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ep55. 피라미드 탐사 (1)
나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고, 이 사막을 가로지르기까지 했던 고민과 마음속 한편에 남아 있었던 불안이 한 번에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개고생 끝에 완주하게 되는 그 순간, 그때 느껴지는 그런 감정과 비슷했다.
눈앞에 펼쳐진 룬 문자는 입체적이었다. 예전에 바닷속 아틀란티스에서 고래들이 만든 룬 문자도 이런 식으로 입체적이었지.
그 룬 문자 건너편에는 시공간의 틈새 속에 숨어 있던 피라미드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리는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눈이…….”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어떤 룬 문자가 내 눈에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검은 태양 문명 특유의 룬에 대해서 알게 된 뒤 매일 밤을 지새우며 연구했다. 그리고 그 끝에 밀라milla의 첫 번째 비밀을 깨우칠 수 있었다.
“너는 밀라milla에 대해서 이해했는가?”
미스터 흑염룡이 뒤에서 물어보았다. 얘는 나보다 먼저 이 룬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지.
“밀라milla의 첫 번째 법칙, 시공간을 다루는 언어다. 맞지?”
“…….”
흑염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만 봐도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알게 된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 룬이 가지고 있는 힘의 근원은.”
나는 뒤돌아 고개를 들었다.
내 등을 비추고 있는 검은 태양이 유독 찬란하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검은 태양. 그렇지?”
이게 두 번째 법칙이다. 아홉 신 모두의 권위를 빌리는 보통의 룬과는 다르게, 이 룬은 온전히 검은 태양의 권위만을 다루는 룬이었다. 다시 말해 검은 태양이 지상을 비추고 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검은 태양의 빛을 느꼈는가?”
“느끼는 게 아니라 보고 있어.”
“보고 있다고?”
내 눈동자에 새겨진 빛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야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기상청에서 제공하는 인공위성 영상처럼 눈이 닿는 모든 곳에 흐르는 검은 태양의 빛이 보인다. 어느 곳에는 뭉쳐 있기도, 소용돌이치다가는 산란되기도 하며 우리가 사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건 거대한 힘이었다. 이용할 줄만 알면 시공간을 찢거나 이어 붙일 정도로 강력한 힘.
그 아름다운 광류(光流)를 바라보고 있자니 남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뜨니 각막에 새겨진 룬 문자가 비활성화되며 다시 원래의 시야로 돌아왔다. 검은 태양의 광류는 아름다웠지만, 시야를 많이 제한했고, 언제까지고 이걸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공간의 틈새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데 한눈을 팔 수는 없다.
세 개의 검은 피라미드와 거대한 사자상.
모래바람 사이에서 은은하게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그 모습은 잊힌 고대의 문명 그 자체였고, 저럴 바라보는 내 마음이 잔잔할 리는 없었다.
내 조금 뒤에서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있던 리리의 눈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어느 정도냐면, 우리 둘이 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도 다시 피라미드에만 정신이 팔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가자.”
나는 쓰고 있던 페도라의 각을 한 번 다듬고는 말했다.
렐릭시나의 등에 올라타지 않고 걸어서 접근하기로 했다. 말 위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꾸 속도를 내려고 한다. 지금부터는 놓치는 거 없이 찬찬히 살펴봐야만 했다.
우리는 그렇게 걸어서 피라미드에 접근했다.
“모자는 필요 없지 않겠어? 당신 모자 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리리의 질문을 듣고 나는 실실 웃어 버렸다. 리리는 예상치 못한 내 반응에 눈을 끔뻑거리며 당황했다.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아니야. 그냥 모자 쓰고 탐험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니까 그게 웃겨서.”
“……뭔데?”
나는 마침 생각난 김에 가방 속에서 돌돌 말린 채찍을 꺼내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하며 말했다.
“피라미드 탐험에 페도라 모자는 필수거든.”
“……대체 왜?”
“돌아가면 알려 줄게.”
사무실에 스크린하고 빔 프로젝터도 있으니 영화를 보여 주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 * *
우선 적당한 자리에서 80mm 구경의 굴절 망원경을 펼쳐 피라미드의 풍경을 관찰했다. 리리에게도 보여 줬는데, 망원경을 처음 보는 건지 굉장히 신기해했다.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으아악! 뭐, 뭐야?”
내가 망원경 앞에 얼굴을 들이밀자 리리는 거의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 뒤에 나를 찌를 듯이 노려보는 리리의 도끼눈은 사은품이다.
이계에도 망원경은 있을 텐데, 아마 사회랑 동떨어져 살던 리리는 이계에서도 망원경을 써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정찰을 할 겸 굳이 망원경을 조립해서 펴 봤지만, 먼 거리에서 육안으로 봤을 때는 딱히 이렇다 할 특이점은 없었다. 각 피라미드 위에 빛을 잃은 듯한 칙칙한 색의 수정들이 놓여 있다는 것을 빼고는.
출발 전 흑염룡의 속박도 풀어 주었다. 어느 정도 협조적으로 되었으니 그래도 된다고 판단했다. 사실 처음부터 조금 비협조적일 뿐 내게 악의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기도 했고.
우리는 그대로 천천히, 최대한 주변 환경을 경계하며 피라미드에 접근했다. 흑염룡에게 이 피라미드에 대해서 아는 게 있냐고 물어봤지만.
“이건 나도 모르겠군. 자고로 어둠의 유산이란 비밀스럽기에, 간혹 나 같은 어둠의 주민마저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고 의외의…….”
“어. 그래.”
얘는 검은 태양 숭배자들의 역사 같은 건 조금 아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내가 필요한 저 피라미드에 대한 건 본인도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물론 숭배자들과 검은 태양에 관한 이야기도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앉아서 역사 수업이나 받을 때는 아니었으니 미루기로 했다.
어쨌거나 이 피라미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최소한 이 시대에는 내가 첫 발걸음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게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 리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말했다.
“당신이 처음인 곳이 어디 이 피라미드 하나뿐이었어? 새삼스럽게.”
“이건 원래 안 익숙해져. 익숙하면 더 이상 이런 일 못 할 테니까.”
리리는 내 대답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게 원동력일 수도 있긴 하겠어.”
“그렇지.”
우리는 그렇게 피라미드의 영역에 신중하게 다가갔다. 맨 처음 만났던 검은 태양 유적의 경우에는 눈보라를 일으키는 두 개의 수정으로 보호받고 있었으니 이 피라미드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다행히 우리에 대한 거부 반응은 없었다.
각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거대한 수정이 달려 있었다. 이전에 만난 눈보라를 일으키는 수정들과 비슷한 면이 있었고, 그게 내가 경계하게 된 첫 번째 이유였다. 저기에서 막 데스빔이 발사되어서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이건 쫄보가 아니라 신중한 거다.
우리는 그렇게 검은 피라미드 유적에서 가장 가까운 구조물, 거대한 사자상에 근접했다.
높이는 대략 삼에서 사 미터 정도. 길이는 칠 미터가 넘어 보이는 꽤 거대한 석상이었다. 그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자처럼 앉아서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머리는 인간 노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수염이 길게 자란 노인의 형상.
내가 이전에 얻었던 반투명한 조각상에 묘사된 노인과 비슷한 이미지였다.
“무섭게 생겼네.”
리리가 심플한 평을 남겼고 이건 꽤 정확했다. 나는 사자상의 모습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피라미드 앞에는 원래 이런 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멀리서는 잘 몰랐다가 다가오고 나서 느낀 게 있는데, 사자상의 눈에는 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것 역시 피라미드의 위에 있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칙칙한 회색으로 바래 있었다.
“저 수정이 대체 무슨 용도였을까?”
리리의 의문에 나도 조금 생각해 봤다.
“지난번에 만난 검은 태양 유적에서는 저 수정이 활성화된 상태였잖아. 그때 수정은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어.”
“검은 태양의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한 장치다.”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던 흑염룡이 말했다. 이놈이 드디어 쓸 만한 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두 손가락을 들은 뒤 말했다.
“테르마tterma.”
파지직—
내 두 손가락 사이로 약한 전기가 흘렀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정전기와 비슷하게 강렬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건 변함 없지만, 이 정도는 이제 견딜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걸 흑염룡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것처럼,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원이라는 말이지?”
“굳이 비유하자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검은 태양의 기술이란 그렇게 천박한 게 아니지만.”
“이해했으니 됐어.”
“대체 그런 룬은 다 어떻게 사용하게 된 거지? 너는 인간이 아닌가?”
“미스터 흑염룡도 인간이잖아?”
“검은 태양 숭배자는 모두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검은 태양을 섬긴다! 다른 모든 신이 인간을 버렸으니!”
“흠.”
인간이 주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룬을 사용하는 내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하지만 미스터 흑염룡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신이 우리를 버렸다며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성체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타락하는 사람들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과하게 신에게만 모든 걸 기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둘은 정반대에 선 사람들이지만 비슷한 일면이 있거든.
나는 찌릿거리는 손을 턴 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유적지 영역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 역시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리리. 보통 이 정도 되는 유적의 역할이 뭔지 알아?”
“글쎄…… 신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역할을 하긴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무덤이야. 왕들의 무덤.”
“무덤…….”
리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세 개의 피라미드가 둘러싼 영역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피라미드는 정삼각형 지역의 꼭짓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삼각형 영역의 중심부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쨌거나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건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
리리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 말에 동의했다. 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보통 이런 거대한 시설은 왕이나 지배자의 무덤인 경우가 많고, 의외로 이렇게 피라미드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가 잘 없어. 관리 인력이 머물 곳이 필요하지. 그 인력들이 가족 데리고 사는 집도 필요하지. 제사도 지내야 하지. 그 사람들한테 물건도 팔든 주든 보급해야 하지. 그 보급하는 사람들 머물 곳도 필요하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필요한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라미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다 보니까 규모가 큰 주거지의 형태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그렇구나…….”
리리는 내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의 사자상과 세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 그리고 그 영역 한복판의 공터.
너무 허허벌판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가 놓여 있는 공터.
원래 이런 거대한 구조물 근처에 반드시 있어야 할 부대 시설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고대 유적은 세월의 풍파를 받아 많은 부분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검은 태양이 뜨기 전까지는 우리 공간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적이다. 세월의 풍파에서 자유로운 건 당연하잖아?
나는 이 유적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계 장치로 다가갔다. 피라미드 유적 내라고는 하지만, 작은 동네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넓어서 저기까지 다가가는 데에만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게 대체 뭐지?”
홀로 세워진 이 구조물은 다른 것에 비해서 매우 이질적이었다. 삼각뿔 형태의 높이 이 미터짜리 구조물이었는데, 다른 유적과는 달리 석재가 아니라 날렵하게 재련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하늘을 향하는 세 개의 송곳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다른 검은 태양 유적들과는 굉장히 이질감이 드는 양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뿐.
“이건, 황금 유적에서 봤을 법한 기계 장치인데.”
리리의 말은 정확했다. 이 거대한 검은 태양 유적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구조물이 하필 황금 왕국 기술력이 적용된 물건이라는 거다.
나는 흑염룡을 바라보았다. 흑염룡도 굉장히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네 말대로라면 검은 태양 문명은 황금의 왕국이랑 별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그렇다. 그 녀석들은 나약했으니까. 그 녀석들은…… 멋대로 시대를 부풀려 놓고는 풍화의 시대로 몰락하는 걸 막아 내지 못했으니까.”
황금의 시대를 일종의 버블 경제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튼 됐다. 나는 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피라미드를 바라봤을 때는 모르던 사실을 이 구조물을 통해서 알게 된 거다.
“이 유적, 모래에 파묻혀 있어. 여기 봐 봐. 이 부분.”
기계 장치의 아랫부분은 명백히 바닥부가 아니었다. 모래 아래로 더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삽을 꺼내 들었고, 기계 장치 주변의 모래를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래는 그 습성 때문에 아래로 파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금방금방 미끄러져 내려오고 무너지니까.
“씨르thir.”
그래서 계속해서 룬을 사용해서 파 들어가는 주변부를 적시고 다듬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기계 장치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아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은 태양 유적은 침입자에게 명백히 적대적이기 때문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문을 열고 어둠으로 가득한 내부를 바라보고 있자니 흥분과 조급함이 올라오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기계 구조물은 애초에 건물 역할을 할 만큼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는 비좁았고, 딱히 이렇다 할 공간이 있지도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경계심을 유지했고, 마지막에는 트랩 도어를 열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끝내 우리가 만난 건 넓은 공터였다.
비정상적으로 넓은 공터.
“말도 안 되지 않아?”
어느 정도 넓냐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다. 사방으로 막힌 곳 없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공터.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은 정수리가 간신히 닿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런 공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공간임에도 시야에는 제한이 없었는데, 이곳에 따로 광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밟고 있는 바닥은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건너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흠집 하나 없이 투명한 유리.
빛은 그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저 아래에는 새로운 땅이 있었다. 음모론자들이 흔히 말하는 지저 세계와 유리돔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바닥 아래에는 무언가 잔뜩 꾸물거리고 있었는데 이곳의 상대 높이가 너무 높아서 그게 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는 목에 걸고 있었던 8배율 42mm구경의 쌍안경을 들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맞은 뒤 내 눈에 보인 건…….
“……병사들.”
“병사들이라고?”
리리가 눈을 붉히고 아래를 바라봤지만 역시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병사들. 창 하고 칼을 들고 있어. 그리고, 싸우고 있어.”
“뭐랑?”
“악마들이랑.”
무수히 많은 악마.
그들과 싸우고 있는 의문의 사람들. 저들 역시 전부 검은 태양의 숭배자들일 게 분명했다.
그들은 악마를 공격하다가는 악마의 손톱에 찢겨 쓰러졌다.
그러곤, 다시 일어났다.
악마도 마찬가지였다. 창에 찔려 구겨지듯 쓰러진 개체 하나가 다시 일어났다.
악마는 불멸의 존재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들은 인간이 아닌가?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릉——
거대한 진동에 고개를 돌렸다. 이 역시 땅 아래에서 울려 퍼진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 진원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웅크린 거인이었다.
등에 가시가 잔뜩 돋아 있는 거인의 머리와 팔, 그리고 무릎 부분이 보였다.
모두 볼 순 없었다. 그 크기는…… 설명할 수 있는 단어나 은유적 표현, 관용어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정확히 말하면 거인의 뼈였다. 드넓은 유리 아래의 공간마저 부족한 듯 몸을 구기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거인.
그 척추를 따라 돋아난 뿔 하나가 지상 위로 관통되어 있었다.
이 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원한 투쟁.
검은 태양의 숭배자를 공격하는 작은 악마들은 모두 저 ‘거인’의 부하들이었다.
“……최초의 전쟁.”
리리가 먼저 말을 꺼냈고, 나 역시 천 년 매를 만났던 곳에서 봤던 거대한 석상 두 개를 바라보았다.
그 장소의 이름은 최초의 전쟁터였다.
거대한 산맥의 꼭대기조차 그 허리를 넘어서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두 개의 석상은 서로를 공격하는 자세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거인왕 아틀라스였고.
다른 하나는.
우르르르릉—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저것인 것 같았다.
우리를 뒤덮은 침묵 속에서, 내 가슴 편에 매달린 바디캠의 배터리 부족 점멸등만 하염없이 반짝거렸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