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
18화 – ep.7 버뮤다 숲, 사냥 (3)
기생체는 정면으로 맞붙어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백 년을 수련에 매진한 엘프 수도승 수준은 되어야 간신히 시도할 수 있다고 취급되었으니까.
리리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숲에 기생체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순간, 강선후가 완전히 미쳐버린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가 지배자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상이란 제 주인의 성향, 그리고 격(格)을 대변할 뿐 강함을 대변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딱히 지배자를 타고났다고 해서 강한 힘까지 뒤따르는 건 아니라는 것.
그런데.
쿠웅—!
지금 이 순간 강선후는 서 있고, 기생체는 비틀거렸다.
반쯤 쓰러진 기생체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투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리리는 기생체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리리는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지금, 당황한 저 괴물의 시야가 흔들리고, 몸의 중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 순간, 지금 덮친다면···!
하지만 강선후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생체가 자세를 잡느라 꿈틀거리는 두 번째 기회마저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왜?’
리리는 저도 모르게 탄식할 뻔했다. 좋은 기회가 아니었던가? 기생체가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능력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강선후를 바라봤을 때.
바스락—
강선후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고, 그 뒤의 빽빽한 덤불이 흔들리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리리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신카 소왕국은 1년의 절반이 겨울인 곳이었다.
바로 뒤편에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노미나 산맥이 지나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눈 검치호’라는 맹수가 살고 있었다.
그 맹수와 처음 마주친 날, 리리는 의문을 품었다.
새하얀 털과 딱히 위협적이지 않은 이목구비.
맹수의 기본은 갖추었으나 상위 포식자라 불리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이는 체구.
아버지와 자신을 마주치자마자 경계하다가는, 숲속으로 몸을 감춰버리는 약하기 그지없는 투기.
“아버지. 솔직히 실망스러워요.”
“그렇게 생각하느냐?.”
“차라리 아버지가 더 맹수 같아요. 아버지한테는 늑대의 상이 보이거든요.”
이야기 속에서 최상위 포식자는 언제나 용사의 라이벌이었고, 그 싸움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투쟁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설산 하나를 지배한다는 포식자의 실체가 고작 저 정도라니.
“눈 검치호의 주식은 설산 매머드라고 하셨잖아요. 근데, 딱 봐도 설산 매머드가 더 강해 보이는걸요.”
“같이 가자꾸나.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
안드레이 신카는 리리를 데리고 높은 바위를 올랐다. 그러자 눈 덮인 침엽수 숲이 한눈에 보였다. 그곳은 설산 매머드의 안식처였다.
“···검치호가 설산 매머드를 노리고 있네요.”
아버지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검치호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설산 매머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잘 보고 있거라.”
아버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검치호는 선 채로 얼어 죽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 한순간의 미동도 없었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눈을 매머드에 고정했다.
시간이 흘렀다. 리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한나절이 가까이 지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눈 검치호는 같은 자세 그대로 단 한순간의 미동도, 경련도 없이 멈춰 있었다.
설산 매머드가 안전을 확신한 뒤, 잠을 청할 때까지.
이상함을 느낀 건 그 시점이었다.
“···고작 짐승이 저렇게······.”
한낱 짐승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집중력, 그리고 인내.
마침내 결단의 순간.
눈 검치호는 매머드를 습격하는 그 순간에도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수 시간의 인내가 끝나고 찾아온 기회에 환희할 법도 한데,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매머드의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오오오!”
허나 매머드 성체를 제압하기에 검치호의 덩치는 너무 작았다.
목덜미를 물린 매머드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그 거대한 상아와 코를 휘둘렀다.
검치호는 다시 숲속으로 몸을 감췄다.
분노에 가득 찬 매머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해가 져버려서 어두워진 밤. 매머드의 시력은 이 어둠을 꿰뚫을 수 없었다.
검치호는 아니었다.
검치호는 다시 매머드를 덮쳤다. 그리고 몸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 또다시.
출혈에 매머드가 비틀거리고, 자신의 턱 힘만으로 그것을 묶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쿵—!
끝내 매머드는 스스로 쓰러졌다.
“이해하겠느냐.”
“···네.”
신카 가문의 가주, 안드레이 신카는 자신의 딸이 가진 총명함에 뿌듯함을 느꼈다.
“태생에 얽매이지 않고, 규칙에 순응하지 않고, 극복하고, 이용하고, 끝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것.”
“과정에 눈이 멀지 않는 것. 작은 걸 탐하느라 더 큰 목표를 잊지 않는 것.”
“즉, 끊임없이 절제하는 것.”
“포식자의 자격은 오히려 여기에 있는 거란다.”
***
강선후는 기생체가 비틀거리는 순간, 리리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 때 오히려 덤불 속으로 몸을 감췄다.
촤아아악—!
동시에, 흥분한 기생체가 이성을 잃고 팔을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노랗게 시든 근처의 풀과 나무가 속절없이 잘려나갔다. 어마어마한 예리함이었다.
신경이 손상된 기생체더라도 팔을 움직일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전히 위험한 상태였다.
강선후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엿보이는 승리의 순간에 흥분하지 않았다. 조급함이란 없었다.
흥분한 건 오히려 그걸 지켜보고 있었던 리리 자신이었다.
노미나 산맥의 한 영역을 지배한 눈 검치호와 강선후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리리는 난쟁이들이 눈 검치호를 ‘설산의 포식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
싸움은 계속되었다.
펑, 퍼펑, 펑—
여기저기에서 불꽃과 굉음이 튀기 시작했다. 잔뜩 흥분한 기생체는 신경이 끊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이 소리는, 강선후가 덫과 함께 여기저기 설치해둔 폭죽이었다.
강선후가 빠르게 숲을 가로지르는 소리인지, 폭죽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기생체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크오오오오—!”
그 순간, 연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연기.
뒤늦게 무언가를 눈치챈 기생체는 칼날을 휘둘렀지만.
촤아악!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강선후가 더 빨랐다. 강선후는 그 목을 베었다.
물론 기생체의 급소는 머리가 아니었다. 강선후도 그걸 알고 있었다. 다시금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며 리리는 정신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사라지기 직전, 그 입에 물려 있는 궐련을 보았다.
“꿈의 악마.”
강선후는 그 꽃으로 궐련을 만들었다. 서방에서 내려져 온다는 연금술인데, 그걸 어떻게 한낱 인간이 알고 있을까?
벼랑 끝까지 몰린 기생체는 아무렇게나 칼날을 휘둘렀다. 허나 움직일수록 출혈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
“키이이······.”
그 칼날 팔 중 두 개로 스러져가는 몸을 지탱했다.
강선후가 기생체의 목숨을 끊은 건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이건 전투가 아니었다. 사냥이었다.
강선후의 등 뒤에서 야성을 뿜어내는 상(狀).
리리는 그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 인정했다. 착각할 여지가 없이 저건 포식자의 상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 리리의 마음속에 들어찬 감정은 반가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지배자의 상은 선함과 관계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필히 악함이 딸려오는 상도 존재했다.
포식자는 어떨 것인가? 저런 천성을 가지고 있는 영혼은 어떤 성향을 품고 있을 것인가?
“메에에—.”
그 순간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원형으로 잔뜩 시들어 있는 숲의 중심.
그곳으로 새끼 숫양이 천천히 다가왔다. 붉은 털에, 상처투성이.
‘이 숲의 영물이야.’
숲마다 하나씩 사는 영물이었다. 엘프들은 저 동물을 ‘숲의 화신’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숲 그 자체인 동물이기 때문이었다.
“메에에——.”
새끼 숫양은 처량하게 울며 천천히 강선후에게 다가갔다.
강선후는 기생체의 피로 온몸이 젖어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고, 짐승 같은 눈빛은 평소와 너무 달라서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강선후는 왼손을 들었고.
턱——
그대로 숫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겠네. 별 개 같은 게 파고들었어. 그치?”
“메에에—.”
어느새 포식자의 상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강선후의 등 뒤 허공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즉, 끊임없이 절제하는 것.」
「포식자의 자격은 오히려 여기에 있단다.」
영혼의 상이 사라졌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포식자의 상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는지는 애초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 인간은 절제의 미덕으로 자신의 천성을 기꺼이 억누르는 자였다.
“······.”
리리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강선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크게 외쳤다.
“리리!”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리리는 화들짝 놀라 나무에서 떨어졌다.
버뮤다 숲은 그런 리리를 조심스럽게 받아 내렸다.
강선후는 리리를 바라보더니,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치료해주자.”
“······.”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의미는 알 수 있었다.
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갔다.
***
“하아······.”
요원들은 엉거주춤 선 채 넝쿨로 뒤덮인 숲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었다. 고치의 우화 예정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우화했을 수도 모를 일이었다.
“상황실.”
[여기는 상황실.]“숲에 진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혹시 연구 자문팀의 조언을 구할 수 있는지?”
“C4로 넝쿨 벽을 훼손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피드백을 예상할 수 없어요. 그 넝쿨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OWIC내에서는 이미 숲이 ‘단일 생물체’의 생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그마저도 최근 몇 연구원의 입에서 나온 주장이었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았다.
대체 저 덩굴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장 지휘자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쿠그그그그—.
“···어.”
넝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얽혀있는 걸 풀어내며, 땅속으로 천천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상황실! 넝쿨이 사라지고 있다!”
[확실한지.]“확실하다. 진입 재허가 요청함.”
답변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진입 요청 승인, 방어적으로 행동할 것. 조금만이라도 변칙 현상을 느낀다면 바로 후퇴한 뒤 상황을 더 지켜보도록. 더 이상 요원을 잃을 순 없다.] [추가적으로, 버뮤다 숲 내에 민간인이 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음. 염두에 두고 작전 진행 바람. 이상.]민간인?
잠시 주춤했으나, 지휘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에는 의문을 가지면 안 되는 법이었다.
“수신 확인. 다 들었지.”
지휘자의 말에 전 팀원은 다시 태세를 갖췄다.
그리고는 작전 지역 앞으로 모여들었다. 안전거리는 충분히 확보했다. 넝쿨이 완전히 사라진 뒤 진동이 멎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넝쿨이 땅속으로 사라졌고.
그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하고 끔찍한 파충류의 시체였다.
“앗!”
“씨르thir.”
찰칵.
“···?”
한 요원이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은 반응하지 않았다.
“긴장하신 건 이해하는데요. 누군지 확인은 하고 땡깁시다.”
시체가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시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강선후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우선 이 뒤에 있는 분들부터 챙길래요? 좀 무거운데.”
강선후의 허리에는 넝쿨로 된 밧줄이 묶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밧줄에 굴비처럼 엮인 채 무언가에 실려 끌려오는 인간들.
“···! 통신병! 상황실에 보고해!”
“네!”
이전에 실종되었다던 R&D본부의 특무부대였다.
***
진서연은 생체감지기를 동원하기 위해서 잠시 상황실에서 자리를 비웠다.
이곳에 있는 건 총지휘자, 그리고 현장 데이터 분석을 맡은 정지훈과 몇 명의 통신병 뿐이었다.
[상황실.]예상보다 현장에서의 연락이 빨리 도착했다.
역시 진입에 실패한 걸까?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걸 상황실 모두가 예견했지만, 여기저기서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상황실.”
[상황 종료 알림.]“···?”
[전원 생존, R&D본부 소속 특무부대 전원 구출.]“대체 무슨 말인지?”
[민간인이 타겟으로 추정되는 개체의 시신과 실종자들을 확보, 버뮤다 숲에서 빠져나옴.]“···?”
정지훈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강선후.
그 이름을 떠올리긴 했으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가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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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7. 버뮤다 숲, 사냥.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