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7
197화
ep56. 몰락한 자들의 망치 – 발칸 셀루니아 (5)
리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음식을 먹지 않은 지 30시간이 훌쩍 넘어갔지만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함선은 현재 대악마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덕분에 안전했지만, 강선후에게 지원해 줄 수도 없는 게 문제였다. 물론 강선후의 선택이었다. 대악마를 홀로 상대하겠다는 심산이었으니까.
강선후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리리는 흑염룡의 연구를 보조하면서도 진동이나 소리가 들릴 때마다 흠칫거리며 놀랐다.
‘……집중해야 해.’
걱정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해야 할 일에 소홀할 수 없었다. 그게 강선후가 원하는 일이었다.
그가 왕좌에 도달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거기까지 갈 때 만큼이라도 그에게 헌신해야 했으니까.
그게 리리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었으니까.
쿠우웅—
이번에는 공중에 떠 있는 함선에서도 몸으로 느껴질 법한 진동이 터져 나왔다. 이번만큼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좁고 높게 솟아오르는 거대한 분출이 보였다. 화산이나 간헐천의 분출과 모습은 비슷했지만, 저건 바위와 흙먼지의 기둥이었다. 대악마가 바닥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그건 거대한 두개골로 만들어진 철퇴였다. 그 머리가 누구 것인지 왠지 알 것 같았다.
대악마가 철퇴로 몸을 지탱한 순간 저 부정한 무기의 위력을 실감했고, 그 순간 철퇴가 다시금 땅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뭘 노리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파괴의 힘이 응축된 두개골 철퇴는 강선후를 노리고 있었다.
“……안 돼.”
리리의 신음에 집중하던 흑염룡마저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리리처럼 새하얗게 얼굴이 바래버렸다.
그 순간.
“……?”
검은색 손이 나타나 대악마의 팔뚝을 잡아챘다. 리리와 흑염룡이 보기에는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거대한 팔이 솟아난 것처럼 보였다. 그 팔의 힘이 대악마의 공격을 막아 냈다는 걸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솟아나는 팔, 그리고 드러나는 어깨, 이어지는 형태를 알 수 없는 머리.
칠흙처럼 검은 형상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거대한 상반신이 드러났고, 그 존재는 반대쪽 손으로 대악마의 머리를 거칠게 부여잡고 땅으로 내려쳤다.
대악마가 내려꽂히는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없었으나, 공허의 기운으로 만들어진 존재의 팔목에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팔찌가 끼워져 있다는 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팔찌에 함부로 시선을 둘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읽기 허락되지 않은 문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 * *
언젠가 신카의 저택에 제국의 대마법사가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 역시 뱀파이어였기에 동족이라는 유대감이 작용한 탓이었다.
리리의 어머니 도이나 신카는 딸의 견문을 넓일 기회로 여겼다.
대마법사는 딸에게 마법과 자연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조언을 해 줬고, 리리는 지배자의 상을 계승할 후계자답게 그 말을 경청했다.
이 수업에서, 리리의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이었다.
“에너지와 물질이 같은 것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돼요. 둘은 전혀 다르지 않나요?”
대마법사는 룬을 외었다. 그의 손에 정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리리도 아는 마법이었다. 공기 중의 희미한 룬을 밀집시키는 마법. 흔한 마법이었다.
하지만 마탑의 대마법사가 구현한 그것은 농번기에 영지의 마법사가 사용한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대기 중의 희미하게 흩어져 있던 정기는 마법사의 손 위에서 매혹적인 녹색의 빛을 내는 구슬의 형태를 띠었다.
“만져 보시지요. 로얄 블러드여.”
대마법사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린 리리는 그런 대마법사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바닥 위의 녹색 구슬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어떻습니까.”
“따뜻해요. 부드럽고.”
“중요한 건 다른 데에 있습니다. 만져진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 맞아요.”
대마법사의 말이 맞았다. 정기란 에너지고 에너지란 만져지지 않는 것.
하지만 지금 대마법사의 손에 있는 구슬은 분명이 만져졌다. 질감도 느껴졌고 무게도 느껴졌다.
대마법사는 설명했다.
“에너지와 물질은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강한 에너지는 물질이 되고, 물질도 허공으로 흩어지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군요…….”
“이 사실이 그저 흥미로운 지식이란 생각이 들고 말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릇 왕좌와 룬을 추종하는 자라면 그 이상을 생각해 봐야 하는 법입니다. 뭔가 흥미로운 발상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마법사 역시 어린 공녀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기에 그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황금의 왕국이 에너지의 형태로 있을 가능성. 즉, ‘룬‘의 형태로 바뀌었을 가능성.”
“왕국이…… 룬의 형태로.”
“이건 가능성일 뿐입니다. 흥미로운 가능성이지요. 황금이 룬의 형태로 되어 있고—.”
—그 룬은 언제든지 다시 황금의 존재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10년 전 마탑의 대마법사가 해 준 이야기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인 가설이었다.
황금의 왕국, 그 일부뿐이라도 현실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룬의 형태로 남았을 수 있는 가설.
물론 인상적이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었다. 어떤 자연철학자가 제시했던 ‘우주에는 끝이 없다.’라는 가설처럼 그저 재밌고 창의적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팔찌는 뭐야?”
선상 위에 있는 다른 수천의 숭배자들도, 밀라milla의 비밀을 풀어내느라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던 바그너와 그를 보조하고 있었던 리리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악마가 대악마를 제압했다는 사실보다 그 악마의 팔에 끼워져 있는 팔찌에 더 주목했다.
양손의 팔찌는 황금빛을 뿜어내는 고리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고리는 손목에 고정되지 않고 허공에 떠오른 채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표면에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문양이 정밀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은 왕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졌고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중요한 건 그 물건이 지금 악마의 손목에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악마의 물건인가? 그건 아니었다. 악마의 존속이 저토록이나 신성하고 찬란한 광채를 가졌을 리 없었다.
그게 황금 시대의 물건, 더 나아가 왕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저건 악마의 물건이 아니라 악마를 통제하는 물건이었다.
누군가 그 룬의 비밀을 풀어내었기에 언어에서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물건.
그 비밀을 풀어낸 자가 누구인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멀어서 강선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으나 그 영혼은 너무나 선명하고 거대하게 보였다.
강선후의 영혼은 맹렬하게 분노하는 맹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혼의 크기는 대악마 만큼이나 거대했다.
* * *
강선후는 눈을 떴다. 자신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거대한 검은 거인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선악과의 악마였다. 하지만 그 형태는 강선후가 상상하는 고대의 거인왕, 아틀라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대의 어느 전쟁에서 패배했던 한 왕을 존중하고자 하는 그 의식의 반영이었다. 더 나아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재를 모독하는 악마를 향한 분노 표출이었다.
선악과의 악마는 더 이상 아무런 의지도 가지지 못했다. 왕의 유물에 지배된 부덕한 존재는 자유 의지를 가질 자격조차 상실되었다.
그것은 왕의 무기가 되었으며, 이 순간은 강선후의 무기였다.
「아아아아아아—.」
대악마가 입을 열었다.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검은 기운이 퍼졌지만 그것은 강선후에게 더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강선후는 손에 잡고 있는 콜드 프로스트를 완전히 놓아 버렸다.
‘제압되었다.’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 본 거대한 악마는 이 상황에 당황했다. 대악마의 척추 가시 하나가 급속도로 성장하더니 머리를 짓누르던 검은 거인의 손목을 관통하고, 절단해 버렸다.
다시 자유를 찾은 뒤 몸을 일으키는 대악마. 검은 몸체의 손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힘의 본질은 팔찌에 있었으니까.
대악마 역시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기에 대악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철퇴를 휘둘러 땅에 떨어진 거대한 팔찌를 노렸다.
그 순간, 검은 거인이 다시 재생되며 팔찌가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였다.
터어엉—!
재생된 손이 휘둘러지던 철퇴의 손잡이 부분을 잡았다. 대악마의 거대한 힘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완력. 검은 거인은 그와 동시에 반대쪽 손으로 대악마의 턱을 강하게 가격했다.
충격파가 눈에 보일 정도로 퍼져 나갔다. 타격 지점이 순간적으로 진공이 되었다가 후폭풍이 몰려왔다.
엎드려 기고 있는 모양새의 대악마의 머리가 위로 높게 치솟았다. 척추가 뒤쪽으로 강하게 휘어졌다.
대악마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덜렁거리는 턱을 떡 하고 벌렸다. 그 안에는 칠흙 같은 어둠이 있었는데, 치명적인 에너지가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이 제대로 모이기도 전, 강선후의 검은 거인이 턱을 거칠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했다.
대악마는 뒤로 넘어가면서도 팔을 뻗었다. 강선후의 검은 거인은 그 팔을 잡으며 오른손으로 대악마의 갈비뼈와 얼굴을 연속으로 강타했다.
대악마는 단 한 번도 기술이란 걸 생각한 적이 없었던 존재였다.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강했으니까.
그에 비해서, 강선후의 기술은 세상에 치여 살며 죽음의 위기를 대가로 익힌 것들이었다.
“태어난 대로 살던 놈이랑은 다르거든.”
터어어어엉—
대악마의 상체가 뒤집혔다. 넉다운을 당한 복싱 선수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존재가 보이는 모습이기에는 퍽 초라했다.
그 가슴 쪽. 비정상적으로 많은 갈비뼈 사이로 검은빛을 발하는 수정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악마의 심장. 강선후는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검은 거인이 그곳으로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
강선후는 순간 검은 거인의 몸을 웅크려 자기 자신을 보호했다. 주변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대악마에게서 나온 명계의 기운이었다.
강선후는 그 와중에도 슬쩍 고개를 들어 대악마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움직이지 않던 악마의 다리.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우웅—!
그것은 이 악마가 봉인의 영향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의미했다.
* * *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뛰어든 이유는,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믿고 목숨을 걸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그려져 있는 무수히 많은 룬 실패작들을 바라보았다. 그건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하얀 벽지에 제 마음 가는 대로 그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바그너는 로크 벨라의 영향 때문에 기억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저 밑에서 싸우던 숭배자들이 나보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알았다.
기억이 사라진 덕분에, 편견을 가지지 않고 룬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걸.
그렇기에 이 비밀을 풀 수 있었다는 것.
낚싯줄이 엉킨 것처럼 혼란스럽고 무의미한 획들.
그 획들 사이에 찬란하게 빛나는 네 개의 단어.
“네피리아, 드웨브, 닌 휘든, 모르티스.”
nephiria, deweb, nine wheeden, mortis.
검은 태양.
거절했다.
아홉 신.
부정적 제안.
그 단어가 모여 만들어진 문장.
“아홉 신은 인간을 포기하고자 했지만…….”
“검은 태양은 거절했다.”
바그너는 고개를 돌렸다. 리리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풀었구나. 축하해.”
“내가, 내가…….”
“네가 해냈어.”
그 순간, 뒤에서 다시금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강선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악마와 맞서고 있었다.
그 노력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바그너는 룬을 시동했다. 그 룬의 뜻은 이러했다.
– 왕이 수명을 다해 사라지자 신에게 버려진 왕의 자식들.
– 그들을 버리지 않고자 권능을 포기하고, 자진해서 그림자가 되기로 한 ‘태양’.
– 검은 태양nephiria.
허공에 검은빛이 모여들어 하나의 유리 조각이 되었다.
이건 검은 태양의 힘을 응집하는 렌즈.
바그너는 깨달았다.
“이걸 전달해야 해. 저 남자에게. 내가 직접.”
그게 검은 태양이 하사한 바그너의 숙명이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