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2
232화
ep64. 다음 탐험 준비 (3)
나는 그 오크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의 환영을 보았다. 물론 정말로 그 눈 뒤편에 불꽃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니었다.
과거, 맹수에게서 살아남아야 할 때, 말이 통할 리 없는 짐승의 눈동자 속에서 감정과 의도를 읽어 내는 법을 깨달았다. 어떻게 할 수 있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당연히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깨달았고, 깨달았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노래하는 오크의 목소리는 끔찍했지만, 그 어휘에서만큼은 지성이 보였다.
하지만 눈에서는 아니었다. 저 눈은 신의 자손이라기보단 영혼 없는 짐승의 것에 더 가까웠다. 방금 전까지 몰입해서 노래하던 오크가 왜 갑자기 저렇게 된 걸까?
리리가 말한 오크 종족 특성과 관련이 있는 걸까?
자기 감정을 주체 못해서? 날 보고?
“……?”
눈치가 빠른 차소희는 몇 초 안 되는 찰나의 시간 사이의 변화를 눈치채고 슬쩍 몸을 뒤로 기울였다. 무슨 일이 터지면 서둘러 몸을 피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오히려 좋았다. 무슨 상황이 일어나면 최대한 걸리적거리는 게 없는 쪽이 내 입장에선 훨씬 편했기 때문이었다.
리리는 한눈파는 척 윤민지가 닦고 있는 유리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손은 슬쩍 배 쪽으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미리 뒤로 빼 둔 왼손을 허리춤으로 천천히 올리고 있었다. 버뮤다가 준 쿠크리, 콜드 포레스트의 손잡이가 있는 쪽으로.
어느새 노래는 멈췄다. 그걸 눈치챘을 때 이미 카페테리아 내부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어딘가에서 짐승의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그게 오크의 커다란 콧구멍 안쪽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크가 이빨을 드러내고 호전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게 확실해진 이상 이유를 생각할 필요 따윈 없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쿠크리의 손잡이를 잡았다.
“크아아—!”
오크가 으르렁대는 순간.
콰아아앙!
예상치 못한 소리에 리리가 놀란 길고양이라도 되는 듯 솟구쳐 올랐다. 가슴 한편까지 올라와 있던 손을 깨물려다가 실패했을 정도였다. 리리가 금술을 사용하는 데에 실패한 건 순간 다행이라고 느꼈다. 요즘 너무 자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쨌든, 나마저도 순간 이 건물의 부러져선 안 될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소리의 정체는 카운터 테이블 위 유리컵.
범인은 컵을 닦던 여관 주인 윤민지였다.
딸그랑—
그녀가 내려친 유리컵 안에는 언제 넣었는지 모를 큰 얼음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찌나 강하게 내려쳤는지 얼음은 컵 안에서 빠르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한 잔?”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음이 불타고 있다면, 딱 저런 눈빛과 비슷할까?
“……아뇨.”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마시러 온 거 아니었어요? 나는 또 목말라 보이길래. 인사하러 온 거면 오늘 영업 끝난 뒤로 밀어 두고요. 한 잔 살게.”
윤민지는 그대로 오크를 주시하며 말했다.
“지금은, 바쁘거든. 장사 하느라.”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고요함, 침착함.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던 지구 쪽 사람들까지 애써 무시하며 다시금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단 한 방 만에 순식간에 정리된 분위기.
오크의 눈동자 속 불꽃은 폭풍우에 휘말린 모닥불처럼 순식간에 꺼져 버렸고, 그 안에는 전신 마취에서 막 풀린 환자 같은 어벙한 눈빛이 대신 담겨 있었다.
차소희는 벌써 저 멀리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고, 리리는 동그랗게 뜬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윤민지는 단 한 번, 컵을 내려치는 것만으로 오크에게 ‘남 장사하는 데에서 깝치지 마라’라는 신호를 완벽하게 보냈던 거다. 천공의 기사가 내뿜는 투기가 떠오를 정도였다.
그 순간.
빠악—!
누군가 바람처럼 다가와 오크의 머리를 후려쳤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상황, 그리고 나는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코미디 꽁트 같은 이 상황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그사이에 그걸 못 참고 새꺄! 개똥 같은 천성에 휘말려! 어! 그러고도 네가 노래꾼이냐!”
“아 씨! 아프잖……!”
“대가리 박고 사과해 배추 뿌리처럼 생긴 놈아!”
도끼를 등에 멘 뭔 털복숭이 바바리안이 오크의 뒤통수를 박고 짓눌렀다. 오크는 저항하지 않고 그 손길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더니, 꾸벅, 바바리안도 내게 허리를 굽혔다. 이계식 셔츠와 조끼 너머로도 보이는 근육의 꿈틀거림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등에 멘 거대한 도끼도.
베이스캠프는 무기를 소지하고 진입하는 걸 금지한다. 최소한 외부 이계 사람들에겐 그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근데 저건 뭐지.
“미안하게 됐수다!”
“……뭐가요?”
“짐승 새끼가 이빨을 드러내면 목줄 안 한 주인 잘못 아니겠소! 오크란 놈들은 원래 공격성을 주체 못 해서 동경이랑 분노를 구분 못 짓는 똥멍청이들이니 이해 좀 부탁하오!”
이계의 언어였다. 아니, 그렇긴 했는데 못 알아들을 정도의 억양과 단어들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사투리 같다고 해야 하나? 리리와 영혼을 연결한 덕분에 알아듣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사죄의 의미로 자! 가서 앉으시지!”
“…….”
“한 잔 사 드려야 하지 않겠나! 그게 의와 도리이거늘.”
팡-! 팡-!
내 등을 두드리더니 오크의 민머리 가죽을 그대로 붙잡고 끌고 가는…… 바바리안? 뭔지 모르겠네.
대머리가 머리채를 붙잡히고 끌려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뜩 윤민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뽀득, 뽀득.
눈을 반쯤 감은 채 접시를 닦고 있던 윤민지는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손바닥을 곧게 펴고 바바리안이 가는 자리를 가리켰다.
괜찮으니 맞춰 주라는 이야기구만. 나도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바바리안에게 걸어갔다. 어차피 오크가 한 노래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야 했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는 자리였다.
얼떨결에 따라오는 차소희에게 넌지시 물었다.
“민지 씨 기 센 건 알고 있었는데, 저 정도였어?”
“이 여관, 주인 바뀌고 나서 영업방해 사건 한 건도 접수된 적 없어.”
“…….”
송곳니를 드러내는 오크 앞에서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이 마을에서 윤민지 한 명뿐일 거다. 그렇게 확신했다.
저게 생업을 지키고자 하는 자영업자의 힘인가.
* * *
윤민지는 유창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이계의 언어를 구사하며 주문을 받았다. 간단한 음식과 음료가 나오는 사이를 못 참고 근육질 바바리안은 입을 열었다.
“내 정식으로 다시금 사과하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소!”
자칫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러 문화를 경험해 본 내 시선에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사실 화가 날 법한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난 터라 애초에 사과를 받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나는 바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궁금증은 간단했다.
바바리안은 첫인상만큼이나 단도직입적으로 호탕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바드요. 별 노래자(stella singer)들이지! 이놈은 내 직계 제자고!”
“……별 노래자?”
리리가 내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바드는 그냥 노래꾼이 아니야. 물론 그냥 노래만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론 꿈을 통해 성좌의 이야기를 듣고 그걸 각색해서 세상에 퍼트리는 자들. 단절된 풍화의 시대에서 이야기만큼은 맥이 끊기지 않는 이유야.”
“똑똑한 아가씨구만! 우리 새끼가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
그러더니 위축되어 앉아 있는 오크의 등을 두드렸다.
“사과 안 해 인마!?”
“아니, 이건 오크한테 굉장히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잖습니까!”
“아니, 한 번만으로 충분해요. 같은 말 계속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는 오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신에 왜 그랬는지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따지려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스승이라는 바바리안이 대신 대답했다.
“이 똥 같은 놈들은 다른 모든 감정하고 분노를 구별하지 못해. 좀만 감정이 격해졌다 싶으면 지가 빡쳤다고 생각하고 눈 돌아가서 달려들지. 미친놈들 같으니…….”
“아니라고!”
“반말?”
“요!”
오크가 격정적으로 말했다. 또 빡친 거 같은데.
게다가 저게 오크 맞나 싶기도 하다.
리리 말마따나 오크는 언제나 극단에 있는 종족이라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들은 게 있으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오크는 자랑스레 일어나서 외쳤다.
“우리는 전사의 일족이다! 전사의 영혼을 가진 이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동경을 결투 의지로 승화시키는 건 자연스러운……!”
빡!
“술집에서 박수를 받아야 할 놈이 눈총이나 받고 쫓겨나기 직전인 게 그래서 잘났다고? 마!”
아무래도 오크가 그냥 맞고만 있는 건 스승의 손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싸워서 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대한 피지컬이었다. 겉보기에는 인간인데도 말이다.
그 모습은 재밌었지만, 가만히 구경이나 하기엔 이들에게서 얻어 내야 할 게 많았다.
“그 노래 가사 속에 룬이 있었어요.”
“……?”
바바리안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바드의 노래는 간혹 룬처럼 들리기도 하지. 이놈 훈련이 비로소 성과를 좀 얻었나 보구만!”
“아뇨. 진짜 룬인데.”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스텔리아 인 사티아stellia en satia.”
노래 가사 여기저기에 쪼개져 있긴 한데 모아보자면 이런 식이었다. 이게 하나의 문장이라는 건 직감적으로 느꼈다.
생각에서 벗어나 정신 차려 보니 다시 한번 주점 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순간 살짝 실수했음을 느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룬을 내뱉다니.
“……오랜만에 집으로 왔더니 감을 잃었네.”
나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다. 어차피 차소희가 해 놓은 것 덕분에 지구인 중에서 날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었고, 이계 쪽 사람이 내 룬을 듣고 놀라는 건 너무 익숙해서 별 감흥도 없었다. 귀찮아지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너.”
그런데 지금 상황은 이상했다. 내 옆에 자주 있어서 조금 룬에 익숙한 차소희가 놀란 눈을 하는 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리마저 저 표정인 건 뭔가 이상했다. 얘는 내가 왕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까지 들었던 애니까.
왕의 언어를 처음 들었을 때만큼 놀라진 않았지만, 그래도 평범한 룬을 들은 표정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관건인 건 바바리안과 오크의 표정이었다. 이들은 마치 동네 주점 냄비 받침이 고대신의 금서라는 걸 눈치챘을 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바바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걸 알아들었다고?”
“……들리더라고요.”
바라리안은 갑자기 깊어진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건 유대의 룬 언어인데.”
“유대의 룬 언어?”
리리가 되물었다. 역사와 신화에 박식한 리리마저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정확한 이름이 없어서 바드마다 부르는 이름은 달라. 우리의 노래가 성좌의 전언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뱀파이어?”
갑자기 말투가 바뀐 바바리안의 말에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성좌는 일종의 룬을 노래 가사에 넣는 경우가 있소. 우리조차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거요. 우리가 그 현상을 부르는 이름 중 하나가 유대의 언어고.”
“……그럼 그냥 룬 아닌가? 굳이 유대의 언어라고 특별하게 부르는 이유는요?”
“…….”
바바리안도, 오크도 함부로 말을 잇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주저였지만, 이어서 할 말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동족이나, 동족이 될 자만 들을 수 있는 언어라고 하니까.”
“동족?”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동족이 무슨 뜻일까?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노래 가사를 들려준 자가 누군지는 이미 설명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성좌가 될 자격을 갖추었거나, 이미 성좌거나, 아니면 성좌가 자신의 자리를 마땅히 내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은혜를 입었거나.”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