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ep63. 평범한 인간이 지켜 낸 불꽃 (1)
심신에 문제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우두커니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이 숲이 멍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물 위 기름막을 흐르는 것처럼 춤추는 불꽃에 잡아먹힌 채 여전히 살아 있는 남자를 보며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은 얼음이고 반쯤은 식물인 나무들, 리리가 머레이라고 부르는 이 남자가 기대고 있는 거대한 수정, ‘노인의 심장’과 근처에 쓰러져 있는 불사조들.
“……리리.”
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충격을 받은 눈으로 수염과 떡진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는 머레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리리, 정신 차려.”
“……응.”
매초가 지날 때마다 극한의 고통을 느끼고 있을 이 남자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나보다 네가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
“내가?”
“넌 영혼을 볼 수 있잖아.”
심하게 흔들리던 리리의 눈동자가 다시 선명해졌다. 곧이어 붉은빛을 발하는 눈으로 머레이와 불사조 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불사조들은 하나의 영혼을 공유해. 이제 알겠어. 희미해서 구분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하나였던 거야.”
리리는 말했었다. 화산호에 있었던 불사조 한 마리는 온전한 영혼이 아니라 마치 찢겨나간 듯한 모양이었다고.
애초에 불사조는 여러 마리가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개체였던 거다.
“그리고?”
“그 영혼에 빈 공간이 있고, 머레이의 영혼이 그 빈 조각을 채우고 있어.”
리리는 설명했다. 하지만 그 형태는 완전하지 못하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머레이의 영혼이 불사조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하지 않아. 그저…… 평범한 인간이니까.”
리리의 아버지는 리리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순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둥지지기 기사였음에도 그랬다. 그 뜻은, 원래 둥지지기의 역할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이 남자는 그만한 힘이 없는데도 억지로 이 상황을 짊어졌기에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
대체 왜?
“네가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여러 가지 추측이 머릿속에 오간다. 리리는 그중에서 가장 불안한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듯했다.
“……설마 강제로?”
불사조 둥지지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누군가 그걸 강요했다면.
“강제로 짊어지게 된 거야?”
리리의 표정은 불안했다.
이곳은 신카의 영지였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은 리리의 부모가 가지고 있었다.
‘부모가 시종에게 고통을 강요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엔 아니야.”
나는 머레이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노인이 아닐 터인데 땅에 닿을 만큼 긴 수염과 머리카락은 회백색으로 바래 있었다. 이 자가 견뎌온 세월이 새긴 흉터였다.
뼈가 가죽을 뚫고 드러날 듯한 몸 위를 끊임없이 흐르는 불꽃은 물처럼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열기에 얼굴마저 화끈거렸다. 영혼을 장작 삼아 타오르는 불꽃은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그 모든 걸 견디고 있었다.
그래, 견디고 있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다. 떨어져 갈 듯한 의식을 미약한 의지의 끄트머리로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강제로 짊어지게 된 사람이 이렇게 견디고 있을 리가 없잖아.”
포기한다면 포기할 수 있다. 죽음이 삶보다 편하다고 판단하면 인간은 그런 선택을 하고는 하는 존재다. 특히, 십수 년간 몸과 영혼이 불타는 고통이라면 그런 선택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인간은 견디고 있지? 무엇을 위해서?
리리는 그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에서 미약하게나마 생을 유지하고 있는 불사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렸다.
“……불사조를 위해서.”
그 말과 함께 혼란의 파도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던 리리의 눈빛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다시 머레이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머레이를 구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건 당연했다.
“……머레이는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거야?”
“누가 이 짐을 대신 짊어져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사조의 둥지지기 서약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잖아.”
둥지지기. 불사조와 서약을 한 기사.
그게 어떻게 되는지는 리리도, 나도 몰랐다. 리리는 그나마 불사조의 영혼을 볼 수 있지만 그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머레이를 바라보았다.
생각은 여기서 끝이다. 나는 역시 이런 장면을 마냥 우두커니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황금 지침을 꺼냈다. 그리고 보석을 하나 꺼내서 손에 쥐었다.
내 손가락 사이에서 황금색 빛이 발하나 싶더니, 곧 주홍색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으윽!”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와 입술을 짓씹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머리에 있는 어떤 통로가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 왼손등 위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피빛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짙은 주홍빛으로 빛나는 송곳니 문신이 드러났다.
리리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도구를 바라보았다.
“……포식자의 유물.”
열두 개의 황금 유물 중 하나. 내가 아홉 번째로 찾은 물건이자 유일하게 왕이 만들지 않은 물건.
내가 내 손으로 만들고 명계왕이 그 역사의 증인으로 서 있는 물건.
명계왕의 뿔.
아니, 지금부터는 『포식자의 송곳니』이자, 내 영혼의 상에 걸맞은 지배자의 유물이다.
“하지만, 그 물건은 아직 실험을…….”
“실험은 필요 없어.”
나는 안다.
서지아가 『방랑자의 활』의 온전한 사용법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물건의 사용법을 안다.
이 물건은 내 영혼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리리처럼 영혼을 보지 않아도 머리로 느낄 수 있으니까.
나는 송곳니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에 꽉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삐익——
몇 초 뒤 내 시선이 닿는 저 멀리 설산의 매가 날아올랐다.
“……어떻게 알았어?”
리리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들렸어.”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의도와 감정. 세상에 그들의 감정이 울려 퍼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짐승의 마음을 읽는다.
포식자의 송곳니 첫 번째 능력.
나는 불사조에게 말했다.
“말해 줘.”
불사조는 내게 무엇이 궁금하냐고 묻는다.
나는 말한다.
“내가 너와 서약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둥지지기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불사조는 말한다.
둥지지기가 될 수 있는 자는 베클레아의 후손뿐이다.
영혼의 격이 걸맞지 않은 자는 둥지지기가 될 수 없다. 되어선 안 된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서약하는 법을 알려 줘.”
둥지지기가 될 수 있는 자는 베클레아 가의 후손—
“말해.”
쿠웅—
청각이 아닌 정신에서 울리는 충격파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서쪽에서 쉬고 있던 매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포식자의 송곳니 두 번째 능력.
정점의 권위.
“부탁할게.”
불사조는 말한다.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제 영혼을 태우고 싶은 자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뿐.
하지만 격이 맞지 않은 영혼은 그 불꽃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바로 뒤로 돌았다. 리리는 두 발자국 물러섰고, 그 앞을 지나 머레이의 앞에 섰다.
그 뒤, 뒤를 돌아 불사조의 영혼이 떠 있을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험해 볼까?”
머레이의 몸을 태우는 불꽃에 손을 넣었다.
“정말로 내가 자격이 없는지.”
* * *
머레이는 안드레이가 신카로 오기 전부터 그를 섬기던 시종이었다. 즉, 안드레이가 불사조의 둥지지기 기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저택의 인물 중 하나였다.
저택이 습격을 받은 그 날, 머레이는 저택에서 탈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어쩌면 데미이블들이 굳이 따라가 죽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머레이는 살아남았다.
“허억, 허억…….”
머레이는 공포에 질려 끊임없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금기의 숲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머레이는 이 숲의 비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불사조와 교류할 때마다 유일하게 머레이를 데리고 갔었으니까.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기의 숲의 우거진 가지 사이의 밤하늘. 난도질당한 케이크 같은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다시 숨을 들이켰다.
‘도망치자. 도망쳐서 새 삶을 살자. 죽기 살기로 가면 노미나 산맥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어차피 여기 있어 봤자 개 같이 죽는 건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사조들을 보았다.
불사조들은 머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다가가기 힘들 정도의 열기를 뿜어내는 짐승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열기가 벌써 이 정도로 사그라졌다.
벌써 불사조의 힘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둥지지기를 잃은 불사조는 언젠가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냉기를 상쇄하고 있는 존재가 사라진다면, 냉기는 점점 퍼져 나가 언젠가 온 세상이 얼어붙게 될 것이었다. 안드레이가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기나긴 풍화의 시대가 끝나며, ‘눈과 얼음의 시대’가 찾아오게 될 거라고.
“안타깝게 됐다. 너희 기사는 이제…… 없어.”
제 주인이었던 안드레이를 떠올렸다.
머레이는 그와 평생을 함께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죽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곧 죽겠지.
하지만 머레이는 살아남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거 하나만이 중요했다. 우선 노미나 산맥에서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확신했다. 슬픔을 되새기는 건 그 뒤에 여유롭게 해도 충분했다.
머레이는 다시 달렸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삐익—.”
뒤에서 불사조가 울었다.
그는 멈춰 섰다.
“…….”
정말로 이걸로 괜찮은 건가?
앞으로 세상에 닥쳐올 비극을 유일하게 아는 내가 외면해도 괜찮은 건가?
어느새 머레이는 노인의 심장을 앞에 두고 있었다. 전설 속 대수림이 연상될 만큼 거대한 숲의 심장.
그 심장 위에 앉아 있는 불사조 한 마리.
그것은 머레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레이는 그 눈에서 안드레이를 보았다. 극한의 긴장과 수축된 혈관 때문에 정신이 희미해지고 영혼이 정순함을 잃어 환각을 보여 주고 있는 걸까?
그 눈동자 안에서 불사조와 영혼을 나누는 안드레아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 시절, 철없이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던 머레이에게도 차분하게 대답해 주던 그였다.
불사조의 온기를 몰래 영지에 흩뿌려 언제나 풍년을 불러오던 안드레아는 그 업적을 세상에 내보이고자 하는 욕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불사조는 그저 전설로 남고자 했기에, 안드레이는 그 짐승의 바람을 존중했다.
언제나 늑대의 피를 먹어 그 영혼을 닮아 갔지만, 야성에 밀리지 않는 이성을 가진 사내였다.
머레이는 제 주인의 모습을 불사조의 눈동자를 통해 보고 있었다. 아직 그 영혼의 편린이 불사조 안에 있는 걸까?
“나는…….”
머레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는 둥지지기의 자격이 없어.”
둥지지기였던 안드레이가 가진 영혼의 격이 얼마나 드높은지, 로얄 블러드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야.”
평범한 인간.
풍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아무 색깔도 없고 아무 사건도 없는 세상 속에서 평온하게 살다 죽고 싶은 평범한 인간. 죄인이고 싶지도 않고 성자로 남는 것도 원하지 않은 그런 인간.
머레이는 다시 몸을 돌렸다.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다시 멈춰 섰다.
왜 기억은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걸까.
왜 이때, 주인과의 기억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올리는 걸까.
왜 그분과의 추억을.
추억 속에서, 그는 불사조와 영혼을 교류하는 안드레이의 신성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가끔 그 과정은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고는 했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견디기에는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머레이의 눈빛은 끝까지 빛을 잃지 않았고, 한 번의 불평도 입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이유가 뭐였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평생 섬겼던 분은 영웅이었다.
그분을 섬기는 건 내게 큰 영광이었다.
나는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은 걸까?
아무것도 타고나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밑에서 시종 노릇이나 했던 평범한 인간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는.
“……언젠가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가.”
어디에서 들었던 노랫말이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 * *
강선후는 항상 말했다. 신화적인 사건을 앞에 두고 눈을 감는 건 손해 보는 짓이라고.
그렇기에 리리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머레이의 몸에서 벗어난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강선후의 손을 지나 팔을 타고 흘러 올라왔다. 강선후는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불꽃은 강선후의 영혼으로 옮겨붙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리리는 그 붉은 두 눈으로 틀림없이 보았다.
불꽃은 강선후의 맹수와 같은 영혼을 불태웠다. 곧, 영혼은 불꽃이 되었다.
형태를 잃었는가?
아니었다.
맹수의 형상을 한 불꽃이 되어 있었다.
강선후를 잡아먹을 듯 그 몸 위에 흐르던 불꽃은 어느 순간 팍 하고 사라졌다.
리리는 느꼈다. 강선후의 영혼이 가진 격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는 사실을.
과거 그가 가진 지배자의 격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들었다. 이 시대에는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영혼의 격이 있다고.
“……영웅의 상bera ano.”
리리는 확신했다. 불사조의 불꽃을 받아들인 강선후의 영혼이 바로 그 격에 도달했을 거라고. 누가 아니라고 해도 고집을 부릴 생각이었다. 리리가 보기에, 강선후의 영혼은 그러했다. 누군가를 위해서 불꽃 속으로 뛰어드는 자가 영웅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강선후는 평소와 같이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리리도 그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보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아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불꽃은 수천 개로 나뉘어져 있더라도, 다시 모이면 하나가 될 뿐이라는 걸.
제힘을 되찾은 불사조들은 온전한 불꽃이 되었으며, 날아올라 하나가 되었다.
하나의 거대한 불꽃은 강선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