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ep60. 명계왕 (1)
침묵.
명계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였다. 삶의 끝을 맞이한 존재들, 혹은 처음부터 삶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의 세상이었기에 명계에는 언제나 고요함이 가득했다.
그 고요함은 강선후와 리리가 명계를 방문한 순간부터 잠시 깨졌었다. 수천 년이라는 셈으로도 부족할 시간 만큼 침묵을 유지했던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폭음과 괴성이 울려 퍼졌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본래의 침묵을 되찾았다.
명계왕의 위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전투의 결판이 나서?
모두 아니었다.
명계왕이 불청객을 대하는 태도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냐! 오래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뭔 재주로 이제까지 버텼는지도 모르겠고. 진짜 희한한 놈일세.」
리리도, 데미이블도.
수확자의 눈으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연맹원들도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이곳에서 강선후만이 평온했다. 명계왕은 묘하게 흥분해 있었고, 리리는 긴장이 너무 풀린 나머지 바보 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하염없이 명계왕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동방의 요괴가 뼈만 남으면 이럴 것 같은 모습, 팔은 네 쌍, 총 여덟 개가 척추에 연결되어 있었다.
서쪽 사막에서 만났던 고대의 대악마만큼 거대한 건 아니었으나, 산맥을 의자 팔걸이 정도로 취급하는 그 위용에 부족함은 없었고 오히려 차고 넘쳤다. 위엄이란 온전히 크기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명계왕은 강선후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풍체에 어울리지 않는 퍽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뭐야? 니들 지금 와꾸가 왜 이래?」
“며, 며, 명계 왕이시여.”
명계의 왕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자동으로 리리는 귀족의 입장이 되었다.
명계의 왕이 적이 아니라고 했을 때, 사실 그건 신급 존재가 아니던가? 이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것 자체가 결례였다.
리리는 가슴속에 묻어 둔 귀족의 예법을 저도 모르게 끄집어냈다. 어렸을 적 손 끝에마저 새겨졌을 만큼 배워 온 예법은 상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다.
“미천한 이승의, 이승의 존재가 감히 한 세계의 왕 앞에 서, 섰습니다. 섭리를 거스른 발걸음을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
「아, 됐고. 대충 인사는 했다 치고! 혹시 니들 안 죽고 여기로 온 거야?」
“아, 네. 그, 그렇습니다.”
리리의 말에 명계의 왕의 턱이 움직였다. 딱, 따닥 소리가 날 법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시처럼 돋아난 수많은 이빨들이 부딪힐 때마다 천지가 요동치는 듯한 파장이 퍼져 나갔다.
쿠그그그그그—
명계왕은 뼈만 남은 그 얼굴을 강선후 가까이까지 내렸다. 여전히 먼 거리였지만 이미 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리리는 죽음 그 자체의 존재를 눈앞에 둔 본능적인 공포 때문에 떨리는 손을 애써 감췄다.
「아니, 대체 뭘 처먹고 다니길래 그렇게 장수해? 혹시 나 보기가 싫었던 거냐? 응? 그리고 대체 어떻게 안 죽고 온 거야? 그리고 너…… 혹시 나를 기억 못하는 거냐? 아니 시간이 좀 지났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쯧쯧.」
명계왕은 그렇게 쏘아대듯 말했다.
백성을 대하는 왕의 말투가 아니었다. 마치,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동갑내기 시종을 사적으로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미이블은 이 사황이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움만으로 머리가 깨져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저기, 저, 우리의 왕이시여?”
「응?」
“저 자는 우리의 적입니다. 암(暗)의 세계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그 권위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대의. 그것을 방해하고 이제까지 쌓은 모든 일을 망치려 드는…….”
「대의?」
명계의 왕 눈구멍에는 파랗게 일렁이는 불꽃이 있었고, 그걸 통해서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대의?’라는 목소리를 들은 순간 데미이블은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혹시, 내가 모르는 결례를 범한 걸까? 왕을 섬기고, 그 힘을 끌어내어 자원처럼 이용하긴 했지만 실제로 왕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기에 적합한 예법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불타는 눈을 보고 깨달았다.
왕은 지금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큰둥했다.
「그게 뭔데.」
이 순간, 데미이블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명계의 왕은 우리의 적인 강선후를 죽이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데미이블이 이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명분을 왕은 일절 모르고 있었다.
사지가 잘린 채 누운 모습 그대로 데미이블은 생각했다. 우선 저 인간을 영멸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걸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고.
왕을 설득하는 건 그다음이라고. 자신은 이미 반절은 악마이니, 왕이 분노하여 어떤 응징을 하더라도 견디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시간이 무한히 주어진다면, 왕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대부분의 불가능은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해결되는 것들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데미이블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명계의 왕, 그 영혼에서 공급되는 에너지는 아직 끊기지 않았다. 데미이블의 수척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최소한, 왕이 나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공급되는 이 왕의 힘이 바로 그 증거이니라.
왕이 가진 흉흉한 기운을 실체화시켜 잘린 팔과 다리를 수복했다. 명암조차 존재하지 않는 검은 팔과 다리가 절단된 부위를 채우고 깊게 패인 상처를 매꿨다.
「…….」
왕은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강선후를 지켜 줄 생각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기대감만 눈에 품었다. 그저 이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왕은 친우가 죽든 말든 신경을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연했다. 명계의 왕이 ‘죽음’을 비극이라고 여길 리가 없었으니까.
죽음을 지배하는 자의 상식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데미이블은 확신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저 인간을 죽인다면, 내 앞으로의 일을 방해할 존재는 없다.
죽이는 것을 넘어서서, 그 영혼에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새기리라.
데미이블의 팔에서 손톱처럼 보이는 칼날이 돋아났다.
우득, 드드득.
다리가 이리저리 꺾이더니 역관절이 되었다. 리리는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돌더니, 고양이의 하악질 비슷한 소리를 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날개를 넓게 펼친 채 몸을 낮췄다.
하지만 강선후는 계속해서 데미이블에게 등을 보인 채 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여유가 널 죽이리라. 데미이블은 생각했다.
역관절로 변한 다리에서 폭발적인 힘이 솟아났다. 바닥이 움푹 꺼질 정도의 속도로 도약했다. 강선후와 데미이블까지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 정도의 힘일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겠지.
데미이블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드러난 힘은 이제까지 전투에서 보여 준 힘과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이 인간의 섯부른 방심. 그게 패배의 원인이 되리라.
데미이블은 날카로운 칼날을 강선후에게 뻗었다.
푸욱—
강선후는 피하지 않았다. 몸을 돌린 뒤, 낮은 자세 그대로 팔을 들었다. 칼날을 팔로 받아 내었다. 칼날은 팔을 꿰뚫었다. 검은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악마의 기운을 담은 검이었다. 필멸자가 견딜 수 있을 리…….
“……?”
그 순간, 강선후가 고개를 들었다. 산발이 된 머리 사이로 치켜뜬 눈이 드러났다.
그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시선이었다.
악마화 된 그 눈은 새까맸지만, 눈동자 뒷편에 보이는 영혼은 온전히 인간의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계에서 더럽혀지고 있는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선명할 리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갑자기 명계의 왕이 말했다.
「기억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나보구만.」
재밌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나랑 싸우던 동안, 한 시대가 너끈히 지날 수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네놈은 그런 눈빛을 했었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게 참 마음에 들었어. 이게 그 너희들이 말하는 추억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건가? 오랜만에 재밌는 구경을 하겠구만.」
* * *
데미이블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 심장 안에 있는 악마의 영혼은 이제 반응하지 않았다.
악마는 심장이 깨져야만 사라진다.
심장이 깨지지 않았는데도, 움직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심장 안에 있는 악마의 영혼이 형편 없이, 넝마처럼 찢겨 널브러졌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데미이블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부여잡고 있는 삶의 끈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온몸은 난도질 되었으며, 영혼의 힘줄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끊겼다.
이곳은 명계였기에 죽어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데미이블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느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한 인간의 그림자였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아마 마지막 남은 힘으로 검 끝을 치켜올렸겠지.
최후의 일격을 위해서.
“왕!”
데미이블은 외쳤다.
“나는 명계의 종이다! 당신의 권속이라고! 당신은 암의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잖아! 내 목표는 당신에게도 좋은 거잖아!”
원망이 가득했다.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야! 대체! 대체 왜에!”
왕은 그런 데미이블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네가 누군데?」
왕은 저 인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을 본 순간 왕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뚝뚝 묻어났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비해서 명계의 권속인 자신은.
관심을 가질 가치도 없는 먼지와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찢긴 영혼에 여전히 왕의 에너지가 스며들고 있었다.
데미이블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이 힘이 왕이 자신을 지지하는 증거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왕의 영혼에서 힘을 끌어내는 걸 허용한 이유는.
그저 뱃속의 기생충 한 마리처럼 신경 쓰기엔 너무나 미약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고.
불멸을 베는 검이 데미이블의 가슴을 관통했다.
“…….”
리리는 이번 싸움에는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필멸자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조차 버거운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데미이블의 가슴에 칼을 박아넣은 채 헐떡이는 강선후를 그저 바라보았다.
“…….”
풀썩.
강선후가 쓰러졌다. 리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강선후에게 달려갔다.
그를 바로 눕혔다. 미세하게 몸이 경련하고 있었다.
꿰뚫린 가슴의 상처는 애초에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까지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모를 것 같은 상처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파악!
순식간에 피가 쏟아졌다. 리리의 온몸이 강선후의 피로 물들었다.
몸 뿐만이 아니라, 그 영혼도 불안전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불안전한 정도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영혼이 오염된다. 리리는 강선후의 눈꺼풀을 살짝 드러 올렸다.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
흰자위마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악마의 힘을 사용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악마는 필멸자의 영혼과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뭘 할 수 있는 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리리는 문뜩 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은 시큰둥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이 정말 강선후의 친구라면…….
리리는 외쳤다.
“왕이시여! 당신의 친우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게 뭐?」
“이 자는 이루고자 하는 대의가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친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힘을…….”
리리는 강선후를 내려놓은 뒤, 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었다.
로얄 블러드는 신에게마저 절하지는 않는 종족이었다.
“제발! 이렇게 빕니다!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선후를 살려 주세요!”
「그냥 냅둬.」
“왕이시여…….”
「그 사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넌.」
“무슨 말씀을…….”
「이 왕을 이긴 사내다. 고작 그 정도로 무너질 것 같으냐.」
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명계의 왕에게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느냐?」
리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밍밍한 업적 같아 보이느냐?」
“…….”
왕은 그렇게 말하다가 껄껄 웃었다. 이제까지의 태도가 마치 장난이라는 듯.
「앉아. 뭐, 깨어나는 동안 동안 밥이나 한 끼 할래?」
“밥…… 이요?”
왕은 몸을 일으킨 뒤, 산맥에 기대어 앉았다.
「어, 저놈은 이야기를 나눈다는 걸 그렇게 표현하던데? 아닌가? 윗놈들 문화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늙긴 했나.」
“대체 무슨 이야기를…….”
왕은 리리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애인이냐?」
리리는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목숨을 함께한 동료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이라는 말이군. 실례했구만. 허허.」
왕은 한바탕 호탕하게 웃은 뒤 말했다.
「나랑 얘기를 하고 싶지 않느냐? 안 앉고 뭐 하는 거냐. 우두커니 서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리리는 그렇게 말했다. 이제 막 전투가 끝난 차, 그 흥분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담소를 나누기는 힘들었다.
왕은 턱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옛날에, 저 녀석이 처음 날 만났을 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수 많은 로크 벨라가 이어지며 이제는 완전히 잊혀 버린 강선후의 과거.
눈앞의 왕이 그걸 알고 있는, 어쩌면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리리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저 녀석이 처음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지. 죽어서였어. 늑대한테 물린 상처가 덧났댔나. 여기로 떨어진 다른 윗놈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단 말이지.」
늙은 왕은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