜩 뒤에 있는 탐험가 시체가 다시 떠올라 몸을 돌렸다.
나는 탐험가의 머리가 있는 부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진갈색 페도라를 들었다. 정장에 맞춰 입는 그런 페도라가 아니라 정말로 탐험가들이 태양을 가릴 때 쓰는 그런 모자. 오지 탐험 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나는 피부 좀 타는 거 신경 쓰지 않으니 잘 쓰고 다니진 않았지.
툭툭 털자 먼지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시 비프로스트로 다가가자 리리가 물었다.
“그건 왜 챙겼어? 딱히 챙겨야 할 정도로 쓸 만해 보이진 않는데. 가방 안에 모자 있잖아.”
“저 사람도 탐험을 계속하고 싶지 않을까? 자기가 쓰던 물건 중 하나라도 계속 탐험할 수 있다면 위로가 되겠지.”
나는 모자를 머리에 턱 얹으며 그렇게 말했다. 리리는 미소를 짓고는 비프로스트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자.”
우리는 비프로스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앞이 번쩍이고 속이 조금 뒤틀리다가 어느 순간 편해진다. 그 후에 가장 처음 느끼는 건 항상 온도감이다. 그 지역의 공기가 제일 먼저 피부를 덮치고 코안으로 스며들어 온다.
처음 느낀 건 축축함과 서늘함이었다. 눈을 떠 보니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길래 미리 손에 쥐어 두었던 손전등을 켰다.
이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허리만 간신히 펼 수 있을 정도로 천장이 낮은 곳. 처음에는 낭패인가 싶었으나 밖으로 나가는 입구는 짧고 간단했다.
밖에 나갔을 때 드디어 드넓은 평야가 우리의 시야 앞으로 펼쳐졌다. 드문드문 바위산이 보이고 조금은 메말라 보이는 바닥은 이곳을 황무지라고 판단하게 만들었으나, 바람에는 전혀 다른 정보가 담겨 있었다.
“달콤한 냄새.”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한 내 말에 리리도 따라 눈을 감고 코를 킁킁댔다. 하지만 별 냄새가 느껴지지 않은 듯했다.
“달콤한 냄새는 안 나는데.”
“비옥한 땅의 냄새야. 이 근방 지역이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 알려 주는 지표. 예전에는 이 냄새를 따라 방랑하고는 했어. 그럼 굶는 일이 줄었거든.”
“그렇게 살아남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신 개야?”
“……그거 어감이 조금 이상한데.”
“왜? 그냥 물어보는 건데.”
……저게 욕설인 건 우리나라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지? 리리가 알고 그러진 않았을 거다. 물론 한국어 이해도가 이제 와선 높지만 아무튼. 웃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우리는 그러면서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확실한 열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남쪽.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불의 대장벽.”
세계수 위에서 봤던 거다. 대륙 남부와 제국 본성의 교류가 거의 단절하게 된 주범.
거대한 불의 장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장벽은 애들 장난이겠구나 싶은 규모.
장벽 현상이 어떻게 제국을 몰락시켰는지 단번에 납득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안개 사이로 무언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산인지 제국 본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서쪽에 거대한 대사막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 역시 세계수의 싹 위에서 미리 봤던 장면이었다.
“제국이야.”
“새로운 세상이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