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ep52. 검은 태양 숭배 유적(4)
제국이든 뭐든 그런 정치적인 의미는 내 알 바 아니다. 그저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는 데에 벅차오르기 시작했을 뿐.
“렐릭시나.”
“크릉?”
“너 발목이랑 갈기의 불 끌 수 있다고 했지?”
“크르릉…….”
“끄고 다니자. 여기서부턴 아마 사람을 많이 만날지도 모르니까.”
렐릭시나가 몸을 세차게 흔드니 푸른 불꽃이 흩날리며 사라졌다. 이렇게 보니 그저 조금 험악하게 생긴 흑마일 뿐이다.
렐릭시나의 비정상적인 능력은 저 불꽃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능력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우리는 주저할 틈 없이 렐릭시나의 등에 올라타 북쪽으로 달려나갔다. 비프로스트 덕분에 두 달은 넘게 걸릴 거리가 몇 주 이내로 단축되어 버린 상황. 조금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렐릭시나는 불꽃을 없앴음에도 웬만한 말보다 빠르고 안정적으로 달려나갔다. 이 정도라면 길어 봤자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제국 본성에 도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시 천정을 지나 남쪽으로 사라져 가는 검은 태양. 모습을 감추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계에 뜨는 두 개의 달보다는 밝긴 했으나 태양과는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의 밝기였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는 완전한 밤도, 완전한 낮도 없다. 평소보다 피곤한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리리.”
“응?”
“운데라가 지옥의 습격에서 현세를 지켜 주는 빛이라고 했잖아.”
“운데라는 보호의 신이야. 다른 차원과 현세를 나누는 경계를 만들어 주는 신. 그래서 월식 때는 명계의 무리가 세상을 휩쓰는 거고.”
“그럼 지금은?”
내 말을 듣고 리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데라가 보이긴 하지만 검은 태양의 광채에 가려져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밤낮없이 달과 별이 지상을 비추긴 하지만, 어느 한순간도 확실하게 비추는 때가 없다는 거다.
“지금 이 시기에는 운데라가 지상을 잘 비추지 못하는 거 아니야?”
“…….”
리리는 바로 대답을 내뱉지 못했다.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운데라는 지옥의 습격에서 현세를 보호하는 빛을 내뿜는 달이다.
그런데 검은 태양이 뜨면서 운데라가 제대로 지상을 비추지 못하는 시기가 한 달이 훌쩍 넘게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세를 지키는 힘이 시간이 갈수록 애매해지고 있다는 거 아닌가?
우우웅—
그 순간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진동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은 이 몸 선정 제일 잘 들어맞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진동하는 건 황금 지침에 꽂혀 있는 노란색 보석이었고, 그건 연금술사의 시약병이었다.
연금술사의 시약병을 소환하자, 세 개의 병 중 하나가 진동하고 있었다.
“……선악과의 영혼이.”
선악과의 영혼을 담은 병이 진동하고 있었다.
이 병은 악마가 담겨 있다.
갑자기 이 병이 진동하고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아무런 근거는 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면 유독 반가워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이 영혼도 혹시 같은 부류의 영혼을 느끼고 반가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아무런 근거는 없다. 그저 직감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삶 속에서 직감은 자주 목숨을 구해 준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바람을 타고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
리리는 아마 듣지 못한 듯했다. 귀 보다는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은 아주 조그마한 비명 소리. 정말 멀리에서 들리는 소리였지만 나는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다시 시야가 좁아졌다.
* * *
솔라 제국은 탐험가 연맹이 있었다. 과거 장벽 발생 전에는 부흥했다고 하나, 장벽이 발생하고 세상이 조각난 지금은 그 명맥만 남아 심부름이나 하면서 연명하는 정찰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곳에는 한 어린 탐험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보단 책이 더 가까운 소년이었기에 그 부모는 마법사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성인이 된 그가 결국 선택한 건 탐험가였다. 지식보다는 이야기에 더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심부름꾼이지만 언젠가 과거 탐험가 연맹 부흥기가 돌아오리라 굳게 믿던 소년은 지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고 있었다.
“헉, 허억…….”
남쪽 불의 대장벽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에 신이 나서일까. 검은 태양이 떠오른 뒤 세상이 위험해진다는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혼자 출발해 버렸다. 탐험의 제1규칙인 ‘혼자 다니지 마라.’를 위배한 대가는 너무 컸다.
‘악마가, 악마가 대체 왜!’
이 근방은 주신교의 축복을 받아 악마가 태어나지 않는데? 왜 갑자기 악마가 태어난 거지? 검은 태양이 떠서? 말도 안 된다.
검은 태양은 신이다. 그렇다면 검은 태양과 악마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신을 쫓고 있는 다섯의 임프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임프는 고블린이라 불리는 숲속 난쟁이에게 악마가 빙의된 결과물이었다. 한 개체의 전투력은 고블린 때와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악마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고블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개체였다.
악마의 영혼이 들어간 고블린은 죽지 않는다.
그렇기에 임프는 소년을 거뜬히 죽일 수 있다.
“캬륵, 캬르르륵……!”
고블린이 낸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칠고 소름 끼치는 소리. 온몸이 검게 물든 악마는 지금 숲을 가로지르는 소년을 끊임없이 쫓고 있었다.
고블린은 원래 나무를 타지 못하니 한번 나무 위로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임프가 팔다리를 기괴하게 뒤틀며 밑동을 타고 오르는 모습을 보고 바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이때, 소년은 생을 마감할 뻔했다.
발아래에 돌부리나 썩은 나뭇가지가 걸렸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자신이 엘프로 태어나지 못한 게 이토록이나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인간일까. 아무런 능력도 타고나지 못하고 심지어 신에게마저 버림받은 인간으로 태어난 걸까? 왜 이 종족은 이토록이나 나약할까?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걸 느끼자,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이런 원망마저 피어올랐다.
소년은 숲에서 벗어났다. 드넓은 광야가 다시 펼쳐졌지만 오히려 이건 낭패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숨을 곳마저 사라졌으니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져 버렸다.
“캬르르르륵—!”
선두를 달리던 임프가 거칠게 뛰어올라 덮치는 순간이었다. 소년은 떨리는 동공을 부여잡지 못했다. 의식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캬라르르륵……?”
“……?”
이 순간, 아주 희미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임프의 울음소리 사이에 섞여 들어옴을 깨달았다.
“존슨, 물어!”
탐험가 소년은 푸른 바람이 저 멀리서 자신의 앞으로 쇄도한다고 착각했다. 그게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정령인가 싶었다.
하지만.
“컹!”
“키륵—!”
달려드는 임프의 측면에서 날아오듯 덮쳐 거대한 이빨로 물어뜯는 그것은 늑대였다.
창백한 푸른빛을 발하는 반투명한 늑대였다.
선두 임프가 습격당하는 동안 다른 임프들은 악마다움을 여실히 발휘했다. 급격한 상황 변화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늑대를 뛰어넘어 다시 소년에게 덮쳤다. 그 순간, 늑대의 뒤를 따라온 거대한 검은 형체에서 무언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건 하얀 피부와 적색 눈, 그리고 긴 흑발을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많아 봤자 소년과 동갑처럼 보이는 그녀는 임프의 손목을 거칠게 잡은 뒤 덤벼들던 관성을 역이용하여 뒤로 구르며 발로 걷어찼다. 재질을 알 수 없는 하얀 망토가 휘날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임프를 검은 형체가 달려와 덮쳤다.
촤아아아악—!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검은 형체는 설화 속 전설의 기사나 타고 다닐 것 같은 장엄한 흑마였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건 하얀 망토를 두른 채 검을 휘두르는 건장한 사내였다. 그 왼손에는 본 적 없는 남색 수정구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임프는 저자의 검에 베였다.
악마가 검에 베였다. 착각한 게 아니었다. 두 동강이 난 임프는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땅에서 꿈틀거렸다.
“악마를…… 베었어…….”
소년은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반쯤 누운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흑마를 탄 남자와 아름다운 소녀는 그 앞을 가로막았다. 이 보호가 너무나 당연한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처럼.
그것은, 소년이 보기에 너무나 기사다웠다.
“리리.”
“응.”
말 위에 탄 남성은 여성에게 시약병 하나를 건넸다. 그곳에는 병에 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는 광채가 담겨 있었다.
여성은 시약병의 뚜껑을 열어 전방으로 흩뿌렸다. 마침 달려오던 세 마리의 임프가 그 광채를 보며 기겁한 뒤 뒷걸음질 쳤다. 한 마리는 그것을 뒤집어쓰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부정한 영혼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풍겨 왔다. 병 안에 담겨 있던 게 신성력이라는 건 바보가 봐도 알 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성력을 병 안에 담는다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두 마리의 임프가 주춤하는 사이, 얼굴이 반쯤 타들어 간 임프는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팔 하나를 못 쓰게 되었음에도 손톱을 길쭉하게 내밀며 포효했다.
“캬르르르륵—!”
그게 명령이라도 되는 듯, 세 마리의 임프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흑마 위에 타고 있는 남자는 그 모습에도 그저 검을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임프가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루디나ludina.”
백 년은 넘게 산 대마법사에게서나 간신히 들을 수 있는 발음의 룬이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터지는 강렬한 섬광. 순간 시야를 잃은 임프들은 그러면서도 달려오는 걸 멈추지 않았고, 흑마의 앞발에 매달려 손톱을 휘둘렀다.
“크르르릉—!”
흑마는 말이 낼 수 없는, 맹수와 같은 소리를 내며 앞발을 들어 임프들을 찍어 눌렀다. 땅이 부서져 파편이 튈 정도로 강대한 힘. 두 마리의 임프의 머리가 깨져 꿈틀대었으며, 뛰어들던 임프는 다시 검에 베였다.
그 어떤 기술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쩌면 조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검격. 하지만 그 일격에 임프는 다시 두 동강이 났다.
나머지 두 마리의 임프들 역시 살아남을 수 없음은 당연했다.
임프들의 상태를 확인한 뒤, 남자는 비로소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무력하게 뒤로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치심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웅장한 흑마 위에 탄 채 하얀 망토를 뒤집어쓴 사내. 광대 쪽에서 입술까지 흘러내리는 곱슬머리 뒤쪽으로 보이는 눈빛은 방금까지 악마를 베어 낸 자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심했다.
그의 검술은 어떻게 보면 조잡해 보였다. 아니, 아예 기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과거 기사도를 다룬 소설에 담긴 주인공 스승의 대사를 떠올렸다.
‘경지에 오른 자는 기술이 필요가 없는 법이다.’
자신이 위기에 빠진 걸 알고 거뜬히 구하러 왔다는 사실은 그가 기사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길들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난폭한 흑마를 타고,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처럼 룬을 다루고, 태양빛을 병에 담고, 유령을 제 종으로 부리며,
검으로 악마를 베는 기사.
이 풍화의 시대에, 제국마저 몰락하고 검은 태양이 떠오르며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이 시대에 그런 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단 한 가지의 사실 말고는 떠올릴 수 없었다.
“……황금의 기사.”
소년의 친구들은, 아버지는, 심지어 학교의 선생님마저도 그 책을 어린아이나 읽는 유치한 삼류 소설이라고 칭했었다. 아직도 그걸 믿는 탐험가 소년을 철없는 애 취급을 했다.
소년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보답을 받았다.
눈앞의 남자가 그 기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소년의 눈에는.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