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ep57. 목자의 상 (1)
렐릭시나가 절뚝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주 미세했지만, 얘 위에 올라탄 기간이 길었던 터라 미세한 변화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너 다쳤구나?”
잠깐 내려서 다리를 살펴보았다. 무릎과 발목 사이의 부분에 붓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기운도 빠진 듯 언제나 활기차게 타오르던 푸른 불꽃도 많이 희미해진 상황이었다.
건강이 많이 안 좋은가 싶어서 렐릭시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을 보고 조금이나마 들었던 걱정이 사라졌다.
그래도 여기저기 부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번에 좀 치열하긴 했어. 그렇지?”
“크르으응.”
다친 것과는 별개로 렐릭시나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이토록이나 원 없이 온 힘을 다해서 달려 본 건 아마도 처음일 거다.
망치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망치. 물질화되어 허공에 고정된 빛의 기둥과 번개.
그 아래 깔려 있는 대악마의 잔해.
황금마저 무너뜨릴 힘을 가진 악마는 시대를 휩쓸다가 지금 이 순간 결국 토벌되어 버렸다.
“진짜 대단했지?”
“응.”
검은 태양 숭배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과 집착은 나로서도 무섭게 느끼는 수준이었다.
리리가 말했다.
“수상한 집단. 악한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이 목표를 향해서 달린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어려운 일이라는 말로 설명이 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게 단순히 어려운 일일까? 그 이상의 다짐이 있지 않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멋진 이들이었다. 검은 태양도, 그 숭배자도.
어쨌거나 추억을 회상하는 건 여기까지다. 차소희의 권유 덕분에 영상으로도 기록이 남아 있으니, 우선은 할 일을 해야 할 때인 거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우선 망치 쪽으로 다가갔다. 이번 전투는 그 규모가 워낙에 커서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려면 말을 타야만 했다.
망치가 가까워질수록 뒤에 타고 있던 리리가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이미 작동을 멈춘 망치지만 그 위력을 직접 본 이상 위축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무서워?”
“무서운 건 아니야. 그냥…… 몰라. 이게 무슨 느낌인질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리리.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리리는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어른스럽지만, 그래도 또래다운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나이는 못 속이는 법이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망치의 영역으로 다가갔다. 새삼 최후의 일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체감되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후끈한 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느껴졌으니까.
급격하게 깎여 나가는 경사를 따라 망치가 바닥에 박힌 접촉부를 향해 달려갔다.
“여기 어디쯤 있었던 거 같은데.”
충격이 일어날 당시 순간 정신을 잃었지만, 그 직전에 무언가 튀어 나가는 걸 본 적 있었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아, 찾았다.”
렐릭시나의 머리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팔면체의 양쪽으로 뾰족한 검은 광석이 땅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손이 좀 큰 편인데, 내가 한 손으로 간신히 쥐고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게 뭔지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다. 리리도 이제는 잘 아는 물건이겠지만, 익숙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홀로 다가가서 신중하게 집어 들었다. 조금 불쾌한 온기와 따끔거림, 눅눅한 느낌이 손을 타고 넘어왔지만 큰 문제가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악마에게서 느껴지는 본능에 가까운 공포심도 여전했다.
“악마의 심장.”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스스로 죽음을 택한 불멸자, 본드래곤 가롯.
이건 시대를 관통하는 공포인 이름 모를 대악마의 심장.
“……영혼이 남아 있어.”
악마의 심장에는 여전히 그 악마의 영혼이 남아 있다. 그래서 아공간 가방에 넣을 수도 없는 물건.
악마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태생이 불멸자이기 때문이다. 그저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형태로 변할 뿐.
황금 지침에서 노란색 보석을 꺼냈다.
「연금술사의 시약병」
여전히 이 안에 갖혀 있는 선악과의 악마.
밀라milla의 힘과 탈레talle의 힘으로 통제당한 악마는 끝까지 내게 벗어나지 못했다. 검은 태양이 사라진 지금은 밀라milla를 사용할 수 없으니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다시 다루진 못하겠지.
“……다시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땠어?”
리리가 호기심을 가졌다.
“악마를 통제한다는 건 악마를 이해한다는 거였어. 그 말은, 악마와 공감한다는 뜻이야. 그 생각과 마음가짐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유쾌하진 않겠네.”
“위험하다고까지 느꼈어. 너무…….”
당시에 느꼈던 악마의 사고방식을 살짝 떠올려 봤다.
그것만으로도 위험할 정도로 달콤하다.
도덕성, 신념, 의지.
모든 걸 포기하고 놓아 버리는 대가로 주어지는 힘.
달콤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책임 없는 쾌락 그 자체인데.
“너무 매혹적이었거든.”
룬을 사용하지 않고 선악과의 악마에게 영혼을 바쳤다면, 그 뒤로 나한테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말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유혹을 이겨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런 말을 하자 리리가 턱에 손을 대고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정말 당신이 이겨 내지 못했을까?”
“왜?”
“난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살짝 웃는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바로 동쪽으로 출발했다.
* * *
사막이 사라지며, 원래 사막이 있던 곳은 아주 낮고 거대한 평야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돌아가기 위해서는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을 올라야만 했다는 거다.
리리와 내 몸을 렐릭시나에 단단히 묶고, 한 번만 더 고생을 시키기로 했다. 렐릭시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 퍼포먼스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오히려 신난 분위기마저 풍기며 절벽을 달려 올라갔다.
“으아…… 으으으으…….”
리리가 뒤에서 신음을 흘렸다.
얘가 은근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리는 은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게 많다. 물도 싫어하고, 배나 자동차 같은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 위에 있는 것도 무서워하고, 높은 곳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척박하고 더러운 걸 더 잘 견디는 편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데에 오래 걸린 이유는, 리리가 겁에 질린 자신의 모습을 악착같이 숨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겁에 질린 모습을 숨기는 습성은 얕보이면 안 되는 동물들에게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리리가 받았던 훈련이 정신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영향이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가문의 숙명이라는 거, 진짜 무겁나 보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으으…….”
“……흐흐.”
“왜 웃어? 혹시 당신 지금 비웃은 거야?”
“크르릉!”
“으아앗! 떨어진닷……!”
숙명이란 단어를 들으면 밥 먹다가도 진지해지는 리리가 이제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났다.
렐릭시나는 절벽을 빠르게 올라간 뒤 조금 거칠게 꼭대기에 안착했다. 고개를 들어 봤다. 숲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 야영했던 흔적이 보였다.
솔라의 사람들은 ‘대수림’이라고 부르는 숲이다. 이걸 넘어가면 빠르게 솔라에 도착할 수 있겠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달과 무수히 많은 별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보이는, 별 사이사이를 유영하는 반짝이는 것들. 지구라면 인공위성이겠거니 싶겠지만, 이제는 저게 우주를 유영하는 고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쉬다 갈까?”
“……그럴까?”
리리는 내심 그러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체력이 좀 더 있는 느낌이었지만…… 달빛 아래의 야영이 몇 달 만인지 모른다. 왠지 그걸 해 보고 싶었다.
야영 준비를 하고, 불을 피웠다. 준비가 끝나고 리리는 잠시 자리를 비우려고 하길래 그러지 말라고 했다.
이번 전투에서 리리가 금기된 혈술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끝까지 참은 듯했지만, 뱀파이어를 가호해 준다는 운데라의 빛을 받고 나니 오히려 긴장이 풀려 버린 모양이었다. 자꾸 감추려고 하지만,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송곳니도 보였다.
“나, 피…….”
나는 그저 웃으며 리리에게 팔을 내밀어 줬다.
* * *
우리는 빠르게 ‘대수림’을 가로질렀다. 내가 악마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을까? 대수림은 이전보다 훨씬 더 협조적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 우리한테 길을 알려 주는 거야?”
“그런 거 같은데.”
하늘조차 보이지 않아 방향이 잠깐 헷갈려 하자, 숲이 먼저 이쪽이라고 길을 알려 줄 정도였다.
그래서 예상보다 하루 더 빨리, 이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뒤로 이어져 나오는 건 짧은 평야. 그리고 멀지 않은 거리 너머에 보이는 제국의 오래된 도시 솔라.
우리가 볼 풍경은 그게 전부였어야 하는데…….
「바크vakk 오디히스odihis」
“크르르르르……!”
렐릭시나가 빠르게 멈춰 섰다. 숲을 빠져나가자마자 바닥 여기저기에 룬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트랩?”
오디히스odihis는 충격을 시동으로 인식하는 룬 수식어다. 그러니까 지뢰처럼 룬을 사용할 수 있는 대신, 그 구조가 너무 제한적이라 복잡하거나 강력한 효과와 함께 사용할 수는 없는 형용사격 단어였다.
“뭐야? 이게?”
리리가 당황했지만 나는 그저 조금 찜찜할 뿐이었다.
“강한 룬은 아니야. 밟으면 그냥 위로 높이 튀어 올랐을걸. 그냥 진행을 막는 그런 룬…….”
쉽게 말하면, 무언가 다가올 때, 그 속도를 줄이고 시간을 벌기 위한 룬이라는 거다.
리리 역시 지금 눈앞의 풍경에서 룬만을 보고 당황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이 시점에서 설명을 멈췄다.
“멈춰라!”
누군가 호령했다. 안 그래도 멈춰 있는데…….
우리 앞에는 수백에서 천은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일렬도 서 있었다. 그 너머를 보니 성벽 위에도 이런저런 무기들이 장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벽 밖으로 나와 있는 병사들의 장비로 보아, 정찰을 위해서 출정했다가 우연히 나랑 마주친 것 같이 보이는데…….
그들의 목소리에서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우선 그 사람들을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 의뢰 완수하고 돌아온 프리랜서 탐험가거든요? 이게 무슨 상황인진 모르겠지만…….”
“네가 대수림을 넘어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어, 어디서 속이려고!”
자세히 보니 앞에서 불호령을 내리는 사람은 젊어 보인다. 그만큼 별로 연륜도 없어 보이고, 당황한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대수림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상황인지는 네가 잘 알 텐데! 고대의 악마 크로노스가 고개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온 놈이 그냥 보통 탐험가라고? 턱도 없는 소리! 네놈이 악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라!”
“……내가 악마처럼 보이나?”
나는 리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조금 뚱한 표정의 리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때에 따라서 그렇게 보일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냥 내 편 들어 주면 안 돼?”
“평소에 내가 얼마나 당신 편인데?”
“하.”
우리가 잡담이나 나누고 있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 목소리에 성이 가득했다.
“악마는 온갖 기교로 신의 자손을 속이고 유린한다! 네놈이 뭘 하든, 겉모습이 어떻든 믿지 않는다! 네가 악마의 족속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뭘 하든 믿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증명해?”
“그건 네 사정이지!”
겁에 잔뜩 질려 있으면서 센 척하는 게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뭐, 증명하라는데 어떻겠는가.
증명하는 수밖에.
나는 렐릭시나의 등에서 내렸다. 리리도 얼떨결에 같이 내렸는데, 그 표정에는 궁금증이 가득했다.
“뭐 하려고?”
“잘 봐.”
호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인장을 꺼낸다.
그걸 바라보는 리리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내 손에 쥔 인장은 빛을 발하더니, 이리저리 꼬인 지팡이가 된다.
『목자의 지팡이』
고대의 왕에게 직접 지배를 허락받은 자의 지팡이.
나는 지팡이를 들고 살짝 심호흡을 한 뒤에, 진중하게 땅으로 내려 쳤다.
그저 살짝 내려찍었을 뿐이었다.
쿠우우우우웅—
온 세상이 흔들리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리고 하나, 둘.
털썩—
무릎을 꿇기 시작한다. 그들의 얼굴에는 무언가에 압도당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가슴을 잔뜩 펴고, 표정을 잔뜩 진지하게 만들며 전방을 바라보다가,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어때? 이제 좀 그. 지배자 뭐시기 같아?”
“어, 70점……?”
“짜네.”
리리는 확실히, 여유가 많이 생겼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