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ep58. 변절자들 (3)
강선후의 눈은 여전히 전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자의 상이자 예언자의 상. 전대 황제는 두 지배자의 상을 한 번에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게 가능할 거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따지고 보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한 번에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법칙 같은 건 들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리리도 그래서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역사 속에서 별로 기록된 바가 없는 전대 황제의 최후가 이런 형태라는 사실, 그리고 그자의 능력이 영웅적이라는 사실에 감탄하고 있었을 뿐.
리리는 한동안 그런 생각에 빠졌었다. 강선후가 입을 열지 않자 축음기에서도 아무런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청난 예언 능력…….’
리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예언자의 상이 내뱉은 예언은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래에 있을 대화의 하나하나, 그 속도까지 정확히 측정하여 미리 녹음해 놓는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과거에 방문했던 해변의 기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 해변의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의 위치와 모든 파도의 형태를 기억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지금 전대 황제가 행한 일은 그런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리는 문뜩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황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감상에 젖은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
아니, 확실하게 그런 모습이었다.
실제로 강선후가 그런 상태에 빠진 게 아니라,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리리는 비로소,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강선후는 이 공간 전체를 더듬고 있었다.
마력, 정기, 룬, 신성력.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강선후만의 기(氣)가 이곳 전역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건 어떤 특별한 마법적인 무언가가 아니었다.
시각과 후각, 그리고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촉각과 청각. 심지어 미각까지.
일반적인 인지를 넘어서는 그 감각은 극한에 도달한 검사의 기운과 흡사한 형태가 되어 근방을 휩쓸었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건, 그게 뭐든 강선후의 감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게 눈이 멀고 귀를 잃은 불쌍한 사제로 변장한 반인반마라 하더라도.
리리가 여기까지 깨달은 순간, 이미 강선후의 쿠크리, 콜드 포레스트(cold forest)는 황좌 옆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던 사제의 가슴팍으로 날아가 꽂혔다.
“기긱, 킥—!”
피가 튀었다. 허파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듯 사제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게 치명타가 될 일은 없었다. 이 시점에서 저게 인간이길 포기한 존재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첫 번째 공격은 증명을 위해서였다. 정글도가 날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리리는 사제가 다음 움직임을 보이기도 전에 웃옷을 들어 올리고,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헌팅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 달려들면, 벤다.
강선후도 인정한 리리의 무술의 본질은 호신술이었다. 달려들기보단, 달려드는 것들에게 대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격들.
리리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고 중심을 단단하게 잡았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날아왔다.
쉬이익—
그게 뭔지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그저 훈련의 결과로 인해 몸이 생각보다 더 먼저 움직일 뿐.
깡- 카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던 두 개의 투사체는 리리의 검날에 동시에 막혀 버렸다. 놀랍도록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 줬지만 리리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확신을 가지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과감한 도전이었고, 간신히 성공했다.
그런 리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강선후는 애초에 그녀를 믿었던 듯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사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투사체가 리리가 아닌 강선후를 노렸음에도.
나중에 잔소리 거리가 하나 더 추가된 걸 기억한 채, 리리는 힘 없이 튕겨나가 떨어진 투사체들을 바라보았다.
챙강—!
경쾌한 소리를 내는 그것들은 뼈로 만들어진 투척검이었다. 동방에서 쓴다는 날이 세 방향으로 나눠진 삼각형의 칼날. 그 어두운 빛을 보고 깨달았다.
“악마의 뼈로 만든 무기야.”
계산은 빠르게 끝났다. 리리는 강선후에게 외쳤다.
“조심해! 녀석들 무기는 악마 뼈로 만들어져 있을 거야!”
뭘 쓰든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악마의 뼈는 그 자체로 맹독성을 가진 걸로 알려져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이다. 하지만 강선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보통 이럴 경우 적에게 빠르게 접근하는 게 보통일 텐데.
하지만 이 시점에서.
반짝—
“……?”
강선후와 데미이블 사이 허공,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실?’
금속으로 된 실이 강선후의 손에서 시작되어 데미이블의 가슴팍에 꽂힌 검의 날 부분과 연결되어 있었다.
강선후가 중얼거렸다.
파지지지직—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한 전류가 금속 실을 타고 흘렀다.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강렬한 빛이 번쩍거렸다.
팔다리가 꺾이도록 경련하는 데미이블, 이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기분 나쁘게 퍼져 나갔다.
푸슈슈슉—
데미이블의 몸에서 일시에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데미이블은 몸에서 순식간에 모든 수분을 배출했다. 미라와 같은 형상이 된 그것의 팔다리는 비정상적으로 길어졌으며 손톱이 도드라졌다.
“온다.”
리리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강선후는 부정했다.
“아닐걸.”
그리고 강선후의 말대로.
스슥—
데미이블은 거칠게 가슴팍의 검을 뽑으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애초에 우리와 싸우는 게 목적인 놈이 아니야. 괜히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잠깐, 놓치면 안…….”
리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콰가가가가강—!
데미이블이 향했던 입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문 쪽을 가리킨 강선후의 왼쪽 손에는 언제부터인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황금의 유물이었다.
미리 만들어진 룬 문자가 발사된 것이었다.
화염이 번져 빛이 허용되지 않았던 이곳을 점차 밝혔다. 폭발이 잦아들자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리리는 순간적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이곳은 황실, 신성한 곳. 그곳에서 이런 소란이 일어났다. 죄인의 신분을 면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강선후를 바라본 순간, 그 감정은 씻은 듯 사라졌다.
강선후는 지금, 숲 한가운데서 기생체와 싸우는 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황실이든, 저 앞에 사람들이 이후에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리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저 앞에 있는 건 악마. 황금을 부정하는 배덕자.
그 악마를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전대 황제 역시 그것을 원할 것이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고,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처음 제국의 정찰병을 만났을 때 봤던 함정형 룬 문자. 그걸 응용하고 재해석한 룬은 데미이블을 공중으로 높이 띄우며 동시에 불살랐다.
폭발은 그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줌과 동시에 성 전체에 퍼트린 경고 메세지의 역할도 했다. 소란스러움은 점차 가까워졌으며, 입구로 나갔다간 수많은 인파와 마주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세상 모두가 데미이블이 황실을 습격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리라.
음지에 숨어 사는 이들을 세상이 경계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들이 원하는 방향성이 아닐 터.
데미이블은 이를 악물고 뒤를 바라보았다. 도망칠 구멍이 있을 때는 도망칠 생각부터 들었지만, 마지막 구멍이 막힌 쥐새끼는 적을 물기 위해 달려들기 마련이었다.
광대가 도드라지는 얼굴, 눈꺼풀이 없는 것 같은 눈.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 팽팽하게 당겨지는 근육.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그 모습으로 데미이블은 강선후에게 달려들었다.
리리는 달려드는 그 속도를 역으로 이용하여 데미이블의 어깨를 베려고 했다. 그 순간.
“……!”
극한의 위협을 느낀 리리는 공격을 멈추고 몸을 완전히 뒤로 눕혔다. 어느새 장검만큼이나 길어진 그 손톱이 리리의 바로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처 가라앉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
인지를 뛰어넘는 속도.
강선후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강했으나, 인간 중에서 강했다. 순수하게 신체 능력만 보면 상식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1대1로 정면에서 정직하게 싸우면, 나는 너한테도 질 수 있어.’
강선후가 담담하게 그렇게 말했던 때를 기억했다. 물론 겸손이었지만,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데미이블은 리리를 지나쳐 강선후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리리는 몸을 일으켜 서둘러 뒤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손톱이 깊숙하게 팔뚝을 꿰뚫었다. 애초에 피할 생각도, 막을 생각도 없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명확하게 인지한 듯했다.
캉—!
기생체의 가죽에 일차적으로 막힌 손톱은, 그 안쪽에 덧대어 있던 철판에 막혀 멈췄다. 하지만 완벽히 막은 건 아니었다. 팍 하고 그 팔에서 피가 튀었다.
강선후는 왼손에 미리 들고 있었던 채찍을 휘둘렀다. 금속으로 된 그것은 뱀처럼 움직이며 데미이블의 허리에 감겼다. 데미이블은 채찍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그리고.
“무슨……?”
당황한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저게 반은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데미이블의 손톱은 채찍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기생체의 가죽을 베어 낼 정도의 예리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강선후는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기생체의 몸이 묶인 그 찰나의 순간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에는 반짝거리는 검은색 기운이 담겨 있었다. 악마의 영혼을 이 자리에서 사용하려고 하는 걸까? 아니, 아니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건, 검은 태양의 빛이었다. 몰락한 신이 모습을 감추기 직전, 미리 담아 놓은 한 줌의 신성한 어둠.
뚜껑을 열자 어둠은 의지를 가지고 강선후의 손 위에 모여들었다. 강선후는 중얼거렸다.
“밀라milla.”
밀라의 힘은 채찍을 차고 데미이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공간을 왜곡했다.
“크악! 크아아아악!”
퓨숙—!
데미이블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피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데미이블은 정체를 드러낼수록 생물의 영역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두 동강이 난 그것은 땅을 굴렀다.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상체 부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강선후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 뒤져!”
그 순간.
강선후의 재킷 단추가 격하게 뜯기며, 넓게 펼쳐졌다.
아마도 급하게 손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뺀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에는 검게 반짝이는 머스킷 피스톨이 들려 있었다.
“……?”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 찰나의 순간, 데미이블은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두 개의 총구를 바라보며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 총의 정체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본능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본능.
강선후는 머스킷에 달려 있는 두 개의 방아쇠를 한 번에 당겼고, 두 배럴에서는 동시에 검은색 폭발을 뿜어냈다.
콰가아아아앙—!
그건 총성보다는 포성에 가까웠다.
* * *
“다들 비키시오! 비키라고!”
황실에는 전통적으로 근위대가 없었다. 황제는 군사가 아니라 신이 지켜 주는 직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통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아니었다. 섭정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공간 바깥에서는, 불시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언제나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황제 접견실에서 폭발음이 일어난 후 1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병력은 황실로 들이닥쳤다. 그 입구는 심하게 손상되어 불타고 있었다.
황실 근위대장은 전통적으로 마법사였으며, 동시에 훌륭한 전사였다. 그는 룬이 새겨진 검을 치켜세우고, 사람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건 금지되어 있었으나, 사사로운 법률을 지킬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전에,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위대는 검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나오는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그 검 끝이 흔들렸다.
인간과 뱀파이어.
그리고 그 인간의 채찍에 목이 감긴 채, 입으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하게 손상되어 끌려오는 ‘인간형 생물’의 상체.
그 절단부에 드러나 있는 검은색 보석.
그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악마의 심장?”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