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54
254화
ep71. 지키는 자의 창, 나아가는 자의 불꽃 (1)
리리는 피의 증기를 전방으로 전개했으나 냉기는 속절없이 그 방패를 뚫고 몰아닥쳤다.
딸그락—
미리 꺼내 놨던 가면이 땅으로 떨어졌다. 저걸 뒤집어쓴다면 혈술의 억눌러진 힘을 모두 개방할 수 있을 테지만, 본능적으로 느꼈다.
‘소용없어.’
모든 힘을 다하더라도 지금 눈앞에서 몰아치고 있는 저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눈을 떴다. 모두가 극한의 폭풍 속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강선후는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헤이마heima. 고어로 겨울을 뜻하는 이 단어가 묘지기의 이름이 된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신의 묘지를 지키는 존재는 겨울이라고 불리우는 존재 그 자체였다.
“으윽……!”
간신히 눈을 뜨자 눈가부터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리리는 이미 온몸의 감각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뱀파이어는 냉기에 강한 종족이었다. 그렇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강선후, 엘신, 아르고는 그럴 수 없었다. 이들 모두 외피 없이는 설산에서도 못 버티는 이들일 텐데. 이런 냉기를 눈앞에서 맞는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리리의 한 발이 앞으로 나가 있었다. 피부가 찢기는 느낌이었으나 발을 멈추지 않았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으로 인해서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고.
“…….”
얼어붙은 별, 묘지기의 얼굴 안쪽에 있는 그 눈과 다름없는 별을 바라보자 영혼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해.
이 생각뿐이었다. 어떠한 사명 때문도 아니었고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희생도 아니었다. 그런 복잡하고 무거운 것들을 생각할 정신 따위 없었다. 그저 해야만 한다.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이런 단순한 생각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머릿속을 잠식했으며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헤이마도, 얼어붙은 별이 뿜어내는 냉기도 아니었다.
뒤로 밀리는 걸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일행들 저 앞에 선 채 홀로 냉기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뭐 하는, 으윽…….”
리리는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강선후였다.
조금 진정하자마자 지금 이 풍경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선후는 온몸으로 냉기의 폭풍을 맞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신마저 그 금발과 눈썹이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훨씬 더 단단한 종족인 엘프마저 저 바람을 견딜 수는 없었다.
물론 저 남자는 대단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몸은 인간이지 않았나?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야?
그때 강선후의 재킷 깃에서 희미한 붉은빛 하나를 보았다. 강선후는 옷깃에 매달아 두었던 배지를 빼서 손 위에 올려 두고 내려다보았다.
둥지지기의 휘장. 불사조와 서약한 기사의 상징.
그것이 갑자기 빛을 발하는 의미에 대해서 깨닫기도 전.
몸이 녹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왼쪽 뺨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들이친 어둠 덕분에 불꽃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작은 점이었던 불꽃은 점점 거대해졌다.
불꽃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표출하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휩쓸고 지나온 모든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연기와 화염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불꽃은 생명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생명은 마땅히 불꽃을 품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걸 증명하는 한 새가 있었다.
세상을 얼어붙지 않기 위해 빙하의 씨앗을 제 알처럼 품었던 새였다.
냉기와 맞서는 걸 숙명으로 여겼던 불사조는 이제는 겨울과 대적하고자 했다.
어둠뿐인 하늘을 불꽃의 비단으로 장식하던 불사조는 어느 순간 나선을 그리며 급강하했다. 불꽃의 첨탑 되어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던 묘지기를 드러냈다.
다리 위로 쇄도한 불꽃의 날개는 강선후, 더 나아가 그의 일행 모두를 품에 안았다.
리리는 굽혔던 무릎을 펴 몸을 일으켰다. 살을 찢어 버릴 듯한 차가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숲을 태우는 거대한 화재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이었으나 뜨겁지 않았다.
얼어붙은 별이 뿜어내는 겨울의 기운은 불꽃을 품은 날개 앞에서 흩어졌다.
강선후는 배지를 다시 옷에 매달았다.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넓은 범위에 흩어져 있었던 불사조의 불꽃은 그의 앞에 모여 거대한 구의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화살이 쏘아지듯, 냉기를 뿜어내는 헤이마의 얼굴을 직격했다.
“으읏!”
안개처럼 깔렸던 어둠이 뒷걸음질 칠 정도의 섬광이 몰아닥쳤다. 거대한 냉기를 뿜어내던 깨진 구멍이 불꽃으로 틀어막혔다. 묘지기의 머리가 뒤로 기울었다.
“지금 가야 해!”
묘지기로 인해 가로막혔던 길이 다시 뚫렸다. 강선후가 만들어 낸 공간의 흐름은 여전히 지속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면 갈 수 있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말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서쪽을 향해, 왕의 무덤이 빛을 뿜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위에서 무수히 많은 유리 조각이 떨어지고 있었다.
쾅! 콰앙—!
운석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조각들 사이를 내달렸다. 먼지와 나무 파편이 높게 솟아 올랐다. 묘지기는 양손을 들어 자신과 대적하는 새를 떼어 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모두가 이상함을 느끼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공간의 바람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군요.”
엘신의 말대로였다. 순풍을 품은 배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할 터인데, 이들의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빨라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쾅—!
“으읏—!”
“괜찮아?”
“괜찮아. 그냥, 조금 긁혔어.”
리리의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강선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겨울의 냉기는 불꽃에 막혔다.
하지만 여전히 묘지기는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긴 한 건가?
엘신은 묘지기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있었다.
“신의 묘지는 묘지기의 영역이에요. 이 공간마저 그의 소유일 겁니다. 그는 신의 죽음에 매료된 성좌기에, 그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스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냉기는 막을 수 있겠지만…… 과연 그를 막을 수 있을까요.”
콰아아앙—!
묘지기는 양팔로 나무줄기로 이루어진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부러뜨릴 심산인가? 이제는 전방 가까운 곳에 드높은 신의 묘지가 있었다.
리리는 답답한 마음에 외쳤다.
“우리는 그저 지나갈 뿐이라고요! 이 묘지가 목적이 아니잖아! 대체 왜! 왜 우리를 방해하는 건데……!”
“그런 이유 같은 건 묘지기의 사정이 아닐 거예요. 그는 그저 신의 묘지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뿐이니.”
엘신은 약간의 우려가 담긴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불멸자의 영역에 닿는 힘이 아닌 이상, 성좌였던 저 존재를 이기는 건 쉽지 않은…….”
“이길 수 있어요.”
엘신은 고개를 내려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다시 멈춘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워하지 않으시군요.”
“이길 수 있는 상대를 왜 무서워해요?”
자신의 왼쪽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슬쩍 바라보았다.
명계의 왕. 그와 싸워 이겼다는 증명.
“끝까지 싸우면 다 이겨. 근데 늦지 않게 이기는 건 다른 문제긴 하지.”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흑성이 왕의 무덤보다도 뒤편에서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저것이 뿜어내는 막대한 암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강선후가 접근할 수록 어둠의 잠식 역시 빨라졌다.
“……방법이 있는 거야?”
리리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과 강선후의 영혼 연결이 강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강선후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기 시작한 게 그 증거였다.
너무나 정신이 없었기에 이제야 막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강선후의 마음은 거대한 장애물을 앞에 뒀다기엔 너무나 평온했다. 두려움은커녕 다급해 하지도 않았다.
“있지. 방법.”
기분 탓이었을까? 순간적으로 잠시나마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제야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있었다.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엘프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빠르고 강렬하게 요동치는 소리였다.
강선후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그 격렬한 고동을 느끼고 있었다.
강선후의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작은 보석의 고동 소리였다.
* * *
“격동의 사계라고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진서연이 물었다. 그 자리에는 차소희도 있었다.
‘여기는 선후가 내게 맡긴 집이에요.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예요!’
라는 게 그 이유였고, OWIC의 위기대응팀은 놀랍게도 그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수용했다.
서지아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래저래 설명하기는 너무 길고, 그냥 뭔가 중요한 순간에 오는 계절이라고 하면…….”
서지아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들어가.”
“뭐요?”
“들어가! 빨리! 차소희! 고집부리지 말고 안으로 들어…….”
콰아아앙—!
하늘 높이 흙먼지가 치솟았다. 서지아는 몸을 일으켰다. 후드득 하고 흙이 쏟아졌다.
그 아래에 있었던 차소희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서지아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어디 가스관 터졌어?”
서지아는 몸을 일으키며 아직도 먼지가 자욱한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그 전에 희미한 빛이 먼저 땅을 비추며 전조를 보냈다.
별의 성물이 운석의 형태로 떨어질 때, 혹은 자신의 화신을 강림시킬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검은빛이었어.”
그건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검은색 빛이었다.
계속해서 엘프의 직감을 지배해 왔던 이유 모를 불안감.
그 정체가 지금 솟아오른 흙먼지 속에 존재했다.
이윽고 검은 염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그걸 바라보며 염소를 떠올렸으나, 염소를 연상시키는 부위는 아주 조금이었다. 그건 공포를 빚어 생물로 만든다면 태어날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날카롭고 새된 짧은 비명 소리. 거대한 먹구름의 짐승은 검은 물을 토해 냈다. 땅이 새까맣게 물들고 거기에 닿은 식물이 순식간에 말랐다.
앞발을 들어 땅을 찍었다.
콰아아앙—!
서지아는 차소희와 진서연을 데리고 베이스캠프의 방벽 안쪽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바로 감시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러고는 사색이 되었다. 뒤에서 정지훈이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서지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전방, 저 멀리에서 몰려오는 검은 덩어리들을 뭐라 설명해야 하는가?
그건 마치 낮게 깔린 하나의 물체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프의 시력으로는 충분히 보였다.
그게 어둠을 섬기는 수없이 많은 짐승들이란 사실을.
그것들은 동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목적일까? 여기가 저것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기에?
그런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감시탑 위로 올라온 정지훈의 표정이 굳었다.
“폐쇄 절차를 긴급 진행하겠습니다. 누님, 현 마을에 남아 있는 잔류 인원에게 지금 당장 복귀 명령을 내려 주세요. 우선 방송실부터…….”
“폐쇄하면 어쩌게?”
정지훈은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폐쇄하고 복귀하면, 끝나? 다시 주말 기다려야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
정지훈은 서지아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야를 옮겼다.
바위산과 각종 구조물에 교묘하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저 뒤편에 뭐가 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구와 이계를 연결하는 차원문.
“저 문, 닫을 수 있어?”
“그건 지금 생각할 단계가 아닙니다. 우선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우리 세상을 들쑤실 때는 좋았잖아?”
정지훈은 이제는 꽤 많이 드러난 서지아의 백금발 부분과, 이제는 가리지 않는 그 뾰족한 귀를 보았다.
자주 잊게 되는 사실이지만 서지아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이 세상이었다.
“여기에 너희의 마을이 있는 거야. 우리 종족은 터전을 중요시해. 한 번 자리를 잡으면 떠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니까. 습격이 있으면 목숨을 바쳐서 지켜. 그게…… 우리의 명예야. 엘프의 명예.”
서지아는 어깨에 걸친 활을 뽑아 들었다.
“너희의 명예는 뭔데? 세상을 위해서 자유를 포기한 녀석의 집과 보물을 다 내던져 버리고 도망치는 거?”
“……우리 세상과는 관계없는 거지 않겠습니까?”
“엘 로크라 벨라el rokra bella가 울렸을 때 나는 서울에 있었어. 그리고 그 종소리는 서울에서도 똑똑히 들렸지.”
그 말대로였다.
강선후가 울렸다는 종소리가 지구 전역에서도 들렸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건 차원문을 넘어서 들려온 게 아니라 지구의 하늘에서 독자적으로 울린 소리였다고 했다.
“정말 너희 세상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간단하게 돌아가는 곳이 아니었다.
“군대의 투입, 그 허가, 여론의 반응. 이 모든 게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방어 작전의 수립과 투입된 인원과 기업, 단체에 대한 보상 문제…… 결정권자를 설득하는 게 간단한 일이…….”
“그게 너희의 잘못된 점이야!”
서지아가 이렇게나 큰 소리를 내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소의 냉소적이고 이해 타산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순간 강선후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지켜야 하는 걸 앞에 두고 계산기나 두드리고 앉아 있어! 그러다 더 큰 걸 잃는다는 걸 알면서도! 지킬 게 있으면…….”
서지아는 퀴버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물렸다.
“그냥 지키는 거야. 나도 빌어 처먹을 숙명 때문에…… 아니, 숙명이라는 변명 따위에 숨어서 항상 도망치는 걸 선택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뒤를 바라보지 않았다.
서지아의 시선은, 그 화살촉은 몰려오는 짐승들을 향했다.
“이제는 아니야.”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땅이 울렸다.
아주 멀리서 시작된 진동이었다.
서지아는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기에 화답하듯, 하늘이 울렸다.
「투쟁하라.」
쿠우우웅—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투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목소리는 전사의 억양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순간, 지켜야 할 게 남은 자들에게. 그리고 아틀라스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쿠우우웅—
「실패했던 수호자가.」
거인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서지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지켜 마땅한 걸 잃는 시대의 끝을 선언한다.」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술잔을 기울였던 어느 날 밤 강선후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잊지 않았으니까.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