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ep56. 몰락한 자들의 망치 – 발칸 셀루니아 (6)
강선후가 흑염룡이라고 부르던 남자, 바그너는 검은 태양 렌즈를 바라보았다. 검은 태양의 빛을 한 점으로 모아 그 힘과 권능을 한 점으로 응집시킬 수 있는 특별한 렌즈.
세상에 무질서하게 흐르는 검은 태양의 빛을 한 점으로 모은다는 말은 밀라milla의 잠재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 렌즈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궁극적인 룬은 대악마를 토벌하기 위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하지만 바그너는 자신이 거기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검은 태양 렌즈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검은 태양의 빛을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맞지?”
옆에서 지켜보던 리리가 말했고 바그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그의 영혼의 상을 보았다. 아지랑이와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세 가득했던 태도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위태로운 진지함, 그리고 조급함과 불안이 잔뜩 느껴졌다.
검은 태양의 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현재 강선후뿐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그 밖에는 없을 테니까. 리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렌즈를 강선후한테 전달해야만 했다.
리리와 바그너는 뒤를 돌았다. 저 멀리 강선후가 있을 검고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았다.
쿠우우우웅—!
뭐가 뭔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막대한 흙먼지가 퍼져 있었다. 거대한 폭탄이 터졌을 때나 볼 수 있는 풍경.
강선후와 대악마가 나누는 공격은 하나하나가 그런 폭탄이었다.
강선후에게 렌즈를 전달한다는 건 맨몸으로 저기를 뚫고 지나가야만 된다는 의미가 되었다.
“내가 갈게.”
리리가 검은 태양의 렌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 접촉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읏!”
강렬한 통증에 손을 떼 버렸다. 살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 손을 바라보자 렌즈와 접촉했던 부분에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검은 태양 유적의 벽돌에 손을 댔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지만 훨씬 격렬했다.
“주신의 가호를 받은 종족은 검은 태양의 물건을 만질 수 없어.”
그 사실을 바그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물건을 가지고 가야 하는 건 검은 태양의 숭배자들뿐이다.
바그너는 구출되어 선상에 있는 숭배자 무리를 바라보았다. 긴 시간 동안 죽음과 삶을 반복하며 악마와의 전쟁을 이어 가온 사람들.
그들의 상태는 딱 봐도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들이 여전히 넋을 놓고 있었으며, 그나마 바그너에게 말을 걸어왔던 노인도 힘을 다했는지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들에게 또다시 지상으로 내려가 악마에게 달려가라는 부탁을 하는 건 잔혹했다. 성공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이건 내가 해야 한다. 단순히 의무를 떠나 내가 해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리는 바그너의 영혼을 보았고, 그렇기에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가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눈치챘다.
“로얄 블러드. 부탁이 있다.”
리리는 조용히 바그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옵시디오에게 명령을 내려 나를 저 아래로 보내 줘.”
그렇게 말하며 대악마를 바라보았다.
강선후의 공격을 받던 대악마는 지금 두 발로 일어서고 있었다.
비로소 봉인에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 순간 대악마가 품게 될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제 가늠할 수도 없게 되었다.
리리는 고개를 들어 옵시디오를 바라보았다. 옵시디오는 지배자의 상을 가진 뱀파이어의 명령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리는 손에 들려 있는 남색의 보석을 꺼냈다.
그건 수정구가 달린 지팡이가 되었다.
『사자의 지팡이』
“나도 힘이 닿는 만큼은 도울 거야.”
리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죽은 자들을 위한 룬.
고대의 엘드리치el de lich가 만들었으며, 그 말고는 사용할 수 없다는 룬.
하지만 리리는 엘드리치의 곁에서 그의 룬을 봐 왔으며, 그의 행보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항상 노력해 왔다.
“그 사람이 말했어.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고.”
바그너는 지팡이의 수정구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리리는 조금 인상을 썼다. 입이 열릴 듯하다가 주저하는 게 몇 번 반복했다.
그러다 끝내 외었다.
“탈레talle.”
* * *
오묘한 빛과 함께 함선에서 검은 대지로 전송된 바그너는 전송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나갔다.
그의 두 발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에 당황한 나머지 바짝 엎드렸고, 고삐 대신에 길게 휘날리는 그 털을 한 웅큼 잡았다. 곰 털만큼이나 억셈이 느껴졌다.
반투명한 유령 늑대는 울지 않았다. 거대한 악의 존재를 눈앞에 두고 달려나가는 데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바그너는 이 늑대를 알고 있었다. 계곡에서 살아오던 바람의 추종자.
이미 오래전 멸종된 고독한 포식자의 영혼.
그것이 룬을 통해 세상에 강림했고, 그 명령을 받아 바그너를 태우고 대악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악마가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혀옴이 느껴졌다. 아직 그 영향력의 바깥에 있음에도 그랬다. 단순히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호흡 곤란을 가져올 수 있는 거대한 존재.
강선후는 지금 그런 존재와 맞서고 있었다.
“조심해. 대악마가 너를 인지했어.”
바그너의 뒤에 타고 있던 리리가 외쳤다. 리리는 처음부터 그 혼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악마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곧, 검은 기운이 바그너와 리리를 덮쳤다. 리리가 가지고 있는 천잠사의 망토가 있었지만 그게 모든 기운을 막아 내지 못했다. 곧이어 검은 기운이 폐 속으로 들어갔고 강렬한 고통과 함께 의식이 끊길 것 같은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리리도, 바그너도 의지를 다졌다. 어떻게든 떠나려는 의식을 부여잡았다.
“컹—!”
달려나가던 유령 늑대가 날카롭게 짖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검은 기운은 흩어졌고, 조금 더 숨쉬기 수월해짐을 느꼈다.
바람의 추종자. 이 늑대종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까닭은 그들이 바람의 요정과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또렷해진 정신.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허리가 잔뜩 굽은 채 두 발로 서 있는 대악마를 목격할 수 있었다.
대악마는 자신의 손목을 부여잡는 검은 거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대상은 강선후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바그너와 리리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존슨! 더 빨리!”
“컹!”
유령 늑대는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벌써 내려오기 시작한 그 발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뼈마디밖에 남지 않은 발이지만 너무 컸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저 멀리 어딘가에서 검은 점이 발하나 싶더니, 곧 거대한 검은 팔이 되어 순식간에 뻗어 왔다. 손목에는 황금빛 팔찌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손은 내려치던 대악마의 발목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 힘에 발은 고정되어 더 이상 아래로 다가오지 않았다.
검은 거인의 팔은 그대로 들어 올렸다. 대악마의 몸이 기울었다.
위협에서 벗어난 바그너와 리리는 그대로 강선후를 향한 전진을 계속했다.
넘어질 듯 몸이 기울던 대악마의 몸에서 뼈로 된 가시가 수없이 돋아났다.
쾅쾅쾅쾅—!
그것들이 강렬하게 땅에 박혀 기울던 대악마의 몸을 고정했다.
그 가시 중 하나는 바그너와 리리에게 향했다.
그들이 강선후에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 집착마저 느껴지는 방해였다.
미처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쇄도하는 가시. 바로 앞에 박히며 파편이 거칠게 튀었다. 막대한 충격파가 덮쳐왔다. 유령 늑대를 감싸던 순식간에 날아갔다. 거기에 휘말려 유령 늑대는 땅을 굴렀고 리리와 바그너는 공중으로 튕겨져 나갔다.
리리는 몸이 붕 뜨는 걸 느꼈지만 충격의 여파에 정신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뒤늦게 몸을 돌려 낙법을 하려고 했지만, 땅에 박힌 가시에 부딪혔다.
“커억!”
숨이 멈출 정도로 강하게 부딪힌 뒤 무력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의식이 나갔다가 돌아왔다. 세찬 기침이 나왔다. 뼈마디가 흔들리는 느낌이 든 순간 어딘가 부러졌다는 걸 직감했다.
숨을 세차게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좌측 갈비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어떤 상처든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일으킬 수 있고 걸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 없었다. 지금 당장은 바그너의 상태를 봐야 했다.
바그너는 저쪽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피가 뿌려져 있었다.
그 손에는 검은 태양 렌즈가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심장 박동과 호흡이 확인되었다. 머리를 강하게 부딪친 모양이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곧 정신을 차릴 것이다.
하지만.
「…….」
어느새 대악마의 얼굴이 바로 위에 있었다.
잔뜩 엎드린 채, 리리와 바그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이 그 두개골로 가득 차 있었다. 무수히 많은 이빨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눈구멍으로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검은 태양과는 그 성격이 다른, 고통과 절망만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빛의 대척점.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던 리리가 이를 악물었다. 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눈빛에 다시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서 안 죽어.”
나는 죽을 수 없다. 사명을 다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 영혼의 구원으로 연결됨을 잘 알기에.
강선후도, 강선후의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 세상을 사는 자들에게 숙명이란 그런 것이다.
리리는 헌팅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손에 찔러 넣은 뒤 뽑아내었다. 진하고 진득한 붉은 피가 검 끝에 딸려 나왔다.
그것은 하나의 마력이 되었다. 곧, 리리와 바그너의 앞을 단단히 지키는 붉은 방패가 되었다.
태생적으로 깨닫지만 귀족이기 때문에 사용이 금기시된 뱀파이어의 금술.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면 불호령을 하셨겠지.”
하지만,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내 영혼이 사는 길이기에.
대악마가 입을 벌렸다. 진득한 독액이 그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리리의 혈술이 영혼을 더럽히는 저 맹독을 막아 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리리 역시 알고 있었다.
그저 수천의 적 앞에서도 검을 내리지 않는 마지막 전사의 감정이었다.
절대로 여기서 끝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자 항쟁의 지속이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나 방법이 있었다. 강선후를 따라다니며 배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찰나의 시간에 푸른 혜성이 근처까지 다가왔다. 푸르게 불타는 흑마였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신경이 곤두선 결과였다.
리리와 바그너 근처까지 왔음에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는 렐릭시나.
그리고 그 빠른 흑마의 등 뒤에서 그대로 뛰어내리는 강선후.
강선후의 발이 땅에 닿았고, 그대로 두 발로 미끄러지며 리리와 바그너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렐릭시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바그너와 리리의 옷깃을 입으로 물어 그 상태로 계속 달렸다.
리리는 렐릭시나에게 끌려가면서도 계속해서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몸을 낮추고 허리를 한껏 돌려주먹을 뒤로 뺐다.
그리고 이어서 위로 뻗었다.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리리의 붉은 동공은 지금 강선후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거대한 영혼은 강선후와 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곧, 영혼을 휘감기 시작하는 검은 물질.
그 물질의 힘으로 영혼은 형상화되었으며, 그 거대한 주먹은 쏟아져 내려오는 독기를 가르며 대악마의 안면을 강타했다.
“……악마.”
리리는 강선후의 영혼이 어느새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맹수인가? 악마인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머리에 뿔이 난…… 귀신.
강선후의 손톱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다시 한번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크르릉—!”
어느새 현장과 멀리 떨어진 상황이었다. 렐릭시나는 고개를 내리며 리리와 바그너의 상태를 살폈다. 리리는 인상을 쓰면서도 몸을 일으켰고, 바그너도 방금의 충격으로 인해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됐다.”
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그너가 검은 태양 렌즈를 강선후에게 전달한다면 비로소 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게나마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진동과 폭음에 다시 강선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악마의 어깨에서 수십의 팔이 돋아나 있었다. 그중 한 개의 손바닥이 이미 강선후를 덮친 상황이었다.
강선후의 검은 거인은 힘겹게 그것을 막아 내고 있었다. 한쪽 무릎이 점점 굽히는 모습. 힘에 부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바그너도 눈을 뜨고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쾅쾅쾅쾅쾅쾅!
이미 수십의 손이 강선후를 내려 누른 후였다.
* * *
바그너가 눈을 뜨고 강선후를 바라봤을 때 이미 그가 서 있었을 곳은 수십의 손이 얼기설기 엮인 채 짓누르고 있었다.
주변의 땅이 꺼져 있었다. 그 타격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바그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속으로 외쳤다. 안 돼.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뒤에서 뱀파이어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가 망가진 건지, 그의 정신이 망가진 건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쿠읍…… 쿨럭!”
피를 토했다. 리리가 준 천잠사의 망토마저 내팽개친 탓에 검은 기운이 폐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 보라색 후드에 검붉은 얼룩이 흘러내렸다. 검은 태양의 문양은 핏자국에 가려졌다.
대악마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듯 바그너의 접근에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일말의 여유가 느껴졌다.
강선후에게서 더 이상 악마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악마를 다루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대악마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악마의 기운이 다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는 그 강선후라는 인간이 악마에게 대항할 힘을 잃었다는 의미가 되었다.
바그너는 달려가며 생각했다. 검은 태양을 숭배한 대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 희생과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황금의 유지를 거부했다. 그게 앞으로의 시대를 살아가기에 필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래서 세상에 배척당했다. 시대의 그림자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견뎌왔다. 그게 정의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말이 이거인가?”
바그너는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체력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사라진 건 그의 의지였다.
검은 태양 렌즈가 땅을 굴렸다. 바그너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악마는 보이지 않았고, 그 눈에 들어온 건 새까만 땅과 그 위에 초라하게 놓여 있는 검은 태양 렌즈뿐이었다.
결론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게 아닌가?
내 믿음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겨우 이딴 게.
“이딴 게 정의였다고……?”
이딴 결말을 위해 그런 희생 속에서 살아왔다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건 정의다.」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강선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디에서 들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대악마의 손들에 짓눌려 있었으니까. 저기에서는 남을 수 있을 리 없다.
바그너는 그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환청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기에 진득한 분노가 올라왔다. 지열로 인해 끓는 늪처럼.
“……대체 무슨 이유로.”
목소리는 대답했다.
「완벽히 옳은 일이란 없다. 그 발걸음. 그 희생. 그게 순수했다면, 그 순수성에 너 자신이 당당하다면 그건 정의로움이다.」
“대체 어떻게 확신하는데.”
「내가 안다.」
바그너는 고개를 들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땅을 짓누르고 있는 대악마의 손들이 점차 솟아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
「구으…….」
대악마가 입을 벌렸다. 그건 당황함의 증명이었다. 저 악마가 있을 수 없는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손이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거대한 힘으로 짓누르고 있는 수십 개의 손이, 단 하나의 힘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인간이 있었다.
인간은 조금씩 무릎을 피고 있었다. 단 한 팔로 대악마의 손을 지탱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더 이상 악마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대체, 어떻게…….”
그 순간, 그 인간의 한쪽 발과 손을 지탱하고 있는 팔이 반짝거리며 빛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갑옷이었다.
아주 작은 빛만으로도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갑옷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가까워지는 걸 깨달았을 때는.
“으읏!”
그건 뒤에서 다가와 바그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신경 쓸 새도 없이 바그너는 고개를 돌려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날아온 건 은빛의 금속이었다. 다른 쪽 발에 닿더니 각반이 되었다.
강선후는 양쪽 무릎을 펼쳤다. 다시 은빛의 무언가가 고속으로 다가왔다. 이제까지 대악마의 손을 지탱하고 있던 손의 반대편에 장착되었다. 아름다운 독수리 장식이 달린 은빛 글로브가 되었다.
강선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으로 대악마의 손을 후려쳤다.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십 개의 손이 일시에 조각나며 흩어졌다.
대악마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휘청였다.
강선후는 흩날리는 그 파편들 사이에 가슴을 펴고 서 있었다. 그 양쪽 다리, 그리고 양쪽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갑주가 입혀져 있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왔어요?”
강선후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천공의 기사님.”
「오롯히 내 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천공의 기사는 말했다.
「네가 그리하라 가르치지 않았는가.」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