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7
227화
ep63. 평범한 인간이 지켜 낸 불꽃 (2)
강선후는 위를 바라보았다. 태양보다도 밝게 빛나는 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특별했다. 이계에서는 그토록이나 찬란한 빛을 내는 게 없었으니까.
불꽃의 날개가 펄럭이며 하늘에 연기를 흩뿌렸다. 무엇보다도 가볍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원소 그 자체로 이루어진 새.
이계에서는 생명을 불꽃에 자주 비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강선후가 사는 세상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지구에서는 그저 비유였다. 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정말로, 생명은 불꽃이었다. 눈앞의 새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불사조. 생명과 불꽃이 모여 만들어진 맹조가 위용을 내비치고 있었다. 세상을 불태울 것 같은 불꽃은 두렵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
리리는 턱을 한껏 올려 정수리 위로 떨어진 게 뭔지 확인했다. 곧, 물방울 하나가 리리의 눈가에 떨어져 광대를 타고 흘러내렸다.
얼어붙은 숲의 투명한 얼음 나무가 녹아 푸른 나뭇잎을 내비치고 있었다.
“녹고 있어.”
리리는 그렇게 속삭였다. 곧이어 높게 퍼져 있었던 나무들이 일시에 녹아내렸다. 완전한 얼음처럼 보이던 것들은 녹아내리며 나뭇가지가 되었고, 나뭇잎이 되었다.
불사조의 열기에 차갑게 굳어 있었던 공기가 이리저리 휘날리며 응결된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옷과 머리카락을 적셨다. 리리의 긴 흑발이 등에 달라붙어 흘러내렸다. 눈에 물방울이 들어가는데도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따뜻해.”
발을 잘못 디디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던 얼어붙은 숲이 녹아 떨어지는 물방울은 따뜻했다.
쏴아아아—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와 냉기와 열기가 뒤섞여 요동치는 바람.
그 안에 선 한 명의 뱀파이어와 한 명의 인간이 생명의 맹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선후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너머로 푸르게 불타는 영혼의 상을 보았다. ‘이게 불사조의 원래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불사조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포식자의 송곳니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불사조는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 베클레아 가의 인간이 아닌 자가 둥지지기의 불꽃을 짊어질 수 있는가.
강선후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야? 이유를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불사조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희 인간들은 모두 이토록이나 무모하냐고.
불사조의 말에 강선후는 뒤를 돌아보았다. 머레이는 검은 수정에 등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앉아 있었다.
불사조의 불꽃을 견디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었던 몸에선 모든 힘이 빠져나가 있었다.
불사조는 물었다.
정말 둥지지기 기사가 되려고 하는가?
“귀찮은 걸 많이 시키지 않는다면.”
불사조는 대답했다. 기사가 해야 하는 일은 그저 존재하는 것뿐이라고.
우리는 그것 말고는 원하지 않는다고.
강선후는 문뜩 궁금해졌다.
“불사조의 기사가 되면 나도 불사가 되는 거야?”
불사조는 되물었다.
그걸 원하는가?
강선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치의 고민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머레이에게 다가갔다. 그사이 리리는 이미 머레이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
리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머레이를 부축한 채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레이는 과거 저택에서 살던 시절 그녀를 보살펴 주던 시종 중 하나라고 했었다. 강선후는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그게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머레이는 리리에게 남은 유일한 저택의 사람이라는 것.
다른 건 몰라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가씨…….”
머레이가 입을 열었다.
“머레이? 정신이 들어? 나를 알아보겠어요?”
“아가씨입니까……?”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꽈득, 손가락을 물어 머레이의 입안에 피를 흘려보냈다.
“……로얄 블러드의 금기 모르십니까. 가주께서 그렇게나 강조하셨는데.”
“까먹었네요. 너무 오래 떠나 있어서.”
리리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리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수 년 전 신카 가의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둘은 한두 마디 대화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머레이는 신음 소리와 같이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잃었다. 강선후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머레이를 짊어지고 숲의 중앙 숲에 옮겼다.
그러고는 말했다.
“불사조. 네 전 기사에게 예의를 보여 줘.”
불사조는 그 말을 들으며 머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날개로 그를 덮어 주었다. 격렬한 불꽃인데도 그 온기는 포근했다.
강선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리리에게 다가갔다.
“……?”
리리는 강선후가 뚱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나서야 방금 자신이 뒷걸음질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래? 나 냄새나나?”
“으응…… 아니.”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흠뻑 젖은 모습에서 그 어느 때보다 피로함이 드러났다.
“당신이 거대해 보여서.”
“뭐?”
강선후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 말의 의도를 눈치 못 챈 건 아니었으나, 리리가 노골적으로 이렇게 이야기 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강선후는 이런 칭찬을 맨얼굴로 받아 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서약하면 좀 커지나?”
“나만 볼 수 있는 거야. 설명 못 해.”
리리의 붉은 눈을 보고 강선후는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둥지지기가 되었으니 새로 보이는 게 있겠지. 이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리리는 머레이를 바라보았다.
“머레이는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저 불사조가 제 친구에게 보답하는 법을 안다면.”
강선후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불사조는 십수 년 동안 제 생명을 지탱해 준 남자를 감싸는 불꽃이 되어 있었다.
“우선 볼일 보고 다시 한번 돌아오자. 운이 좋으면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으니까. 불사조랑도 더 할 얘기가 있고.”
“볼일?”
강선후는 다시 렐릭시나의 등짐에다 소지품을 정리하며 말했다.
“저택.”
리리와 강선후는 저 멀리 완만한 오르막 평야 끄트머리에서 시작되는 협곡을 바라보았다.
불사조의 부활과 동시에 안개가 걷히며 보이게 된 넓은 협곡의 한쪽 절벽, 그곳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검회색의 건물이 드러났다.
뾰족뾰족한 이미지는 강선후 세상의 고딕 양식 건축물을 연상시켰다. 좁은 지붕과 위아래로 길고 날카로운 이미지.
아무 일도 없이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흡혈귀 귀족의 저택은 이곳, 노인의 심장과 멀지 않은 곳 설산 한복판에서 고고하게 서 있었다.
우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 * *
“……집 근처에 불사조가 사는 숲이 있을 줄은 몰랐어.”
강선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올라오던 길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아래쪽 산기슭에는 이젠 푸르게 된 숲이 있었다. 그곳에서 흐르는 물줄기의 힘도 더욱 강해진 게 보였다.
위용을 보여 주었던 불사조는 지금 숲 안 어딘가에 숨어 들어가 있었다.
불사조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강선후는 거기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목적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사조를 찾아온 건, 어디까지나 불사조의 전설을 추적하다 보면 리리의 집을 찾을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았다. 드디어 신카의 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뽀득거리는 눈을 밟으며 걸어가는 동안 리리는 언제나 목에 걸어 두었던 황동 열쇠를 꺼내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의 어머니, 도이나 신카가 서지아에게 부탁하여 리리에게 전달한 물건.
「언젠가 저택으로 돌아와 지하실을 방문해라.」
그녀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남겼었다.
“…….”
강선후가 생각하기에 리리는 의외로 말이 적지 않았다. 물론 본인은 은연중에 귀족의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그게 그렇게 잘되는 편이 아니었다.
초연하게 있다가도 새끼 고양이처럼 호기심 끄는 것을 도무지 참지 못했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감상에 젖거나 간혹 흥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던 리리의 생각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리는 지금 복잡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초연한 듯 행동하고 있었으나 호흡이 가빠진 이유는 오르막길을 오래 올라가고 있는 탓만은 아니었다.
저택에 다다랐다. 애초에 침략을 상정하지 않은 강철 빗살 울타리. 철문은 열려 있었고, 마당은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은 모습이었다.
“흠.”
제국의 도시 솔라에서 봤던 저택과는 확실히 다른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문을 여는 건 리리에게 양보했다. 리리의 집이니깐.
“……응.”
리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나무 문. 그 안으로 드러나는 계단 통로와 좌우로 갈라지는 복도. 어떤 저택이든 가장 처음 만날 수 있는 공간.
바람이 들어와 소복하게 앉아 있었던 먼지들을 띄우고, 창문과 문으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그것을 비췄다.
바닥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석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리저리 가구들이 쓰러져 있었고, 계단 난간이 부서져 있었지만 습격을 받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생각보다 얌전한 풍경이었다.
둘은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딸깍—
강선후가 들고 온 손전등을 켰다.
“먼지가 너무 많아서 불꽃을 만들기는 조금 위험해 보이네. 폭발할 수도 있으니까.”
리리는 강선후가 가볍게 던진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강선후는 고개를 돌려 리리를 바라보았다.
리리는 중앙 계단의 벽에 붙어 있는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액자에는 어떤 가족을 묘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불탄 자국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강선후를 등진 채 그대로 계속 서 있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어깨. 그게 살짝 들썩이는 모습을 보았다.
강선후는 복도 쪽으로 일부러 시선을 돌린 뒤 조금 기다려 주었다.
이곳도 구경할 만한 건 많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급할 건 없겠지.
리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자.”
리리는 잠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침실이 저기에 있었어.”
“안 가 봐도 돼?”
리리는 잠시 계단 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1층의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있는 어떤 방문을 열자 바위 재질의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으며, 조금 깊이 내려가는 계단, 그리고 조금 이어지는 좁고 천장이 낮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끝에는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룬이 그려져 있는 나무문 하나가 있었다.
도끼로 내려치면 한 방에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강선후는 이 문이 과거의 습격에도 왜 돌파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중첩된 결계상의 룬. 이 정도의 룬을 구사할 수 있는 자라면 평범한 마법사가 아닐 게 분명했다.
리리는 목에 걸고 있던 황동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문에는 황동 열쇠에 딱 맞는 열쇠 구멍이 있었다.
딸깍—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리리는 강선후를 한 번 바라보고 힘을 줘 열쇠를 돌렸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누군가 당기는 듯 천천히 미끄러져 열리는 문 안쪽을 바라보는 리리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철컥—
문이 다 열리고 안쪽이 드러난 순간, 칠흑 같은 어둠만이 존재하는 작은 지하실의 안에서 리리는 어머니의 영혼을 보았다.
가시 왕관을 쓰고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여인의 모습을 한 영혼.
“……어머니?”
그건 순간일 뿐이었다. 환각이었을까?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리리는 환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쪽에는 낡고 투박한 나무 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자 위에는 가면이 올려져 있었다.
리리가 본 어머니의 영혼은 가면에 서려 있었던 영혼의 편린이었다.
전대 신카의 가주. 도이나 신카가 가진 강대했던 지배자의 상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물건에 희미하게나마 서려 있었다.
홀린 듯 다가갔다. 어느새 리리는 그 가면을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재질을 알 수 없는 새하얀색. 검게 뚫려 있는 무표정의 눈코입.
강선후가 포식자의 송곳니를 만지자마자 그 정체를 눈치챈 것처럼, 리리도 이 가면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신카 가문의 지배자의 상.
대부분의 이계인들이 그러했듯, 리리 역시 일생을 바쳐야 하는 숙명.
고대의 인물이 그 숙명을 따르는 자에게 수여한 물건.
들어오지 않고 문 건너편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강선후가 물었다.
“그게 뭐야?”
“……황금의 유물.”
“네가 타고난 상의 유물이야?”
리리는 가만히 가면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할 때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 수많은 고뇌와 갈등이 리리의 마음속을 헤집고 있었다.
“……응.”
리리는 대답했다.
“인도자의 가면. 내 황금의 유물이야.”
인도자의 가면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강선후를 속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강선후는 눈치가 빨랐고, 아는 것이 많았다.
이 사실을 밝혀 버린다면 그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리는 게 아닐까.
어린 마음은 그저 그것만을 걱정했을 뿐이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