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ep54. 검은 피라미드 (1)
리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검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도이나 신카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고귀한 모습으로 작은 의자에 앉아 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는 언제나 어머니를 닮고 싶어 했다. 신카 영지만이 리리의 모든 세상이던 시절, 어머니는 세상 그 무엇보다 고귀한 존재셨다. 때로는 완고하게, 때로는 온화하게 영지민을 다루던 그녀는 최소한 리리가 보기에는 성군이셨다.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멋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리를 지나쳤다. 리리는 홀린 듯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신카의 저택 꼭대기부터,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까지 향했다. 리리는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구역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 그녀는 어둠을 두려워했다.
계단이 끝나고, 조명 하나 없는 긴 복도가 이어졌다. 도이나 신카는 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리리는 그곳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어둠을 두려워했기에 단 한 번도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저택을 떠나 세상을 방랑하던 그 고통스러운 시절마저도.
하지만 언제까지 두려워할 수 없었다.
리리는 두려움을 이기는 법을 배웠다.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삶이란 그릇에 거뜬히 담아내는 이와 같이 여행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처럼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자 마음 먹었다.
리리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이 그녀를 감쌌다.
그 복도 끝.
나무로 된 문에 달려 있는 커다란 황동 자물쇠를 보았다. 리리는 목에 걸어 옷 안쪽에 넣어 뒀던 황동 열쇠를 꺼내서 바라보다가 자물쇠에 넣었다. 톱니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손을 타고 넘어오고, 최후에는 딸깍 소리를 내며 열쇠는 끝까지 들어갔다.
“…….”
리리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는 천천히 돌렸다. 저항감이 느껴지다가는 어느 선을 넘어가는 순간 휙 돌아가는 열쇠. 딸깍 소리가 나며 끝내 자물쇠는 풀렸다. 문이 열렸다. 안쪽에는 천장의 어딘가에서 원기둥으로 떨어지는 희미한 빛이 있었다.
그 빛 한가운데에서는 도이나 신카가 리리를 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그 왼손에 들려 있는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새하얀 가면에는 웃고 있는 입과 쭉 찢어진 눈이 묘사되어 있었다.
‘비열한 자의 얼굴’이라는 이름을 가진 얼굴.
역사 속 가장 비겁했다는, 그 비루한 역할을 자처했다는 어떤 자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가면.
도이나 신카는 가면을 살짝 옆으로 치웠다. 붉디붉은 눈동자 하나가 리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문의 숙명.”
도이나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차가웠다. 얼어붙은 용암이 여전히 붉은빛을 발하며 피부에 닿는 느낌이었다.
“그걸 위해서 소중한 걸 포기할 수 있니? 나의 딸아.”
리리는 입을 열었다. 긴 생각이 있고 난 후였다.
“…….”
눈을 떴다. 베개에 파묻힌 얼굴을 그대로 둔 채 붉은 두 눈만 깜빡거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베개 위로 펼쳐 뒀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꿈을 떠올렸다. 희미하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로 선명한 꿈. 리리는 그 내용을 되새겼다. 끝에서 어머니가 쓰고 있던 가면과 어머니가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꿈의 대부분이 선명했다. 떠오르지 않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했었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리리는 일어나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동공에 붉은빛이 일었지만 자신의 영혼은 보이지 않았다. 로얄 블러드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볼 수는 없었다.
“…….”
자신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우당탕— 쿵탕—!
2층에서 일어난 진동 소리가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리리는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자신이 이 소리를 듣고 깬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드르륵—!
리리는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있는 나이프를 꺼낸 뒤, 잠옷 차림 그대로 문을 벌컥 열어 달려 나갔다. 복도에서 왼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강선후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2층에는 이미 하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열린 방 안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검은 태양을 가둬 둔 방이었다. 중요한 건 그 방이 열려 있다는 사실.
리리가 그곳으로 서둘러 달려가기에는 충분한 이유였다.
“잠시만요!”
그 앞에 모여 있던 하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물론 숭배자가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묶여 있는 건 아니지만, 아직 그에게서 제대로 된 정보도 얻지 못했는데 탈출을 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룬 사용자다. 만약에 우리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
숭배자의 얄따란 발목을 붙잡고 있는 강선후, 그리고 반쯤 몸을 거꾸로 한 채 땅에서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있는 숭배자의 모습이 보였다.
리리는 맥이 풀려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 혈압이 급속도로 내려간 탓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에서 맴도는 아주 미약한 연기 탓일지도 몰랐다. 리리는 이제 환각을 일으키는 이 연기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신 여기서 뭐 해.”
“어…….”
강선후는 몸을 일으켰다. 발목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을 풀지 않았기에 질질 끌려가는 숭배자는 고함을 질렀다.
“감히 이 몸을!”
“아, 미안.”
강선후는 쥐고 있는 발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리리를 바라본 뒤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취조?”
“내가 일 있으면 혼자 싸돌아다니지 말고 나한테도 말하랬지.”
“오, 리리 방금 진짜 무서웠어.”
“그렇다면 참 다행이네! 나는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생기긴 했지.”
강선후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리리의 시야가 넓어졌고, 비로소 이 방 안에 생긴 현상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었다.
숭배자의 뒤쪽 허공은 찢어져 있었다.
“……차원문.”
리리는 저것을 본 적이 있었다.
비프로스트가 작동했을 때 열리는 문이 저 빛깔을 띠고 있었고, 강선후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차원문이 저런 형태로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강선후도 몸을 일으키며 그 균열을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에 예고도 없이 균열에 빨려 들어갔다고 말했었지?”
“……응.”
“그게 이렇게 생겼었어.”
강선후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균열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시간이 지나며 점점 닫히고 있었다.
“저기…….”
잠시 균열에 정신이 팔린 사이,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하인 하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몸을 덮으세요.”
리리는 자신이 얇은 잠옷 차림 그대로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하인에게 감사를 표하며 담요를 둘렀다.
* * *
“방금 차원문은 뭐야?”
“……검은 태양의 힘이다.”
“용도는?”
“비프로스트와 같다. 미리 설정된 도착지로 이동하는 것.”
“그거 목적지는 어디였어?”
“……동굴.”
“너랑 나랑 처음 만났던 거기?”
오른손의 흑염룡은 이제 슬슬 자포자기할 생각이 들었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잠시 미뤄 두었던 이런저런 심문을 했다. 너희들이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게 사실이냐. 정말로 제국 본성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냐 등등.
흑염룡은 내 말을 듣고 오히려 노발대발했다.
“내가 그딴 짓이나 하려고 세상에 올라온 줄 알아!”
오히려 그런 짓을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는 투였다. 반응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실 맨 처음에도 그저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했지.
나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희들은 검은 태양을 숭배한다고 했지? 그러면 혹시 그림자 존재처럼 검은 태양이 뜰 때만 현실에 나올 수 있는 거야?”
“그렇다. 나는 어둠 속에서 혁명을 추구하는 자다.”
그러더니 갑자기 또 비릿한 미소를 짓는 녀석.
“오랫동안 빛의 율법 속에서 물러진 세상을 치유하는, 어둠의 율법을 불러오는 선지자…… 그게 우리 모두를 이롭게 만드는 방향이 될 터이니, 그대, 어둠의 힘을 아는 자여. 그대가 가지고 있는 힘은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그 본래 모습을…….”
“그러니까 검은 태양이 뜰 때만 너희들 유적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거지?”
“…….”
“검은 태양이 지기 전에 모든 용무를 끝내야 한다는 말이네.”
잔뜩 분위기 잡고 있는 녀석이 템포를 잃었는지 조금 멍청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궁금증이 해결된 시점에서 이젠 별로 물어볼 게 없었다. 녀석도 검은 피라미드에 대해서는 딱히 나보다 더 아는 건 없어 보였다. 자꾸 어둠이니 뭐니 이상한 수식어만 붙여서 말을 길게 늘어뜨릴 뿐.
……솔직히 말하면, 아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굳이 생각해 보면 얘가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굳이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쥐어 짜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입을 억지로 벌리게 하는 건 취향이 아니다.
몸을 일으키고 리리를 바라봤다. 얘 역시 괴상한 눈으로 미스터 흑염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 희한한 놈을 다 보겠네.”
평소 어투가 얌전한 리리를 생각해 봤을 때 저건 퍽 과격한 비호감 표현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내 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던 올리버와 아멜리아, 그리고 엘리엇은 내 심문이 끝난 듯하자 비로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떠나야죠. 내일 새벽에 바로 떠날 생각이에요.”
물론 새벽이란 내 타이머에 의지한 기상 시간이다. 검은 태양이 떠 있을 때는 하루 구분이란 게 별로 의미가 없으니.
엘리엇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연맹원들과 함께 대수림으로 인도해 드리겠소.”
“대수림이요?”
“제국 서쪽에 있는 숲이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터라 고대의 대수림을 연상시켜 그런 이름이 붙었지.”
나도 모르게 남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이곳에서부터 서남쪽, 하늘 높이 고개를 든 꽃이 여기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보일 지경이었다. 세계수의 싹이 얼마나 큰지 체감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 제국 쪽 사람들은 저 꽃의 정체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세계수가 꽃의 형태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나는 그렇게 한동안 세계수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진짜 대수림을 보신 적 있으세요?”
“그건 전설 족의 존재잖소? 엘프들이 동경하는 미지의 곳이지.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만. 어, 왜 웃소?”
“아니에요. 내일 출발 시간에 맞춰서 준비 끝내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올리버가 나서서 말했다.
“귀인께서는 뭘 하실 생각이세요?”
“여행 준비.”
연금술 물약 제조, 자재 준비. 이거 말고 할게 뭐 있겠어.
* * *
세계수의 싹에서 본 풍경, 그리고 탐험가 연맹이 알고 있는 지식을 종합하자 꽤 쓸만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우선 서쪽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대사막이 존재하고, 그건 계속해서 넓어지는 중이라고 한다.
“제국 서쪽의 대수림이 그 사막의 영향에서 우리를 보호하지.”
그 말을 들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사막이 아무리 멀더라도 어쨌거나 그게 있다면 이곳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황사가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듯.
하지만 이곳에서는 모래 먼지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풍이 부는데도 말이다.
서쪽의 큰 숲이 공기 필터의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거였다. 사막의 확장을 막아 내기도 할 테고.
어쨌거나 다음 행선지가 사막이라면 제대로 준비를 해야만 했다. 물은 내가 룬으로 직접 만들 수 있으니 걱정은 덜었지만, 우선 사막의 고열을 리리가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전에 파도치는 사막에 갔을 때도 리리는 내내 태양빛과 화상에 시달리느라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때도 준비를 꽤 해 갔는데도 말이지.
나야 피부 좀 타도 상관없지만 리리는 아니다. 아픈 티를 잘 안 내길래 신경을 미처 못 썼는데, 강한 태양빛에 노출된 뱀파이어의 피부는 무시 못 할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듯했다. 이런 건 통상적인 뱀파이어 고정관념이랑 일치하는 부분이 있단 말이지.
나는 그래서 지구의 썬크림과 독성을 중화시키는 이계의 약초를 섞어 리리도 사용할 수 있는 자외선 차단제를 만들어 냈다. 간단한 건데 생각보다 재료도 많이 쓰고, 시간도 써야만 했다.
“끈적거려.”
시험 삼아서 리리의 이마에 발라보았다. 이전에 썬크림을 썼을 때와는 다르게 확실히 거부 반응이 없었다. 이제부터 햇빛이 뜨거우면 바르라고 튜브에 담긴 걸 넘겨줬는데, 깨작거리면서 제대로 못 바르길래 결국 내가 듬뿍듬뿍 발라 줬다. 이런 걸 발라 본 경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대수림’이라는 이름은 가짜지만, 그 이름에 버금갈 만큼 커다란 숲이었다. 좌우로 펼쳐진 숲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며, 동쪽에서 시작된 강이 그 숲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엘프 사제가 오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뒤에서 올리버가 말했다.
“엘프 사제요?”
“숲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건 특별한 허락이 필요하니까요. 아실 텐데요.”
알긴 한다.
그게 나한테 필요 없을 뿐.
나는 숲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떠한 거대한 에너지가 흐르는 게 느껴진다. 리리는 그게 숲의 영혼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숲이 나를 싫어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조용히 그곳에 시선을 맞추고, 숲과 교감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숲의 목소리이며, 감정이다.
나는 그 소리에 조용히, 그리고 충분히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실례할게.”
숲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실제로 그런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그저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신중하게 숲의 경계선을 넘었지만, 숲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있는 풀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미소가 지어졌다.
“……허.”
뒤를 돌아보자 탐험가 연맹의 사람들이 각자의 표정을 가지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탄성은 엘리엇이 낸 것이었다. 나머지 둘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내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황금 시대에 왕을 도와줬다는 탐험가가 있소. 우리는 그의 의지를 이어 가는 단체고.”
“얘기해 줬잖아요?”
“그 탐험가는 숲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들을 친구 삼으며 온 세상을 누볐다고 하더군.”
“즐거웠겠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숲 속을 바라보았다.
“읍읍읍!”
렐릭시나 옆에 매달려 있는 미스터 흑염룡이 꿈틀거렸다.
……아는 게 많으니 놓고 갈 순 없더라. 물론 최대한 편의를 봐줬다. 모포에 둘둘 말아 묶인 신세지만 그렇게 불편하진 않겠지.
……아마도.
“출발하자.”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공기가 떨리는 듯한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천정(天頂) 위치해 있던 검은 태양이 검붉은 광채를 희미하게나마 발하기 시작했다. 시꺼먼 안쪽에 비해서 조금이나마 붉게 타오르던 테두리가 부풀어 오르는 듯하더니, 검은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그건 하늘의 표면을 타고 서쪽으로 쭉 흘렀다. 유리돔 안에서 외부에 부딪힌 빗방울을 보면 딱 저런 움직임일 거다.
그렇게 서쪽 지평선으로 물방울이 사라진 뒤, 다시 검은 피라미드의 신기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뭐 어때?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잖아.
나는 렐릭시나의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대수림이라고 이름 붙은 숲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