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ep66. 별의 무덤 (1)
“뱀파이어 귀족님이요? 그때 그분의 눈은 뭐라고 해야 할까…….”
쉴쿨은 모닥불 앞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타닥 하고 연료가 타오르는 소리가 두어 번, 그리고 쉴쿨이 송곳니를 긁적이는 까끌까끌한 소리가 조금 들린 뒤 말을 이어 나갔다.
“잘 모르겠네요. 거참, 묘하더라고.”
“표현도 제대로 못 하고 그러고도 네놈이 노래꾼이냐 이 얼빵한 녹색 곰팡이 새끼야!”
“뭐! 곰팡이? 잠깐 생각 중이라고요!”
“그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게 문제라는 거다! 듣는 사람들이 그런 거 기다려 준대? 침묵이 한 리듬 이상 유지되는 그 순간부터 무대는 망한 거다!”
쉴쿨과 나쉬르가 다시 으르렁대는 동안 나는 생각에 잠겼다.
쉴쿨은 먹구름의 짐승과 싸우던 때를 말하고 있었다. 그때 리리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쉴쿨 뿐이었고, 나는 리리의 혈술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파괴력을 보았다.
‘혈술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힘을 이용한 기술이야. 우리는…… 강한 자를 포식하는 자들이었으니까.’
리리에게 혈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뒤 낸 아이디어였다. 우리 세상에서도 출력 강화를 위해 한쪽 면에 차양막을 설치하는 원리는 여기저기에서 자주 사용하곤 했으니까. 간단한 아이디어였을 뿐이다.
“……그게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을 뿐이지.”
리리의 유물인 인도자의 가면은 수치심과 죄책감, 공포,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을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 것이라고 했다. 그것만으로 저런 힘을 낼 수 있다니.
대체 무엇에 대한 수치심이길래 감정이 힘을 억제하고 있을 정도가 되는 걸까.
이건 순수한 궁금증이지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힘을 억제할 정도의 수치심이라면 겉으로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실례일 테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궁금한 것도 아니고.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전투 중에 리리가 즐기는 것 같았다고요?”
“네, 뭐랄까……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식탁을 앞에 둔 아이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래. 그 정도는 설명해야 시인이지. 넌 진짜 많이 배워야겠다.”
“아무렴요. 누구 제자인데요.”
둘이 다시 으르렁거리려는 찰나 리리가 돌아왔다. 리리는 망토를 벗어 텐트 위에 망토를 아무렇게나 널고는 묶은 머리를 풀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그냥 이런저런 얘기. 웬일로 혼자 정찰 갔다 온다고 했어?”
“바람 쐬려고. 생각 정리할 것도 좀 있고.”
리리가 말꼬리를 미세하게 흘린다는 걸 포착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모닥불 앞에 앉으며 정찰 정보를 말했다.
“다행히 악마나 그쪽 오염 생물들은 잠잠해. 별일도 없는 거 같고. 당신은 알겠지만 이제 곧 있으면 남부 접경지대잖아. 대악마는 해치웠지만 여전히 안전한 곳은 아닐 테니까 긴장해야겠지.”
“잠깐.”
나쉬르가 끼어들었다.
“……대악마 가롯을 말하는 것 맞는가?”
“네. 알고 있네요?”
“그게 사라졌다는 것도 알지. 그런데 방금 말이 좀 이상한데?”
나쉬르는 그래도 시인이라고, 단어나 표현 한마디에 민감한 반응을 자주 보였다.
“해치웠다니, 무슨 말이지?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요?”
항상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는 멈칫하고는 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제는 정말로 별생각이 들지 않기 시작했다.
‘이거 위험한데.’
리리가 말하는 ‘즐거움’이 이건가?
뭔지 알 거 같아서 살짝 두려워진다. 근데 그 두려움마저 즐겁다는 모순이네.
리리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해치웠어요.”
“우리가 해치웠어요.”
리리는 눈을 끔뻑였고, 나는 리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웃지 못한 사람은 바드들 뿐이었다.
“……나는 가롯에 대해서 잘 아오. 내 첫 노래가 가롯에 대한 노래였으니까. 나는 가롯과 남부의 별을 연구하는 노래꾼이었으니까.”
나쉬르는 내가 가롯을 처치했다는 것에 대해 예상보다 훨씬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가롯은 남부의 별을 연구하고자 하는 바드들의 적이었소. 별의 무덤이 남쪽에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곳에 도전조차 할 수 있는 바드는 극남부 출신의 소수뿐이었지. 세상을 조각낸 장벽의 저주와 가롯 때문에.”
딸그락.
나쉬르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언제나 등에 메고 있었던 도끼를 풀어 땅에 내려놨다.
“무기는 갑자기 왜 풀어요?”
“서북부 산맥의 드워프 전통이요.”
나쉬르는 그렇게 선 채,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은인에게는 반드시 예를 표해라, 은인의 그림자 앞에서는 무기를 들지 말아라. 그를 지킬 때 빼고는.”
“……내가 왜 그쪽 은인인데요?”
“바드들에게 남쪽 길을 열어 준 장본인. 전설 속의 영웅 엘드리치가 당신이기 때문이지.”
“엘드리치에 대해서 안다고요?”
나쉬르는 고개를 들고, 깊고 진지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말했다.
“엘드리치의 전설에 대한 노래를 퍼트린 게 바로 나니까.”
“…….”
남부 접경지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전설이 퍼지고, 나크샤론들이 제 조상에 대해서 연구한 게 이 사람 때문이라니.
이계에서의 운명이란 특별하다.
운명의 신이라도 존재하는 걸까?
에이, 몰라.
털썩. 나는 그대로 뒤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드디어 내가 모르는 곳으로 진입한다.
스텔라리움과도 그렇게 멀지 않겠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거리가 아니라 답이니까.
그래도 방금 한 이야기 중에서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이 동네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게 하나가 있네요.”
이 동네 사람인 리리와 쉬쿨, 나쉬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문화, 모든 종족이 은인에 대한 예를 의무라고 말하잖아요.”
지구의 생활에 이미 많이 적응한 서지아마저 그랬다. 심지어 그 녀석은 빚을 갚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별것도 아닌 일에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했었지. 물론 리리는 엘프가 특히 그런 점이 심하다고 설명했었지만.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풍화의 시대 구성원이라곤 하지만, 황금의 율법이 준 영광은 우리의 영혼에 새겨져 있으니까.”
나쉬르가 말했고, 쉴쿨이 그 뒤를 이었다.
“그게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저는 배웠는데요.”
“누가 가르쳐 주더냐?”
“당신이 알려 주지 않았습니까. 운동만 하다가 뇌도 근육으로 바뀌셨어요?”
빠악—!
나는 낄낄 웃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일어나려면 다들 잘 자야 할 텐데.
* * *
“에, 에, 엘드리치시여……?”
나크샤론 여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푸르딩딩하고 죽은 것 같은 피부는 여전하다.
“오랜만이에요. 그…….”
“……텔라테리 님. 잘 지내셨나요.”
“네! 덕분에…… 덕분에 이렇게 잘 지냈죠……! 후아……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사, 사절이라도 보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텔라테리의 푸르딩딩한 광채를 발하는 작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리가 어울리지 않게 먼저 인사했다. 내가 이름을 까먹은 게 이 사람들에게 실례지 않을까 싶어서 먼저 선수를 친 거다.
……근데 솔직히 기억 안 날 만하잖아. 텔라테리라니, 들어 본 적도 없는 스타일의 이름이라고.
나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언데드의 후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특이한 종족이다. 종족의 선조는 언데드인데, 거기에서 비롯된 후손들은 당당히 영혼을 얻은 생물이자 신의 자손으로 편입되었으니까.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고, 이들도 연구 중이다.
하지만 그 선조의 사정은 나도 잘 알고 있지.
“아버지.”
여전히 펑퍼짐한 로브를 입고 있는 인간 여성, 아니 정확히는 인간이었던 언데드 여성. 오히려 텔라테리보다 더 생기가 느껴지는 나크샤론의 선조이자 최초의 부활자.
하바가 내게 얌전하게 예를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그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애초에 이 정도 시간 가지고 오랜만에 만났다고 유난 떨 사이가 아니다. 우리가 지난번 만남을 위해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셀 수도 없으니까. 물론 내가 기다린 건 아니지만.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내 목적지를 듣고 반색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텔라테리였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별들이 괜히 떨어진 게 아니었어. 하지만 그건…….”
텔라테리는 하바를 바라보았고, 하바도 깊은 눈으로 텔라테리를 바라보았다.
“전혀 좋은 현상이 아니지 않을까요…… 어머니.”
“제 생각에도 그래요.”
나는 그들이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남쪽의 낙성 현상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뭔가를 알아낸 모양인데.
그들은 뜸 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알아낸 걸 내게 말했다.
“엘드리치시여…… 당신께서는 기억을 못 하는 거 같지만…….”
텔라테리는 평소보다 더 우물쭈물했고, 하바가 대신에 말을 이었다.
“이 시대의 별빛은 제가 살던 시절보다 훨씬 미약합니다.”
“……?”
하바는 고대의 사람이다. 그리고 필멸자인 만큼 별에 관심이 많았을 거다. 별은 성좌를 희망하는 필멸자와만 관계가 있을 뿐, 불멸자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였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별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요.”
“…….”
텔라테리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이건 과하게 학술적인 이야기라 엘드리치께서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텔라테리는 종이를 펼쳐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숙한 형태의 기하학적 도형과, 여러 룬을 모사한 상징이었다.
“머나먼 어둠을 연구하는 학문이 있습니다. 우주학이라고 하는데…… 우선 복잡한 이론은 다 자르고 이야기하자면, 성좌가 빛을 잃다가 어느 기준점을 지나면 스스로 붕괴하여 흑성이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 기준을 스텔리오 한계선이라고 하는데…….”
“지금 별들이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요?”
“아마…… 위대한 암흑시대(great darkness)가 도래할 수도…….”
우리 세계에도 우주 멸망 이론이 있다. 빅 프리즈라든가 빅 립이라든가. 진공 부패라든가…….
멸망에 대해 상상해 보는 건 이 세상도 마찬가지인 모양인데.
차이가 있다면, 지금 그 멸망이론 중 하나가 가까운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이 주장이다.
“……가능성이 높은가? 아니, 나도 별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그런 건 아예 듣도 보도 못했네. 위대한 암흑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게 가까워졌다는 건…….”
가만히 듣던 나쉬르가 조급하게 물었다.
“학문이라는 게 항상 통계이긴 한데…… 할 수 있는 만큼은 반드시 대처해야 하는 정도의…… 가능성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별빛이 아주 조금씩, 점점 약해지고 그게 붕괴의 한계점에 다다르기 시작했다는 점.
만약에 이 말이 맞다면 남쪽의 낙성 현상은…….
“스텔라리움은 별의 무덤.”
쉬쿨이 말했다.
“성좌께서 뭔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스텔라리움으로 향하는 나를 성좌들이 바라보는 이유가 처음에는 그저 재미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반드시 거기에 도달했으면 하는 바람일 수도.
“별이 어두워지는 이유는?”
하바도, 텔라테리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나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한 지식이 담겨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거 같으니까.
지금 내가 그곳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