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ep56. 몰락한 자들의 망치 – 발칸 셀루니아 (4)
렐릭시나는 강선후의 세밀한 조작 없이도 알아서 최적의 경로와 속도를 유지했다.
강선후는 대악마의 크게 선회하고 있었고, 하나의 도시 만큼이나 거대한 대악마의 상체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돌아가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도시만 한 크기의 존재가 명확한 악의를 내비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공포였다. 악마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지만 강선후는 사소한 감정이 이성을 뒤흔들도록 가만히 두지 않았다. 눈에 힘을 부릅떴고, 대악마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졌다.
활을 잡고 있지 않은 오른손에는 연금술사의 시약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 안에는 어떤 특별한 존재의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선악과의 검은 부분』
이계의 사람들은 이 열매를 그렇게 부르는 듯했다.
그 실상은 세계수가 병들 정도로 오랜 시간 그 정기를 빨아들였던 기생 악마였다. 세계수가 시들 정도의 에너지. 이 안에 담겨 있는 힘의 잠재력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말이 되었다.
강선후가 판단하기에 그건 대악마와 해 볼 만한 힘이었다. 이 힘만 있다면 흑염룡이 밀라milla의 이론을 풀이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 오래전, 그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도 끝까지 선악과를 거부한 이유가 있었다.
선악과가 주는 유혹이란 달콤한 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의 향기에 굴복하는 건 이 악마가 바라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강선후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물론 사용해야겠다는 결론이 나면 그때는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대악마의 울음소리와 함께 짓눌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중력마저 조종하는 건가? 아니면 초월적인 위압감이 일종의 물리력으로 작용하는 거일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악마가 빠르게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괴하게 꺾이는 척추. 애초에 옆구리 쪽에 있었던 강선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몸을 돌려야 했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과 흡사한 움직임이라는 전제 하에나 적용되는 말이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척추가 기괴하게 꺾이더니 그 상체가 돌아가 강선후가 있는 곳을 정확히 향했다.
생각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우선 시약병은 보석으로 만든 뒤 재킷의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검은 연기가 덮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발리흐balligh.”
통제할 수 없고 그다지 쓸 일도 없어서 잘 사용하지 않았던 독립 룬이었다. 곧이어 강선후를 중심으로 불규칙적인 돌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한 바람에 강선후 본인 역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덕분에 몰려오는 연기들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공기의 흐름으로 모든 기운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밀도가 낮아진 기운은 콜드 포레스트의 재생 능력으로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물론 대악마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하늘이 가려져 있었다.
“진짜 무식하게 크긴 하네.”
단순히 대악마가 손을 높이 들어 올린 것만으로 드리워진 어둠이었다. 운동장 몇 개나 되는 범위를 가려 버리는 거대한 그림자. 곧이어 그것은 강선후를 정확히 조준하여 쇄도했다.
너무 컸다. 절대 피할 수 없는 범위. 렐릭시나가 더욱 속도를 내었지만 강선후를 태운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속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 움직임을 따라 대악마의 손 역시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손이 바닥을 내려치기 직전.
“밀라-토리타스milla-toritas.”
렐릭시나의 시간이 가속했다. 대악마는 순식간에 증가하는 그 속도를 예측하지 못했다.
쿠웅—
손가락의 뼈마디 사이로 빠져나오는 강선후, 거대한 충격에 바닥이 뒤흔들리고 모래와 자갈의 폭풍이 해일처럼 일어났다. 악마의 손을 피했더라도 저 폭풍에 휘말리는 것만으로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룬을 해제하지 않고 가속된 속력 그대로 달려나갔다.
완전히 대악마의 손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풀었는데, 그 순간 강선후는 엄청난 현기증을 느꼈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반투명해져 반대편이 보이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밀라milla를 사용하는 대가.
검은 태양 숭배자는 항상 그것을 강조하고는 했다. 강선후도 그런 게 존재할 거 같다고 납득했었다. 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파격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능 있는 수학자들이 수식을 보면 자연스럽게 도형을 떠올리듯, 강선후 역시 룬의 효과를 느끼자 그 원리를 만들어 내는 회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회로.
“……알 것 같아.”
이 순간, 강선후는 밀라milla의 원리 하나를 깨우쳤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 원리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이 룬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시공간에 사용자를 귀속시켰다. 소금이 속절없이 물에 녹는 것처럼 밀라milla를 사용할수록 몸와 영혼이 시공간에 녹아들고, 그곳에 귀속된다.
잠깐.
몸과 영혼.
강선후는 생각했다. 몸과 영혼이 시공간에 녹아든다?
귀속된다?
「그어어어어—」
악마의 울부짖음이 다시 한번 들려 왔지만 강선후는 거기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신이 해석하고 있는 룬에 대해서 더욱더 몰입했다.
몸과 영혼이 시공간에 귀속된다. 반대로 말하면 밀라milla를 잘 통제할 수 있다면 물질과 영혼을 시공간 안에 고정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고정된 존재를 어떻게 통제하고 제어하는가?
강선후는 그것을 제어하는 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황금의 유물이 필요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런 한계 따위, 강선후의 장애물이 된 적은 없었다.
강선후의 왼손에는 검은 영혼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엄지로 그 뚜껑을 연 상황이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검은 영혼이 흘러나온다. 마치 뱀처럼, 갯벌 안을 기어 다니는 갯지렁이처럼 요동치며 길게 뽑혀 나온다.
자유를 되찾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움직임에는 일종의 경쾌함마저 담겨 있었다.
이 탈출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듯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려는 악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선후에게는 여전히 조급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악마의 영혼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도망칠 가능성은 아예 없었기 때문이었다.
긱, 기긱—!
기다랗게 실처럼 늘어진 검은 영혼은 어느 순간 공중에 그대로 멈췄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갑작스럽게 박제된 듯 공중에 멈춰 섰다.
악마가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고정되었다.
선악과는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악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가하는 룬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인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악마는 이 인간의 정신을 읽어 보고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강선후의 지식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이 인간뿐만 아니라, 신의 자손이라면 누구든 그 지식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영향을 가하고 있었다. 악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는 몰랐다. 지금 강선후가 가하고 있는 룬.
왕, 그리고 신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자신이 밀라milla의 부작용에 시달린 그 순간, 그 현상의 본질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악마는 강선후가 도달한 룬의 권위를 감히 이해하지 못했다.
강선후는 허공에 고정된 악마를 똑똑히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모스mohs, 모로스moros.”
강선후의 앞에 불씨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천천히 움직여 궤적을 남긴다.
룬의 획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그려 나간다. 이 순간, 강선후는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고 오직 룬만을 생각했다. 정신 속 검은 도화지 위에 불꽃으로 그려지는 회로.
눈을 떴다. 눈앞에는 룬 문자 하나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장갑을 벗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룬은 강선후의 손바닥으로 옮겨 갔다. 고열의 불꽃은 그을음과 화상을 남긴다. 그 상처는 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선후는 입으로 외었다.
“탈레talle.”
손바닥의 룬은 거기에 수식어를 덧붙인다.
—몰리바mollve.
탈레, 죽음을 다루는 룬.
본질적으로는 영혼을 제어하는 룬.
악마의 영혼은 강선후에게 통제된다. 몸을 비틀어도, 없는 입으로 비명을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정령이 지배자를 섬기는 것처럼 악마는 신성을 품은 룬에 종속된다.
고대에 정립되었지만 후세가 잃어버린 숨겨진 법칙이 다시금 증명되고 실현된 순간이었다.
강선후가 고개를 떨궜다. 렐릭시나는 제 주인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정신세계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제 본분을 다하기 위해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대악마는 번쩍 들고 있었던 손을 땅에 강하게 박아넣었다. 그건 강선후를 노린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크레이터가 생기듯 말려 올라가는 암석. 그리고 사방으로 튀는 돌과 막대한 먼지.
팔꿈치까지 묻힐 만큼 땅속으로 깊게 파고든 팔. 대체 뭘 하려는 걸까? 렐릭시나는 전방으로 달려나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그 행동을 면밀히 주시했다.
쿠구구구궁—
너무나 깊게 박혔기에 팔이 뽑히는 데에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다시금 바위와 먼지를 튀기면서 솟아올라온 손.
짙은 먼지와 악마의 기운 속에서도 그 손에 들린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건 거대한 메이스였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비교적 짧은 막대. 그리고 그 머리 쪽에 달려 있는 건 두개골이었다.
거인의 두개골.
대악마가 고대에 일으켰던 ‘최초의 전쟁.’
그때 악마와 맞섰던 거인왕 아틀라스의 두개골.
악마는 자신에게 패배한 어떤 거인의 시체를 모독하는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것은 악마를 상징하는 부정함이 어떤 형태인가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시대의 적과 싸운 위대한 왕의 시체를 악마 따위가 모욕하는 모습
그걸 느낀 순간 강선후는 참아왔던 분노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이제까지 억제해 왔던 무의식 뒤편의 호전성이 전부 해방되었다.
어찌나 무기를 거칠게 뽑았는지 그 거대한 대악마의 몸이 기울었다. 대악마는 다시 중심을 잡기 위해서 무기를 땅에 대고 몸을 지탱했다.
단순히 그렇게 할 뿐이었는데.
“……!”
귀가 마비되어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다. 땅이 통째로 증발했다. 이해할 수 없는 파괴력.
그리고 지금, 그 공격이 강선후를 향하고 있었다. 렐릭시나는 알았다. 자신이 저 공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하지만 렐릭시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명마(名馬)란 제 주인을 믿고 호랑이에게도 달려들 수 있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네피리아nephiria.”
강선후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지만 대악마는 그런 변화를 신경 쓰는 존재가 아니었다.
“사비sabi.”
강선후는 손을 들어 올렸다. 피부가 하얗게 바래 있었고 손톱이 칠흑처럼 검었지만 대악마는 그런 변화를 신경 쓰는 존재가 아니었다.
“— ——.”
엘라EL lA.
강선후는 신의 자손이 들을 자격이 없는 단어를 외었다.
대악마의 격이란 높은 것이어서 그 단어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당황했다. 존재하게 된 이래 처음으로.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