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ep58. 변절자들 (4)
본성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강선후의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일시에 도서관 같이 바뀌어 버린 성의 분위기에 당황했을 정도였다.
황제의 알현실. 비록 몇백 년 전부터 섭정이 자리 잡은 곳이었으나, 그 통치 체계를 오래 유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섭정이 사실상 현 황제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곳에는 누구의 접근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오직 한 명만이 존재하는 종신 보좌 사제를 제외하고는, 아주 가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만이 내부 진입을 허가받을 뿐이었다.
오죽하면 알현실 내부로 누군가 들어가는 사건은 몇 달짜리 가십거리일 정도였다. 본성에서 근무하는 모든 이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그자의 정체에 대해서 이런저런 상상을 나누고는 했다.
본성의 모든 이들은 이번에도 그저 그런 나날이 이어질 거로 생각했었다. 풍화의 시대가 이어진 이래, 사람들은 영웅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비슷한 매일이 영원히 반복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충격적인 사건에 면역이 없었다. 가령, 대단한 부분이 전혀 없어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 황제의 알현실에서 팔다리가 잘린 데미이블을 끌고 나오는 사건이라든가.
“허억…….”
생전 피 한 방울 본 적 없었던 본성 회계사 한 명이 털썩 쓰러지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다행인 건 지금 이 순간 그를 바라보며 흉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 곳에 몰려 있었다. 2층 난간이 부러질 듯,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강선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해라.”
근위대장, 전사이자 마법사인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최소한 아직은 위엄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위대장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강선후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형식적이지만 어쨌거나 수십 개의 칼날과 화살촉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긴장한 기색이 단 하나도 없었다.
“다시 말하지 않겠다. 설명해라.”
근위대장이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저 인간이 그저 반항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인간은 근위대장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한 인간이었다.
대답하지 않았던 건, 그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선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데미이블이 섭정 바로 옆에 있었고, 내가 그걸 잡았다. 요약하자면 그런 느낌인가?”
강선후는 마치 물어보는 듯 그렇게 말하며 리리를 바라보았다.
“데미이블이 보좌 사제로 변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말해야지.”
“역시, 배운 사람은 요약도 잘하네.”
“뭐라는 거야?”
리리는 이 상황에도 농담하는 강선후를 바라보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왜 이러는지는 알 것 같았다. 평소에도 강선후는 분위기를 쓸데없이 무겁게 끌고 가는 걸 싫어하고는 했다.
강선후는 다시 근위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 더 해야 해요?”
“…….”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병장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데미이블이 저 안에 있었다는 건가?”
“말이 돼?”
병장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마법사이기도 한 근위대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데미이블과 악마 교단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면 분명 솔라에도 제 씨앗을 심어 놨을 거라고.
하지만 그 사실을 막연하게 예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건 거대한 차이가 있었다.
‘데미이블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
이 사실이 명확해졌다고 한들, 우리 평범한 자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풍화의 시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
“더 할 거 있나요?”
“……절차상 심문을 해야 하오.”
강선후는 채찍에 목이 묶여 있는, 비쩍 마른 데미이블의 상체를 들어 올려 내밀었다. 덜렁거리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으어어!”
“그렇게 시간 낭비 하다간 얘가 회복하고 도망칠 텐데?”
“……그건 정말 데미이블인가?”
“정말 데미이블이에요. 제가 당신들에게 협조 안 한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저한테도 뒤처리할 시간은 좀 주셨으면 좋겠어요.”
강선후는 그렇게 말했다.
“그쪽 분들이 힘이 닿는 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제가 한시라도 빨리 이놈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는 쪽이 최선이라는 걸 이해해 주세요. 맹세컨대, 도망치지는 않겠습니다.”
“모두 검을 내려라.”
근위대장의 명령에 모두 검을 집어넣었다.
“내일. 내일 오전까지 이곳으로 올 수 있습니까?”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인도자를 보내도록 하지.”
“부탁할게요. 제가 도시에서는 길을 잘 못 찾는 편이라.”
“복귀하는 길은 우리 쪽에서 동행 인원을 하겠습니다.”
“왜요?”
근위대장은 데미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걸 끌고 다니다가 검문에 걸리면, 일일이 설명하실 텐가?”
“……맞네. 부탁할게요.”
강선후는 그렇게 말하고 근위대장을 지나쳤다.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군중들은 좌우로 갈라져 강선후에게 길을 내주었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데미이블의 모습에 모두 신음을 흘리거나 구역질을 했다.
본성에서 나간 뒤, 길게 늘어진 대로를 바라보다가 리리가 문뜩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협조적이었네.”
“생각보다? 안 그럴 거 같았어?”
“당신이 나쁜 사람은 뜻은 아닌데, 뭔가 규율 같은 걸 거부할 줄 알았거든.”
“질서는 중요한 거야. 내 입에서 나오기엔 안 어울리는 말인 거 아니까 트집 잡지 말고. 어쨌든 난 그렇게 생각해.”
언제나 집착처럼 질서가 없는 곳에서 머물기를 원했던 강선후였는데, 오히려 질서 속에서는 고분고분해지는 모습에 리리는 신선함을 느꼈다.
그들은 탐험가 연맹으로 향했다.
* * *
탐험가 연맹으로 가는 길에 시선이 집중된 건 당연했다. 질질 끌려가는, 인간의 것이 아닌 육체 조각은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육체 조각에서 비집고 나온 검은 수정이 악마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리리는 시선이 집중된 이 사실에 굉장한 부담감을 느꼈다. 로얄 블러드라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강박이 왠지 그런 감정이 들게 만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는 길에는 별일이 없었고, 우리는 탐험가 연맹의 저택에 도착했다.
“아, 생각보다 금방 오셨…….”
맨 처음 나온 건 올리버였다.
그리고 기절한 것도 올리버였다.
“……?”
털썩.
문을 열자마자 뒤로 쓰러진 올리버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그 뒤에 뛰쳐나온 아멜리아는 올리버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야! 네가 그러고도 탐험가 연맹원이야? 진짜 귀인 앞에서 쪽팔리게.”
“……아니, 내가 배려가 조금 없었네. 보따리 같은 데에 싸서 올걸.”
“아니에요. 그거, 그…… 혹시 제 생각이 맞는다면 그거 맞나요?”
올리버를 부축한 아멜리아가 뒤늦게 데미이블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는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의외였던 건, 데미이블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멜리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이놈들, 황실에도 파고들어 있었군요. 대체 어떻게 잡으셨어요?”
전투 과정을 설명하는 건 퍽 지루한 일이다. 나는 어물쩍 넘긴 뒤에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성물이라면 뭐든 좋으니 싹싹 긁어서 한 자리에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급하게 준비된 지하실, 끼익 거리며 매달려 있는 등불 빛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룬을 준비했다. 별 건 아니고, 에너지를 한 자리에 묶어 두는 모로스moros. 3중첩이다.
그 원형 마법진을 따라 성물을 놓고, 가운데에 데미이블을 놓았다.
“……징하네.”
벌써부터 몸 대부분이 재생되기 시작하는 걸 보았다. 채찍에 새긴 룬을 통해서 재생력을 억제했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고, 채찍을 풀자마자 바로 신체를 수복하기 시작한 거다.
— 데미이블은 죽지 않는다. 악마의 불멸성을 신체에 담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이놈, 아까 싸울 때 나한테 분명 말까지 걸었지?
사람 말을 하고, 변장하고, 사람처럼 상황을 판단한다.
아무리 악마보다 절대적 전투력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방심할 수가 없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리가 문뜩 말을 꺼냈다.
“아, 맞다. 당신 상처!”
내 재킷을 벗기고 팔을 확인하는 리리.
소매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은 그대로 내 팔로 이어졌다. 옷을 벗자 피가 뚝뚝 땅으로 떨어졌다. 리리는 그걸 보고 인상을 썼다.
“……악마의 독이 주입된 거 같은데. 아직도 출혈이 있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엄지를 어금니로 가져갔다. 나는 오히려 그걸 제지했다.
“너 그거 금술이라며. 그리고, 우리 약속한 거 기억 안 나?”
로얄 블러드인 걸 숨겨야 한다.
하지만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쳤잖아. 그냥 다친 것도 아니고, 악마 손톱으로 생긴 상처라고. 그 독성을 인간이 극복해 낼 리가…….”
“괜찮아.”
“……?”
리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독 때문에 죽었다면 진작에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살다 보니 이렇게 됐어.”
독에 면역력을 가지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대체 어떻게 그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르고, 아예 면역인 것도 아니긴 하지만, 최소한 내가 죽을 독과 아닐 독은 몸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걱정 없는 독이다. 밤에 고생을 좀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옆에서 눈을 번뜩이던 아멜리아가 가만히 있다가 옆에 새워져 있던 낡은 쇠꼬챙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푸욱—!
신체가 거의 재생된 데미이블의 어깻죽지에 찔러 넣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던 거군.”
“비열한 놈들이에요.”
악마 교단을 향한 아멜리아의 분노가 엿보였다.
리리 역시 마찬가지고.
나도 그분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특유의 악마 지식으로 데미이블을 빠르게 분석했다.
“말단이에요. 아마 데미이블이 된 지도 얼마 안 되었을 거예요.”
“얼마 안 되었다고 하면?”
“아마 엘 로크라 벨라의 종소리가 울린 직후. 그때부터 악마의 활동량이 증가했어요. 악마 편에 속한 비겁자들도 마찬가지겠죠.”
“왜 그전에는 활동을 안 했는데요?”
“기나긴 풍화의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악마 숭배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더 이상 이 세상이 황금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는 알아서 자멸할 거라고…….”
아멜리아는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숨기려고 하지만, 그녀가 흥분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면 신이 주도하는 질서를 뒤집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게 악마니까.”
“그런데 지금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면?”
“최근에 모든 상황이 바뀌었어요.”
“바뀌었다니요?”
궁금증을 표한 건 리리 쪽이었다.
“세계수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남쪽에서 관측되었고, 사라졌다고 믿었던 천공섬과 용의 승천에 대한 목격담이 퍼지고, 솔라와 남부 지역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파도 치는 사막에서 거인의 도시가 재건되고 있다고 해요.”
아멜리아는 나를 바라보았다.
“귀인은 탐험가니까 어느 정도는 들은 이야기겠지요. 남부에서 오셨으니 목격하신 게 있을 수도 있고요.”
“어…….”
나는 입을 다물고 리리를 바라보았다.
리리도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그 변화가 데미이블을 자극한 게 분명해요. 애초에 위험을 감당하지 않는 놈들인데 굳이 황실까지 들어갔던 이유는 거기에 있겠죠.”
“흠.”
의문은 남아 있었다. 데미이블이 황제의 알현실에 들어갈 자격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크게 관심도 없다. 알아서 했겠지.
하지만 알현실에 굳이 접근하여 뭘 하고 싶었던 건지에 대해서는 아주 관심이 많다.
그때, 데미이블이 웃었다.
“크흐흐흐, 크흐흐흐…….”
“왜 웃는 거지? 이 상황이 즐겁나?”
“네놈들이 나한테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즐겁다. 그 헛된 희망을 지켜보는 게. 병신 같은 놈들.”
“…….”
지금 데미이블은 강하게 손상되어 있지만, 회복된다면 제대로 속박할 자신은 없다. 데미이블의 힘이 어디까지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길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아멜리아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다음 행동도 이미 정해 둔 참이었다.
“심문해야지.”
“데미이블은 악마의 불멸성을 타고났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도 별로 의미가 없어요.”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니 부끄러운걸…… 아악! 아악! 아하하하!”
아멜리아가 쇠꼬챙이를 비틀지만,
“실제로 아무리 잔혹한 고문을 하더라도 별로 의미가 없어요. 보시는 것…….”
아멜리아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내 손에서 퍼져 나오는 광채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그 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집행자의 검』
“정말 의미가 없는지 한 번 볼까?”
데미이블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제 꽤 볼만한 얼굴이 되는구나.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