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ep58. 변절자들 (7)
이 세상에 조작을 가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렇듯, 명계로 가기 위해서는 룬이 필요했다.
내가 새로운 룬 문자를 그릴 때마다 리리는 항상 놀란다. 룬 문자를 ‘창조’하는 것은 필멸자가 할 수 없는 짓이라는 말을 항상 덧붙인다.
하지만 내가 새로 만들어 낸 룬 문자가 매번 ‘창조’인 것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 원래 있던 걸 재해석하고 조율하여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 내는 것.
이번에 그리고 있는 거대한 룬 문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아이디어 역시 간단했다.
시공간을 주무르는 검은 태양의 룬, <밀라milla>.
죽음의 영역을 어루만지고 영혼을 통제하는 엘드리치의 룬, <탈레talle>.
두 개를 조합해 보면 어떨까?
그런 간단한 생각일 뿐이었다. 요 며칠간 밤새 실험하고 준비한 것도 이 마법을 만들어 내기 위함에 있었다.
나는 다시 돌멩이를 들어 바닥에 룬을 이어 그렸다. 중간중간 뇌를 쉬게 해 주기 위해 기지개를 켤 수밖에 없을 정도로 머리의 부하가 심했다. 뒷목 위쪽이 불에 타는 느낌이다.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올리버가 물었다.
“룬에 관심이 있어요?”
“룬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필멸자의 손으로 신의 힘을 발현하는 수단이니까요.”
“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에 관심이 없을 리 없다? 그런 뜻인가?”
올리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룬은 고대 우리 조상들이 창조신과 대화를 나눴다는 증거입니다. 풍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그걸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신께서 아직 이 시대에 대한 버리지 않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나는 다시 고개를 내려 반쯤 완성된 룬을 바라보았다.
“특히 당신은 저와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는 아홉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아직 버려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 언어에 담긴 힘이 아니라, 이 언어를 인간인 내가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 의도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품는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나는 잠시 내가 그린 룬을 바라보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최대한 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룬 언어에는 여러 체계가 있어요. 당신들 언어도 엘프 언어, 인간 언어, 공용어,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요.”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인 모양이었다.
“제가 지금 시도하는 건 밀라milla와 탈레talle라는 두 체계의 언어를 하나로 조합하는 거예요. 우선, 밀라milla 체계에 속한 룬은 각지고 딱딱한 직선의 연속이에요.”
검은 태양의 언어라서 그런 걸까? 완고한 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느낌이었다.
“그에 비해서 탈레talle의 룬은 부드러워요. 간혹 발음을 놓칠 정도로 뭉개지는 듯한 느낌이고, 역시 문자의 형태에서도 드러나거든요.”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아무렇게나 낙서하는 듯한 모양. 언뜻 불규칙적으로 보이는 곡선의 연속.
영혼과 죽음이라는 개념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한 듯한 모습.
서로 다른 이 두 문자를 하나로 조합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는 쉬이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올리버도 그 부분을 느꼈는지 회의적인 시선이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어 준 후, 다시 허리를 굽혔다.
언제나 그렇듯.
“됐다……!”
성공했다.
데미이블의 심장과 육체를 가운데에 둔, 어떻게 보면 이교도의 끔찍한 공양 의식처럼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이건 그들의 방식대로 명계로 가는 문을 구현한 형태였다.
물론 내 방식대로 재해석한 방법이지.
“카츠kaahz.”
명계로 가는 문이 열렸다.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듯한, 보기만 해도 차가워 보이는 균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요동치는 평범한 균열과는 달랐다.
눈앞에 있는 건 명계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유령의 구슬을 통해서 임시로 만들어진 그런 공간이 아니라, 진짜 명계의 왕이 살았고 악마가 태어나고, 죽은 자가 가는 그곳.
* * *
아멜리아는 데미이블을 향한 증오를 기반으로 공부한 지식을 떠올렸다.
명계의 존재는 현세로 올라올 수 있다.
하지만 현세에 귀속된 존재는 명계로 갈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발을 들이면 생환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 불합리한 세상의 법칙은 어디에서든 발견할 수 있었다. 깨끗한 것이 더러운 곳에 가면 더럽혀질 뿐이지만, 더러운 것은 깨끗한 곳에 가서 그곳을 더럽힌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명계로 가는 문을 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우리가 그곳으로 넘어갈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그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의미할까?
강선후는 소지품을 철저하게 점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아멜리아는 녹색 눈동자로 그를 그저 바라보았다.
“그럴 때가 있어요. 골치 아픈 일이 눈앞에 있을 때 거기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결되면 앞으로 모든 일들이 다 잘 될 것만 같은 느낌. 그걸 간신히 극복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아, 이게 해결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구나. 여전히 힘들겠구나. 우리식 표현으로는 현자타임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그런 생각 하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냄새가 났거든.”
“……생각하는 냄새요?”
강선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인간, 웨어울프 혼혈이신가요?”
강선후는 그 말을 듣고 낄낄 웃었다. 옆에서 그의 일을 도와주고 있던 리리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여유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의문이었다. 어떻게 명계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런 여유를 유지할 수가 있을까?
‘두렵지 않은 걸까?’
명계에 대한 두려움은 영혼에 새겨진 것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인간은 그 절대적인 법칙을 비웃고 있었다. 그딴 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말했다.
“두렵지 않으신가요?”
“뭐가요?”
“이제 곧 명계로 들어가시려고 하는 거잖아요.”
“무서워요. 뒤지게 무서운데.”
“……네?”
“하지만, 그래서 의미가 있는 거 아니에요?”
강선후는 땅에 그려진 룬 문자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탐험가잖아요? 당신들도.”
‘그럼 알 텐데?’ 강선후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도, 올리버도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명계로 가는 문, 그게 눈앞에 있었다. 산 자가 강제로 명계로 향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왠지 넘어가도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는 정확히 모르면서 말이다.
올리버와 아멜리아는 왠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들어 명계로 가는 통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원문 안쪽으로 펼쳐져 있는 기나긴 마력의 통로.
저 건너편에는 명계가 있다.
강선후는 설명을 시작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당신들은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아요. 근데 그러면 아쉽잖아? 모처럼 명계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인데.”
강선후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관전 정도는 할 수 있게 해 드릴게요.”
“관전이요?”
강선후는 눈을 감고 룬을 외었다. 그러자 붉은 기운이 허공에 모여들어 주먹만 한 눈알이 만들어졌다가, 곧 투명해졌다.
그리고 땅에 사각형을 그리자, 그 안에서 영상이 나타났다.
눈알의 시점으로 본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수확자의 눈.”
“이걸로 편하게 구경하세요.”
데미이블들이 탐험가 연맹을 감시할 때 사용했던 룬.
룬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부정한 언어, 악마들의 언어.
이걸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강선후.
단순히 룬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건가?
인간의 몸으로 룬을 쓰는 것 자체도 비정상적인데, 악마의 언어를?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학습했다고요?”
강선후는 자신이 한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뭐가 문제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리리와 강선후는 서로 바라보았다. 리리는 그의 눈빛이 뭘 말하고 있는지, 강선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눈치챘다.
“따라갈 거야.”
“책임 안 진다?”
“내 몸은 내가 챙겨. 새삼스럽게 왜 그래?”
강선후는 낄낄 웃으며 회색으로 빛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 * *
강선후와 리리는 명계로 가는 문으로 향했다.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어디, 나도 한번 보자.”
잠시 뒤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 엘리엇은 강선후가 명계의 문 저편으로 사라지자마자 안쪽으로 들어왔다.
엘리엇과 아멜리아는 강선후가 만들어 준 ‘모니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엇은 그 작은 몸을 비집고 들어와 결국 그들의 맨 앞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화면 안에서, 강선후와 리리는 차원 터널 안을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수확자의 눈’은 그런 강선후를 따라가며 안정적으로 촬영한 영상을 연맹의 사람들에게 보여 줬다.
“오…… 신기하구만.”
엘리엇이 그렇게 속 편한 감상을 내뱉는 동안, 아멜리아와 올리버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계로 가는 차원문. 그 안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차원 터널.
“너무 오래 걸리는데.”
아멜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냥 일반적인 차원 균열을 통과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동에 이렇게나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명계로 가는 문이라서일까? 강선후와 리리 주변으로 몰아닥치는 창백하고 푸른 기운은 보기만 해도 살이 애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
그러다가 빛이 번쩍였다. 모니터는 갑작스럽게 몰아닥치는 빛에 순간 시야를 백색으로 물들었다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서 누구도 이다음에 보일 풍경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흑백이었다. 강선후는 물론이고, 리리의 붉은 눈동자도 지금은 그저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일 뿐이었다.
“수확자의 눈이 고장 난 걸까?”
그나마 연맹원들 중에서는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올리버가 넌지시 가능성을 던졌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았다.
강선후와 리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는 장면이 있었으니까. 강선후는 신기한 듯 리리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리리도 마찬가지로 강선후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말 들려? 리리.」
「숨쉬기가…… 숨쉬기가 힘들어.」
「우선 숨 참고, 진정해. 눈 감아.」
「빨대로만 숨 쉬는 거 같아…….」
강선후는 숙련된 솜씨로 리리를 진정시켰다.
「희박하지만 산소가 있고, 충분한 농도야. 지금 네가 놀라서 그래. 자, 짧게 숨을 세 번 들이쉬어 봐. 그리고 세 번에 나누어서 내쉬는 거야.」
리리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리다가, 진정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균열의 도착지는 언제나 높은 언덕이거나 산이었다. 그래서, 이동이 끝난 뒤 항상 그 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강선후와 리리가 경직되었다.
수확자의 눈은 이동하여, 그들이 보고 있는 풍경을 화면에 비췄다.
그 앞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부서져 모래가 되어 가는 바위.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 현세에 비유하면 이제 막 사막이 되어 버린 듯한 평야.
그 흑백의 황량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많은 이형의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던 것을 멈추고, 그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강선후와 리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장 도망쳐야 해.”
강선후도 비슷한 판단을 한 모양이었다. 전방의 존재들이 움직이면 바로 도망치려는 듯, 다행히 닫히지 않은 균열로 당장이라도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손이 리리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명계의 존재들이 움직인 순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려던 강선후가 움직임을 멈추고, 순식간에 몸에 힘을 빼 버렸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명계의 왕을 죽인 자가 오셨다.」
리리는 그들과 강선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죽음 그 자체를 죽이고, 죽음을 극복한 자.」
「최초의 역행자. 명계를 무릎 꿇린 자.」
리리는 남부 접경지대에서 목격한 고대의 벽화를 떠올렸다.
조잡한 돌도끼 하나로, 명계의 왕과 대적하던 한 인간이 그려져 있는 벽화.
아다마와 하바는 그 전설 속 존재가 강선후라고 했었다.
「왕 시해자.」
「죽은 왕이 기다린 자.」
아멜리아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 역시 「저승을 역행한 자」에 대한 전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리는 강선후를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의 숨겨진 과거.
그걸 알고 있는 존재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으니까.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