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ep54. 검은 피라미드 (3)
리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기랑 제국이랑은 장벽으로 나눠진 곳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데 제국에선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
리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눈빛이었다.
“……당신 생각대로 정말로 로얄 블러드가 한 명도 없는 거야?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걸 발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역시 내 생각이 맞았던 거다. 제국에는 지금 로얄 블러드가 단 한 명도 없다.
이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지.
……로얄 블러드를 정말로 싫어한 누군가가 숙청 같은 일을 버리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말이지.
나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가 사막을 한 번 쭉 훑어보았다. 확실히 이상하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갑자기 사막이 시작되어 버리는 것도, 강 하류에 다다라 가장 영양분이 많은 구간에서 풀 한 포기 발견할 수 없는 것도.
나는 다시 이계에서 지내던 시절의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이계.
변화에 익숙해져 신경 쓰지 않게 되면 목숨을 잃는 곳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이계의 사람들이나 지구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든, 나한테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이건 굉장히 이상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조급함 때문에 더 큰 걸 잃어버릴 수 있다. 바둑을 둘 때 잘못된 수를 놓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는 것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문제를 깨닫고 후회할 수 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리리와 신도가 신기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왜?”
“아니, 당신 가끔 그런 눈을 할 때마다 신기해서.”
리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뭔가가 바뀌는 건가?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니 우선 결정한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여기? 숲의 경계선에서?”
리리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조작하며 말을 이었다.
“열세 시간 휴식이야. 이번에는 오래 쉬는 대신에 이것저것 조사할 거야. 식량을 구할 방법은 있는지. 혹시 모를 맹수에게 쫓길 가능성이라든가…….”
그렇게 말하며 사막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에 있는 놈이 얼마나 귀찮게 할지 생각도 좀 해 보고.”
물론 많은 걸 알아낼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여기에서 하룻밤 지내는 것만으로 대단한 걸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하지만 이 잠깐의 여유가 결과적으로 내 목숨을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신중함이란 건 사소한 것에서 열쇠를 찾는 행동을 말하거든.”
리리는 내 의도를 이해하고는 바로 야영을 준비했다.
사막 저편에서 우리가 피운 모닥불이 보이지 않도록, 캠프는 조금 안쪽에 펼쳤다.
이날 처음으로 미스터 흑염룡이 넌지시 야영 준비에 손을 보탰다.
* * *
타닥, 탁—
리리는 눈앞을 아른거리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근처 강물로 씻은 뒤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끝냈다. 강선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등을 보인 채 꼿꼿한 자세로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 사람은 자주 그랬다. 강선후와 리리의 여정은 매번 길었고, 함께 보내는 밤은 많았다.
강선후는 하루 일과가 끝난 뒤 불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거나, 오늘 겪은 일에 대해서 리리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이건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간혹, 아니 간혹이라고 말하기에는 생각보다 자주, 밤새 눈을 감고 저렇게 앉아 있고는 했다. 리리는 처음에 몽유병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는데, 심심치 않게 동이 틀 때까지 저 행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저 행동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건 학습이었다.
— 그날 배운 걸,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리리가 생각하는 강선후의 특별함은 룬을 사용하는 것도, 겁이 없는 것도, 지배자의 상을 타고난 것도 아니었다.
그 학습 능력.
당일 배운 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
그날 겪은 일을 되새기고, 자신이 한 행동을 복기하고, 때로는 후회하고 교정한다.
강선후는 밤마다 혼자 앉아 그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마을의 자신의 집에서 쉴 때도 간혹.
리리는 시간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근간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게 재능과 태생인 줄 알았다. 특별한 선택을 받으며 태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어쩌면 이 사람은 완전히 평범할지도 몰랐다.
태어나서부터 타고난 게 아니라 밑바닥부터 시작해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얻은 능력들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정말 평범한 인간이 타고남 없이, 정진하는 것만으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가?
설마…….
그 순간이었다.
“루디나ludina.”
강선후의 눈앞에 섬광이 터졌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숭배자가 눈을 번쩍 뜬 뒤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이어서 바로 외었다.
“모로스moros.”
섬광이 허공에 고정된다. 최초 발생보다는 희미하지만 검은 태양보다는 밝은 빛의 씨앗.
강선후는 어느새 눈을 뜬 채 그 빛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이곳의 분위기가 내려앉고 있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빛이 조금씩 움직였다. 원을 그려 나가고,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도 했고, 무아지경의 화가가 붓을 휘젓는 것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그 경로를 따라 빛의 꼬리가 남았다. 강선후는 지금 빛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건 룬 문자였다.
강선후는 지금 룬을 연구하고 있었다. 모래와 흙, 바위와 나무, 모닥불밖에 없는 이 공간 속에서 강선후 홀로 룬과 책장으로 가득 찬 연구실 속에 있었다.
리리와 숭배자는 가만히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둘의 표정은 상반되어 있었다.
리리는 그저 편안하면서도 신기한 표정이었으나 숭배자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 * *
열세 시간 뒤 짐을 다시 챙겨 떠났다. 휴식 시간 내내 끊임없이 밀라milla를 연구하느라 바빴지만, 그사이에도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이곳에서 나를 위협한 생물은 없다는 것.
사실 생물의 흔적을 아예 발견하지 못한 수준이라서 조금 거슬렸지만, 사막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다. 사막의 생물들은 모습을 감추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이것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악마 말이야. 우선 지금은 크게 위험하진 않은 것 같아.”
『연금술사의 시약병』
“우리 지난번에 만난 악마들이 뭐였지?”
“임프?”
“그래. 걔들은 저 밑에 있는 놈보다는 형편없잖아?”
선악과의 영혼이 들어 있는 병을 들어 올렸다. 임프를 만났을 때는 오히려 격렬하게 반응하던 선악과의 녀석이 여기에서는 얌전했다.
단순하게 생각해 봤을 때는 여기에서 악마의 활동이 더 작고 얌전하다는 의미가 된다.
리리도 내 말을 듣고 다시 동공을 붉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영혼이 있다는 것까지만 보이지 제대로 된 활동성은 모르겠어. 얌전해.”
리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짐을 짊어지고 있는 렐릭시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크릉……?”
“렐릭시나.”
렐릭시나가 그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처음에는 꽤 야성적이었던 그 눈빛에서도 일말의 길들여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작전을 얘기해 줄게. 우리가 만약에 이번 여행을 하는 도중에 이 아래에서 뭔가 솟아 올라온다? 그런데 그놈이 덩치가 뒤지게 크다?”
“…….”
“그럼 나하고 리리 태우고, 흑염룡 양반 입에 물고 미친 듯이 뛰어가는 거야.”
“크릉…….”
리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도망을 친다고 해도, 어디로 도망치려고?”
“그건 그때 생각해 봐야지.”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사치다. 숲속에서 사막을 탐험할지 그대로 복귀할지도 많이 고민했었다.
그 끝에 내린 결론은 이거다.
“가자.”
우리는 렐릭시나 등에 올라타 사막을 가로질렀다. 그다지 뜨겁지 않은 검은 태양 아래였는데도 모래가 머금은 온기가 워낙 대단해서 후끈거리는 건 보통의 사막과 다를 바 없었다. 생각해 보면 지구의 사막은 낮에 달궈지고 밤에 차갑게 식는데, 지금 이계는 뜨거운 낮은 없지만 그렇다고 식을 밤도 없으니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리리의 피부도 이 정도 열기는 잘 버텨 주었고, 나로서도 체력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느낌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고생은 좀 하더라도 여정 중에 병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전반적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거지.
“나는 왜 아직도 묶여야 하는 거냐!”
그런데 흑염룡은 아닌 모양이었다.
……렐릭시나 옆구리에 묶여 매달려 가는 게 썩 유쾌하진 않나 보지?
“왜! 내가 뭘 했다고!”
“어쩔 수 없잖아. 이건 2인승이라고.”
“아니 그게 무슨 개 같은 변명…… 으퉤퉤퉤!”
렐릭시나도 저 목소리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는지 모래를 팍 튀겼다.
조금은 조용해진 상황 속에서 나는 품속의 황금 지침을 꺼내 들었다. 지침은 여전히 서쪽 정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달리는 일만 남았다.
이동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이 사막이 내게 주는 정보를 읽어 냈다. 우선, 가는 길목 모래 속에서 백골이 된 시체를 하나 발견했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조사했다.
리리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이족보행 하는 동물 같은데, 왜 가죽이 이렇게…….”
“눈썰미가 꽤 좋아졌는데? 리자드맨이야.”
나는 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난 생활 전 도시에 살 때, 도시의 사람들이 이 종족과 무역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사람 말은 할 줄 모르는데 미개하게나마 문명화가 되어 있는 종족이야. 도적질을 하기도 하지만, 사막에서 유일하게 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종족이라 동시에 무역 상대가 되기도 했어.”
“무슨 작물을 재배하는데? 사막에서 농사를 짓는단 말이야?”
“거꾸로 자라는 꽃. 뿌리가 하늘로 향하고 꽃봉오리가 땅 아래로 맺히는 꽃이었어.”
“……그런 꽃이 있다고?”
“사막에서 그나마 양분을 구할 수 있는 건 땅 위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나마 정기가 흐르는 땅속이었으니까. 땅 아래로 자라나는 사실 꽃처럼 생긴 기관은 사실 꽃이 아니라 정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표면적을 넓힌 특수한 뿌리 같은 거야.”
“흐음…….”
나 역시 렐릭시나 등 위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건 리자드맨이 굶어 죽지 않게 만드는 수단이었거든? 그런데 얘는 왜 여기에서 죽어 있을까?”
나는 삽을 꺼내서 땅을 조금 파 보았다.
그리고, 이곳의 시체는 한 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이 무리 지어 산다는 걸 알기에 어느 정도 이미 예측은 했었던 사실.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자 여기저기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시체가 보였다.
상단을 운영했을 것 같은 짐수레도 보였다. 물론 바퀴는 보이지 않았다. 사막이니까 바퀴를 운용할 수는 없었겠지.
“전쟁이 났던 걸까?”
리리의 의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뼈에 난 상처가 하나도 없어. 죽은 이유가 치명상 때문은 아니라는 거고, 분포가 넓지 않은 걸 보니까 이들은 한 무리였을 가능성이 높아. 내부 분열의 흔적도 아니라는 거지.”
근처에 있는 짐짝을 조금 뒤져 보았다.
운송 수단은 있지만 정작 가치 있는 짐은 없다. 이런저런 도구들만 있을 뿐. 그것들의 상태는 사체에 비해서 온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매우 가난한 상태였고…….”
나는 땅에 떨어진 뼈들을 들어 보았다.
“사후 훼손 흔적도 찾아볼 수 없어.”
“사후 훼손이라니?”
“시체가 생기면 그걸 먹으려는 녀석들이 분명 있을 거고, 그 녀석들에게 뼛속 골수는 매력적인 영양분이야. 그런데 아무도 골수를 노리지 않았네. 그렇다면 단순히 골수만 먹지 않은 게 아니라 이 시체를 노린 녀석들이 아예 없다는 뜻이야.”
빠각—
뼈를 부러뜨린 뒤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뭔가 살짝 오해했던 리리는 내 행동에 흠칫하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먹는 줄 알았어.”
“내가 무슨 대머리 독수리야?”
눈을 감고 냄새를 맡아 봤다.
우리의 오감 중에서 후각이 맡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있다.
그건 오래 방치된 정보를 해독하는 능력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시각을 월등히 압도하는 감각이다.
“……영양실조, 철분 부족.”
눈을 뜨고 뼈 안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삼투압 흔적인데. 계속해서 식사를 못 하고 물만 마셨다는 뜻이야.”
“……너는 대체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렐릭시나의 등에 우스꽝스럽게 매달려 있는 흑염룡이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탐험가.”
“지금 네가 보여 주는 모습이 탐험가라는 이유 하나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럼 경력이 많은 탐험가라고 생각해.”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