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5
25화 – ep.10 나이프와 망토, 덧옷 (1)
***
이 이야기를 들은 이상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정해졌다. 남쪽에 숨겨진 이계인들의 마을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정보였지만, 무엇보다 윌슨이란 단어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가기에 앞서 제일 걱정이었던 건 의사소통이었다. 나는 룬언어 빼면 이계인들이 쓰는 말을 거의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나랑 영혼 연결을 했으니까, 내가 하는 언어는 다 할 수 있어. 뱀파이어가 인도자의 상을 타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거든.”
라고 리리가 이야기해줬다.
자기는 대륙 전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16개의 언어에 통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도자를 계승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지?
솔직히 놀라웠다. 나는 영어도 못 하고,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룬 언어인데.
“···이게 귀족의 품격? 사교육의 순기능?”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리리는 내 시선을 회피하면서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말투와는 별개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피부 때문인지 감정변화가 그대로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집 잘 지키고 있어.”
어쨌든 쉴 시간은 없었으니 동화석과 칼날 발톱을 들고 버뮤다 숲으로 향했다.
황무지를 지나서 도착한 버뮤다 숲.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안녕.”
버뮤다 숲은 내 인사를 받아주는 듯 몸을 흔들었다.
“메에에—.”
붉은 숫양이 천천히 걸어 나오며 나를 반겼다.
보통 숲은 영물을 외부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숲 그 자체인 동물이니, 어딘가에 꼭꼭 숨겨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이건 버뮤다 숲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였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는 알고 있어?”
“메에에—.”
숫양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듯, 머리를 휘적휘적하더니 숲의 중앙으로 나를 안내했다.
기생체에게 양분을 뺏기는 바람에 중앙부가 통째로 괴사했었지.
양분이 어마어마하게 저장되어 있는 번데기의 반절 정도를 일부러 내버려 두고 갔는데, 괜찮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숲의 심장까지 도달한 내 표정이 절로 환해졌다.
아직 시든 부분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딱 봐도 건강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더욱 무성해진 것 같기도 했다.
“어려서 그런가? 회복이 빠르네.”
정말로 다행이었다. 현실도 마찬가지지만, 이계도 역시 숲이 주는 자원은 절대적이다.
내 사무소 근처에 제대로 된 숲은 버뮤다가 유일한데, 이게 없어지면 나로서도 꽤 골치 아픈 일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메에에—.”
“다행이네. 짜식아.”
붉은 새끼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했다.
숲과 오래 붙어산 경험 탓일까,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 이제 보답을 받을 차례야. 우리 세상에는 기브 앤 테이크라는 말이 있거든?”
알아들을 리 없지만 상관없었다. 말은 몰라도 이 의미는 이미 숲의 마음속에 있었을 테니까.
칼날 손톱과 동화석을 내밀었다.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리리에게 들은 상태였다. 숲에게 부탁하고, 숲이 자신의 에너지를 일부 사용해서 동화석과 칼날 발톱을 섞는다.
‘숲의 도움을 받는 건 딱 그 정도야. 검날이 만들어지고 나서 개조는 스스로 해야 해. 숲이 도와주기만 해도 다행인 거지만.’
리리는 딱 이렇게만 설명했고, 나도 납득했다. 숲이란 녀석들은 생존투쟁 때문인지 꽤 각박한 면이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감지덕지라는 거다.
그런데, 버뮤다 숲 녀석이 생각보다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냐면, 땅이 울리는 진동을 내가 느낄 정도로.
땅에서 초록색 넝쿨들이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그리고 칼날 발톱과 동화석들을 허공에 들어 올린 뒤.
촤아악—!
수십의 덩쿨이 소재들을 둘러싸 반죽을 하듯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작업에 들어간 거다. 나는 감탄하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리가 아니었다면 이걸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지.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소재를 둘러싼 넝쿨이 사라지자 허공에는 묵직한 형태의 검날이 매달려 있었다.
길이는 날만 50cm 정도, 쿠크리(Kukri)와 비슷하게 생긴 나이프였다.
이전에 칼날 발톱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전혀 다른 형태였다.
의문인 건, 아직 손잡이가 없이 날만 있는 상태였다는 것.
이어서, 숲의 심장에서 나무가 하나 자라기 시작했는데.
“···야.”
오히려 이 시점에서 내가 당황했다. 숲의 심장에서 자라난 나무는 신목(神木)이다. 그 숲의 모든 정기가 응축되어 담겨 있는 칠흑처럼 검은 나무.
불이 붙으면 절대로 꺼지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담겨 있는 나무인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코어(core) 역할을 하는 나무였다.
그런데.
텅—!
버뮤다 숲은 기어이 신목을 베어내어 손잡이를 만들어냈다.
천천히 내 발치에 나이프를 내려놓는 넝쿨들.
“···진짜 괜찮겠어?”
“메에에—.”
버뮤다 숲은 여유롭다는 듯 울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어떻게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이런다고 신목이 죽진 않겠지만, 녀석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준 거였다.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을 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검을 들었다.
“···오.”
들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의외로 묵직한 느낌에, 무게중심이 칼끝을 향해 있어서 베기에 적합했다. 나이프라기보단 도끼에 가까운 무게감이 느껴졌다.
스응— 스응—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함이 공기를 소리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건 명기다. 탐험용 나이프를 꽤나 수집해본 내가, 생존을 위한 전쟁터에서 오래 살아본 내가 확신했다.
쥐는 순간 손바닥에 달라붙는 듯한 이 느낌. 나이프를 팔의 연장선이라고 느낄 정도의 일체감.
그리고.
촤아악—!
잘린 나무의 단면이 매끈하게 뻗어 나갈 정도의 예리함. 그리고 절대로 이가 나갈 거라는 상상조차 들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은 경도.
수백만 원을 주고 구매한 유명 브랜드의 정글 나이프가 발끝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게다가.
“······.”
검 손잡이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내 몸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알게 모르게 누적된 피로와 데미지를 폭포로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검을 내려다보았다.
옻칠이라도 한 것처럼 새까만 나무로 만들어진 손잡이. 그걸 부여잡은 내 손을 타고 어떠한 기운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몸을 끊임없이 치유해주는 숲의 기(氣).
“······.”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건 단순히 이계의 소재로 만든 좀 단단한 나이프가 아니었다.
아티펙트.
이계의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물건. OWIC에서 그걸 아티펙트라고 부르지 아마.
숫양과 나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저 얼굴에 표정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자부심이 가득해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잘 쓸게.”
“메에에—.”
남은 칼날 발톱 세 개를 내려다보았다.
나이프는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램 이즈 킬로그램.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건 거추장스럽기만 하니까.
그렇다면 저걸 가지고 뭘 하면 좋을까.
여유롭게 생각하기로 했다.
“네가 맡아줘.”
“메에에에에에——.”
나중에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본다. 있는 걸 한 번에 다 쓸 필요는 없으니까.
숲과 작별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산책하는 느낌으로 숲 외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향기로운 미풍이 불어오는 게, 딱 봐도 버뮤다의 기분이 좋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정을 되찾아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숲의 영역에서 벗어났고.
“크르릉······.”
스캐븐 울프 한 무리와 마주쳤다. 총 세 마리.
사실 꽤 멀리서부터 낑낑대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버뮤다 숲이 이 녀석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스캐븐 울프도 어쨌거나 숲 생태계의 일원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들의 면상을 보자 감이 잡히는 게 있었다.
“아··· 그때 그놈들이구나?”
예전에 나한테 우두머리를 털리고 도망친 녀석들.
내 기억으로는 총 네 마리가 도망쳤는데, 한 마리는 어딘가에서 비명횡사한 모양이지?
“컹! 컹!”
스캐븐 울프는 원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끝까지 따라가서 복수하기로 유명한 녀석들이었다.
나는 손에 든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타이밍이 나쁘지 않은데?”
세 마리, 빡세긴 하지. 이전에 썼던 수법은 아마 통하지 않을 거다. 이 녀석들은 학습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컹—!”
맨 앞, 덩치가 제일 큰 녀석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 발톱이 내 어깨를 향해 살짝 파고든 그 순간.
파아아악—!
“캐갱!!”
내 뒤에서 넝쿨이 쇄도하여 스캐븐 울프를 그대로 꿰뚫었다.
“너희들의 보금자리가 지금 누구 편인지를 알아야지.”
검을 한 바퀴 돌려 해머 그립(hammer grip)으로 움켜쥔 다음, 방금 달려든 녀석의 목을 따버렸다.
지난번에는 쫓아내는 데에 온 힘을 다 썼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가죽이 다치지 않게, 아주 정성을 다해서 멱을 따주마.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낮췄는데.
시이이······
왼쪽 귓가에 이명처럼 맴도는 미세한 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려보았다.
예리한 손톱에 찢긴 재킷. 그 아래에 난 상처가 미세하지만 눈에 보이는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또 해야겠네.”
뒤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
스캐븐 울프를 짊어지고 복귀했다.
그런데, 조용해야 할 내 오두막에서 실랑이하는 듯한 목소리 두 개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다가가 보니, 차소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노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이, 참. 우선 그 애 생각부터 들어보고 결정하자니까요?”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체격의 노인은 번데기의 외피와 고치의 실뭉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보고 말고 할 게 어딨어! 이 정도 되는 물건을 뭐, 이불로 쓸겨? 아니면 구워먹을겨? 껍디가 맛있는 거긴 하다만!”
“아잇, 진짜!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하셔?”
“이런 걸 보고 어떻게 참아! 심장이 불타는 장인의 열정을 무시허는겨?”
“어······.”
내 표정은 제법 바보 같겠지. 그야 당연했다. 마을 외곽에 있는 내 적막한 안식처에서 때아닌 소란이 있었으니까.
“어, 잘 왔네. 선후냐?”
“맞는데요. 그······.”
“어깨에 짊어진 건 뭐여? 허, 참. 신통한 놈일세.”
노인은 내가 짊어지고 온 것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텅—.
축 늘어진 스캐븐 울프의 시체를 땅에 내려놨다. 무게가 상당하고 손이 부족한 터라 다 가지고 올 순 없었다. 숲에 공급할 영양도 필요했을 터, 나머지 사체는 기꺼이 버뮤다 숲에게 넘겼다. 기꺼이 힘을 써준 데에 대한 가벼운 보답이었다.
“헤헤, 왔어? 오자마자 소란이지? 미안해.”
“누구신데? 고객인가?”
차소희와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깐, 이 둘이 왠지 닮은 구석이 있는 거 같은데.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청 하며, 활기차고 당당한 태도를 대변하는 듯한 몸짓···.
“이놈아! 장인어른을 못알아 뵈? 너 2년동안 어딜 갔다 왔길래 코빼기도 안 보였어? 엉?”
“네?”
“우리 소희가 니 돌아온 날 술 쳐먹고 와서 질질 짜고 무슨 난리를 쳤는지 알어?”
“아니, 아빠! 진짜 미쳤어!?”
“미쳤냐고! 가시나가 애비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기억났다.
차소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였다.
차소희는 늦둥이라, 부모님은 연세가 좀 되시는 분들이셨다. 아버지인 차태식 씨는 집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분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등학생 때 내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는 차소희는 일부러 가족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일도 거의 없어졌고, 애초에 몇 번 뵙지 못한 분의 얼굴을 기억하기에는 관심 없는 것에 대한 내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야 알았다.
“···미국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셨다고요?”
“그려. 거, 차원문인지 뭔지 열리고 나서는 한국에 들어왔으니 옛일이지만.”
차태식 씨는 사업 수완이 좋은 분이었다. 차원문이 열리고, 새로운 소재에 관한 관심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 가치를 먼저 꿰뚫으셨다고 했다. 바로 사업장을 열어 미국에서 갈고닦은 기술을 발휘하기 시작하셨다고.
남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 이미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반년 치 의뢰 예약이 걸려 있는 장인이 되었다는데.
그 말뜻은.
“내가 해 줄게!”
“어······.”
“거죽으로는 롱재킷 만들고, 천잠사로는 망토를 만든다구?”
“어, 천잠사요?”
“이거, 실 말여 실!”
아, 이거 고치에서 나온 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이게 아마 처음 보는 소재들일 텐데······.”
“딱 보면 알어! 이계에서 나온 것들은 나한테 말을 걸거든! 이렇게 이렇게 해달라! 하고 딱! 알려준다 이 말이여!”
“어이구, 허풍은 참.”
아직도 저렇게 정정하시다니. 저 나이에 이계 진입 충격마저 견딜 수 있는 정도면 얼마나 체력이 좋으신 걸까. 나도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차소희는 아버지가 멋대로 쳐들어온 거에 대해서 미안해하는 눈치였는데, 나로선 그저 잘된 일일 뿐이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런데, 이것밖에 없어? 거죽 한 종류로만 만들면 난중에 여기저기 뒤틀리는디. 이번에 들어온 쇠가죽이 기가 맥히는데 그걸 좀 쓸까?”
“저건 어때요?”
내 뒤에 축 늘어져 있는 스캐븐 울프 시체를 가리켰다.
“음, 좋네. 털가죽이고, 그럼 더 기능성으로 만들 수 있고. 잘하면 방수기능도 되겠는데? 좋아. 쭉쭉 가자고. 더 할 얘기 없지?”
“잠깐, 그, 비용은요?”
“비용?”
팡! 팡!
차태식 씨는 호쾌하게 내 등을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으억···.”
“니미럴 비용은 무슨 비용! 내가 우리 사위한테 점수 좀 딴다는데! 어!”
“아빠! 진짜 쪽팔려 죽겠으니까 제발 그만!”
“나중에 술이나 사!!”
···좋은 게 좋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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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0. 나이프와 망토, 덧옷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