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ep72. 왕의 무덤 (2)
악마가 지성체의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어떠한 증명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꼈다.
악마는 흔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일생에 한 번은 그 편린을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 속에서 일종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성좌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엘시니들과 주신 교단이 감정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악마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감정이란 통제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가려지는 것이었기에 그랬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악마에게 더럽혀지고는 했다. 그게 그 옛날 황금에 대한 찬란한 이야기더라도 그랬다.
왕이 죽고 시대의 끝을 고한 그날.
황금을 품었던 이의 죽음에 시대의 슬픔이 드높이 치솟았던 그날.
그 감정에서 악마가 태어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우주의 법칙이었다.
부조리하고, 슬프고, 엉망이라고 느껴지는 법칙.
세상의 눈물에서 태어난 악마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리리의 붉은 눈동자는 희미한 안개를 보았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그건 안개가 아니라 악마의 영혼이었고, 그저 너무나 거대하여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리리는 강선후와 함께한 여정 속에서 위대하고 거대한 영혼을 많이 만나 보았다. 키호테가 그랬고, 디오네가 그랬다. 모든 강한 영혼이 그 크기로 증명되진 않았다. 작은 파랑새의 상(狀)을 가진 존재라도 충분히 고귀하고 위대할 수 있었다. 엘신이 그러했듯이.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저 악마의 영혼이 너무나 거대했고 또 거대했다. 수천 송이의 조화에서 피어오르는 영혼은 멈출 줄 모르고 그 그릇에 힘을 보탰다. 그릇은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혼을 보지 못하는 아르고나 에드워드도 본능적으로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르고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돌아보니, 그는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차마 맨눈으로 거대한 벽을 바라볼 용기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악마의 거체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선후는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이 드디어 미쳐 버린 걸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웃겨?”
“멋지지 않아?”
“악마가?”
강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신의 말대로라면 저건 그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에 대한 증거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절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왔는지 처음으로 목격한 거잖아.”
그게 그를 기쁘게 만든 이유였다.
“저렇게나 사랑받았던 사람인 거야. 왕은. 온 세상의 사랑을 받은 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했던 세상이라고.”
극복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이 가는 거대한 악마를 눈앞에 두고, 강선후는 그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극복 가능의 유무 따위는 처음부터 머릿속에 담았던 적조차 없었다.
그런 인간이었다. 그는 지금 황금왕을 비현실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리리는 반박하고 싶었다.
“당신이…….”
왕과 가장 닮은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왕좌에 앉은 네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고.
그렇기에 가슴이 아팠다.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 한편에 자리한 죄책감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날카롭게 회전하며 가슴속을 헤집어 갔다.
리리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때는 눈앞에 당장 해야 할 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눈에 힘을 주고 천천히 일어나는 악마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악마는 하나가 아니었다. 왕의 무덤 뒤편으로 펼쳐져 있는 황동색의 낡은 평야. 그곳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가 돼서야 저 멀리 은은한 빛을 품고 있는 공기와 하늘을 뒤덮는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희미한 형상을 눈치챘다.
그건 성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곳이 이 여정의 최종 목적지라는 사실을.
그러자 용기가 생겼다. 리리는 반드시 죽지 않고 저곳에 도달하리라 다짐했고, 아르고는 죽음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종국에 악마는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의 몸통, 거기에 달린 세 개의 머리. 키메라의 뱀 머리 같기도 했고 문어의 정돈되지 않은 촉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악마라 불리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새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악마는 포효하지 않았다. 그 태생이 되는 감정을 온 세상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감정을 몸으로 느꼈다.
리리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던 감정이 휘몰아쳤다. 왕을 잃은 세상이 느낀 슬픔이 어떤지 공감했다.
그건 파괴적이었다. 일시에 모든 투쟁심을 날려 버릴 정도로.
그 순간이었다.
“정신 차려!”
강선후의 목소리였다. 그는 어느새 다시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렐릭시나의 불타는 듯한 붉은 눈이 정면을 바라보았고, 그 갈기가 되는 푸른 불꽃이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되새기고, 공감하는 건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로 미뤄도 돼.”
강선후 역시 악마가 뿜어내는 감정을 온몸으로 맞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감정에 지배를 벗어났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포식자는 자신을 통제했다.
“나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았었어.”
렐릭시나가 앞발을 드높이 들었다. 그 위에서 황금 활을 들고 있는 강선후의 모습은 전장을 지휘하는 장군을 연상시켰다.
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는 여전히 불사조가 불꽃의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
“크르르…….”
옆을 돌아보았다.
엘더 스피릿, 바람의 추종자, 설산의 늑대는 리리의 옆에 서서 그녀의 허벅지를 살짝 깨물었다. 날카롭고 둔탁한 감각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슬퍼하지 마라.」
처음 듣지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든 문장이 왕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아듣는 건 강선후뿐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마라.
나에게, 이 시대에 의미를 두지 말고.
너희가 품은 빛의 온기에 의미를 두어라.
이것이 그저 시대를 살아간.」
강선후를 제외한 모두가 그 언어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의미는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한 인간이 남기는 유일한 부탁이다.」
단순히 목소리만으로 악마는 수 킬로 뒤로 밀려났다. 마음을 지배했던 슬픔이 씻겨 내려갔다.
그제야 이 악마가 세상을 습격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왕이 왕국을 세상에서 분리한 의도도 알 수 있었다.
수천의 하얀 조화 한가운데에 서 있는 왕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그것은 오랜 풍화의 시대가 황금을 잊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시대의 슬픔이 세상을 덮치지 못하게 만드는 방패가 되어 주었다.
모두가 알지 못했던 사실.
왕은 자신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악마의 머리 세 개 중에서 하나가 원형으로 뭉치더니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건 다시 일어나 거대한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눈물을 흘리는 광대를 모사하는 듯한 모습. 그것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분명하게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강선후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박차를 가했다. 그 신호를 받은 렐릭시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삐이이익—!”
불사조가 급강하하여 강선후와 나란히 날았다.
리리는 엘더 스피릿 위에 올라탔다. 아르고를 잠깐 바라보고는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르고는 기다렸다는 듯 늑대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들은 시대의 종막에서 태어난 악마를 향해 달려 나갔다.
* * *
베이스캠프. 차원문을 넘어 첫 번째 기동대가 도착했다.
드디어 파견된 군인들. 긴급 승인이 진행되어 생각보다는 빠르게 투입될 수 있었지만, 베이스캠프 입장에서는 그리 신속한 대처가 아니었다.
베이스캠프와 지구 사이의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되었고, 그렇기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휘관들을 곤란하게 만든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었다.
지구 쪽 게이트는 차단된 지 오래였다. 군인들이 갑자기 동서울로 몰려드는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다. 차원문을 닫지 못하는 이 상황이 어마어마한 불안과 혼란을 야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군대 투입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것만큼은 좋았다.
기동대는 투입되자마자 정해진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신 복구조는 바로 투입한다! 나머지는 당장 방벽으로 접근해!”
무전기와 안테나가 설치되었고 핫라인이 복구되었다. 카메라가 달린 감시용 드론들을 하늘 높이 띄웠다. 이 모든 건 지구 쪽으로 송출될 계획이었다.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곳의 상황을 좀 더 제대로 알기를 원했다.
언론의 개입도 막을 수 없었다. 종군기자들이 한국에 도착해서 알 권리를 주장했다. 국제 여론상 그들을 막을 명분이 전혀 없었다. 기자팀은 이곳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기 위해 따로 행동을 시작했다.
투입되기 직전까지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던 사람들.
그들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검은 별이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염소 형상의 괴수는 크기가 수 미터에 달했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모든 걸 갈아 버리는 기관총이 가까이에 떨어진 괴수를 조준했다.
수백 발의 총알 세례에도 괴수는 좀처럼 저지되지 않았다. 기동팀장은 그 모습을 보고 알았다.
저 괴물 셋만 모여도 베이스캠프는 막기 힘들었다.
하지만 팀장이 말을 잃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쿠우웅—!
괴수의 목을 부여잡는 또 다른 거대한 괴수.
넝마를 뒤집어쓴 허리가 굽은 거인이 그대로 염소의 머리를 뽑아 버렸다.
그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벌써 얼마나 많은 전투가 치러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장벽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있었다.
유령 군대가 진을 치고 방패를 세워 짐승들의 전진을 막고 있었다.
“이건…… 대체, 뭐야.”
팀원의 중얼거림에 팀장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화기를 치켜들고 제 위치로 향했다.
“드디어 왔네. 게으름뱅이들치고는 꽤 빠른데.”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의 주인이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길고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다는 건 모르던 사실이었다.
“내년까지 기다려야 하는 줄 알았네! 뭐 해! 당장 갈겨!”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지구에 보고되고 있을 터였다.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까지도.
그렇기에 숨길 수 없었다.
웬만한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가능성을.
그 순간이었다.
“다들 많이 바쁘시구만.”
소란 속에서 희한하리만치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고 방벽 바깥에서 이곳으로 걸어오는 지팡이를 든 한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위험합니다! 당장 들어오…….”
“누구야. 당신은.”
이계의 사람과 지구의 사람은 서로 반응이 달랐다. 서지아는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꼈다.
자세히 관찰할수록 이질감은 심해졌다.
먹구름의 짐승들은 베이스캠프를 습격하는 와중에도 그 노인에게 길을 열고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고, 땅까지 닿는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누군지 말하는 건 좀 낯 뜨겁고 말이야.”
노인은 히죽 웃었다.
“생각을 해 봤는데, 내가 아는 어떤 꼬마 놈이 이걸 원할 것 같아서 말이지. 세계와의 약속을 위배하는 짓이지만…….”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가끔씩은, 우리 같은 존재는 이기적이어도 되는 법이네. 여덟 형제들도 이 정도는 눈감아 주겠지.”
이미 서쪽에서 몰려온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던 하늘.
그 어둠 속에서 모순적일 정도로 선명하게 빛나는 하나의 태양이 떠올랐다.
검은 태양이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