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0
220화
ep61. 신카의 구성원 (2)
리리는 다음 날 바로 깨어났다. 닷새는 걸릴 거라고 예측한 올리버의 말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엄청난 회복속도였다.
신체적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 뱀파이어라는 종족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문제인 것 같은데, 모두가 놀랄 정도로 예측에서 벗어나는 걸 보니 확실히 리리의 정신력은 강한 편이었다. 나는 평소 리리를 보며 뱀파이어는 원래 이런가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할 뿐이었는데.
“…….”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하루 사이에 많이 수척해져 있었지만 그 붉은 눈빛은 걱정이 사라질 만큼 선명했다.
“……나.”
우리가 가만히 바라보자 리리가 입을 열었다.
“나 뭐 실수 했어?”
“실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러니까…… 우리 종족은 사실 자제심을 잃으면…….”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본능을 잘 억누르셨어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문이 열리며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바라보니 하인 한 명이 천이 덮인 그릇을 나무 트레이 얹은 채 들고 올리버 옆에 서 있었다.
“심력이 많이 소모되었을 겁니다. 로얄 블러드가 가진 피를 향한 갈망은 절대로 간단한 게 아니니까요.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참기만 하다간 스스로의 피를 소모한다고 하던데, 안색을 보니까 마냥 뜬 소문은 아닌가 보군요.”
뒤에 서 있던 하인이 들고 있던 그릇을 리리에게 내밀었다. 리리는 그 그릇을 가만히 바라보았는데, 코끝이 슬며시 움직이는 게 내 눈에는 보였다.
사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는 이미 문이 열린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건 피였다. 아마 사람의 피는 아닌 것 같았고, 어떤 동물의 피가 아닌가 싶은데 순수한 느낌마저 느껴졌다.
“마탑의 대마법사는 전통적으로 뱀파이어입니다. 그분에게 특별하게 부탁해서 얻어 온 피입니다. 정확한 건 잘 모르지만, 흡혈 종족의 기력 회복에 쓰이는 정제된 피라고 하더군요.”
리리는 하얀 천에 덮혀 내용물이 보이지도 않는 그릇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를 향한 뱀파이어의 본능과 갈망이 뭔지 알 것 같은 눈빛이었다. 저렇게 강렬한 본능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리리가 그런 티를 낸 적이 없었으니까.
리리는 그릇을 낚아채듯 받아 들어 바로 내용물을 들이켰다. 평소에 나름대로 품위를 보여 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노골적으로 피를 탐하는 모습이 나름대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식사를 마친 리리는 방금 전에 보인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듯했지만.
우선 리리의 건강을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급한 불은 끈 셈이었고, 우리는 조금 더 안심하고 앞으로의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리리가 씻고 몸단장을 하는 사이, 나는 연맹의 자료보관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불사조와 둥지지기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사실 자료실에서 손 가는 데로 꺼낸 책에 그런 내용이 마침 담겨 있을 리도 없었다.
올리버에게 넌지시 말했다.
“별로 안 유명한 전설인가 보네요.”
“노래꾼의 가요의 한 구절로 간혹 사용되는 정도였습니다. 역사로 인정받을 만한 실증을 발견한 게 엘리엇 님이 처음이고요. 엄청난 발견이었다고 합니다. 황실에서 탐험가 길드를 만들어 재정을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됐기도 했고요.”
“연맹에 지원하는 게 아니라, 길드를 따로 만들어요?”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없는 집단이니까요.”
“흠.”
어쨌든 지금으로선 핵심은 하나뿐이다.
리리의 영지 주변에 있었다던 불사조의 전설과 마지막 불사조 둥지지기였던 안드레이 베클레아.
그자의 이름과 리리의 아버지인 안드레이 신카의 이름이 같은 게 정말 우연인지.
“아.”
올리버는 문뜩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새빨갛게 물든 피의 폭포. 그 혈류가 흐르는 노미나 산맥의 심장.”
“……피의 폭포?”
“불사조와 관련된 모든 노래 가사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소재입니다. 그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 내용을 간과하기는 힘들겠네요.”
직감적으로 중요한 키워드라고 느꼈다.
* * *
오랜만에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리리. 우리는 1층 응접실로 모여 간단한 다과를 준비한 채 대화를 나눴다.
나는 리리에게 바로 위 의문을 꺼냈다.
“……모르겠는데.”
어쩌면 당연한 답변이었다. 알고 있다면 리리가 먼저 나한테 이야기를 해 줬겠지.
하지만 세상은 알고 보니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리리의 가족사도 마찬가지겠지. 리리는 가만히 기억에 잠겼다.
“아버지는 용맹한 분이셨어. 우리 아버지가 과거에 맹약을 맺은 전사, 그러니까 기사였다고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거야. 그럴 만한 분이셨으니까.”
“신카라는 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오?”
엘리엇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중요한 질문이었다.
리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눈치 같기도 했는데, 답을 추론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신 전대 인도자의 상은, 아버지셨소 어머니셨소?”
“……어머니.”
“어머니 쪽 가문이 신카였군. 그럼 어머니가 가주셨겠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가문 쪽으로 귀속되었다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겠구만.”
엘리엇은 이런 상황일 때마다 어울리지 않은 진지함을 뿜어내고는 했다. 그리고 이럴 때 엘리엇은 핵심을 놓치지 않는 말을 하고는 했다. 연맹의 수장이고 수십 년간 탐험을 했다는 짬이 어디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다면 역시 안드레이 신카는 베클레아 가문의 마지막 기사, 안드레이가 맞다는 결론이 나오는구만. 좋아, 그렇다면 내가 그때 지도를 분명…….”
“너무 비약적인 거 아니에요?”
나는 황당해서 그렇게 대답했다. 엘리엇은 그 대머리를 반짝이며 크게 웃었다.
“모험가란 원래 뜬 소문만으로도 세상 반대편을 갈 수 있는 이들 아니겠소?”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사람들은 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들이다.
리리의 표정은 멍했다. 당연했다.
“아버지가 불사조의 둥지지기?”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면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겠지.
그 순간, 뒤에서 저택의 하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급한 사항이라.”
“뭐죠?”
올리버의 말에, 하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실 근위대가…… 찾아왔습니다. 그, 귀인의 신변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연맹의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리리와 나는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섭정의 알현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때 황실 쪽과 이미 대화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황실에서 당신 언제 한번 다시 오라고 하지 않았어?”
“……까먹고 있었네.”
그저 내 할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엘리엇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나도 갈래.”
당연하지만, 리리도 따라나왔다. 저택 앞에는 총 일곱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중년은 이전 데미이블 소동이 있었을 때 나와 마주했던 그 근위대장이었다.
“따라오시오.”
“이유는요?”
근위대장은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이제까지 내내 무언가에 시달렸는지 표정도 좋지 않았다.
“섭정께서 당신을 찾으시오.”
* * *
황실의 분위기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데미이블이 섭정의 알현실까지 침입했었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게 당연했다. 언제나 엄숙하게 종교적인 분위기를 내뿜던 예전의 인상은 희미해졌고, 사제보다는 군인이 더 많이 보였다.
근위대장의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실의 위협을 이제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 책임을 오롯이 어깨에 짊어진 탓이겠지.
여전히 사제의 무리들이 날 에워싸고 예배의 행진을 하듯 알현실로 안내하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린 두 명의 사제가 양쪽에서 문을 연다. 그리고 안쪽에는 텅텅 빈 공허와 같은 거대한 공간이 펼쳐진다.
그 공간의 깊숙한 곳, 아무것도 없는 곳에 외롭게 있는 황좌.
그 위에 앉아 있는, 이미 죽어 영혼이 사라져 있는 시체.
새로 임명된 듯한 보좌 사제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책장에서 원판을 꺼내 축음기에 올려놓고 재생을 시작했다.
「이런 모습으로 맞이하는 이 몸을 용서하게.」
지난번 대화와 완전히 똑같은 시작.
전대 예언자의 상. 노바 비바치시모.
이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 리리의 눈에도 영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사망. 아마 본인의 영혼은 명계에 가 있거나 이미 명계의 기운에 녹아 사라졌겠지.
지금 이 대화는 미리 녹음된 대사일 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시체를 눈앞에 두고 녹음된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대 맡은바 숙명을 잘 완수했는가?」
“내가 뭘 하고 왔는지 알아요?”
「아니. 전혀 모르지. 알 수도 없네. 나는 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내겐 더 이상 이 세상의 새로운 걸 알 권리가 없는 거지.」
“당신은 예언자잖아요. 이 대화를 미리 녹음할 정도로 정교하게 미래를 보는 사람이 내가 뭘 하고 왔는지도 몰라요?”
「예언에는 그대가 없네. 예언 속에서 그대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이었지.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예언에 내가 없었는데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러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예언의 공백이 있었다네. 예언에 담기지 않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일어날 일들, 만들어질 사건들. 나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했고, 오랜 고뇌 끝에 그대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지.」
천문학자들은 별빛이 이상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알아낸 뒤,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것에 영향을 준다고 확신했다. 나중에 그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지. 블랙홀의 이야기다.
이 예언자도 마찬가지로 다른 움직임들의 비정상적인 부분을 감지하고 내 존재를 예견한 셈이다.
“그건 대단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렇다면 내 추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네요. 이것도 이미 예상하셨겠지?”
「그렇지.」
여기서 내가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어차피 녹음된 음성. 정말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적절하게 반응할까?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그리고 굳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녹음이 된 거겠지. 과거의 추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뱀파이어.」
섭정은 리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셈이겠지. 그대는 예언에 있으니까.」
“맞습니다. 지고한 예언자시여.”
리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낮추려다가 말았다.
눈앞, 황좌에 앉아 있는 건 그저 시체일 뿐이었다. 리리도 내가 느낀 이상한 기분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노바가 리리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뜨인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불사조와 신카의 저택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나름대로 영지를 가지고 있는 귀족의 저택 위치를 아무도 모른다는 게 내 입장에선 이상하게 느껴진다. 불사조의 숲은 둘째치고, 신카의 저택은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나?
이 사람이라면, 알고 있지 않았을까?
“불사조와 얼어붙은 숲. 그리고 신카의 저택. 당신이 혹시 알고 있으세요?”
「그럼.」
기분 탓이었을까?
노바 비바치시모의 목소리에서 지금 이 대화를 ‘재밌어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직접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오래전 미리 녹음해 뒀을 뿐일 텐데도 말이다.
“……알려 줄 수 있어요?”
「피처럼 붉은 폭포가 거울이 되어 떨어질 때, 변덕쟁이 노인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리라. 노인의 심장은 그 거울 안에서 뛰고 있으리라.」
“……?”
「불사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전설일세.」
“그게 무슨 설명이에요? 수수께끼지.”
「이상한 일이군.」
이 시점에서 확신했다.
「그대는 이런 수수께끼에 가슴이 뛰는 자라고 생각하네만.」
지금 이 사람은, 나에 대해서 이해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