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ep73. 넘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1)
거대한 악마를 앞에 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대악마란 그런 존재였다. 눈앞에 둔 그 순간 모든 감정과 정신의 통제권을 빼앗기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마음의 평온함은 비현실적이었다.
왕의 전언 덕분이었다. 존재할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강대한 악마는 지금 마음을 좀먹지 못하고 있었다. 왕의 말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달려나가며 왕의 무덤을 지나쳤다. 그 순간 리리는 고개를 돌려 무덤을 바라보았다.
영혼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이니까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질적이라고 느껴졌다.
왕은 우리가 살던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세상에서 바라보던 왕의 무덤의 빛은 왕이 만들어 낸 빛이었다.
우리가 황금을 잊지 않게 만들어 준 빛.
어째서 왕은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왕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오랜 시간 동안 꺼지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저 찬란한 빛의 정체는 대체 뭘까.
무덤을 지나치는 짧은 시간 동안 리리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한순간의 여유였고, 이제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점차 형태가 선명해지는 하얀 악마. 그건 팔이 길었고, 비쩍 마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양쪽으로 나눠진 기다란 모자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는 형태였다.
악마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악마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우리가 아니라 왕국 쪽이었다.
악마는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이 보였다. 광대의 얼굴이었다. 익살스럽게 웃는 얼굴이 아니라 잔뜩 찡그린 우는 얼굴.
리리는 어렸을 때 각지의 귀족들을 찾아다니는 유랑단의 광대를 본 적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꼭 슬픈 분장을 하고 있었다.
‘광대란 모두가 외면하는 두려움을 바라보는 놈들입죠.’
왜 그런 분장을 했냐는 어린 리리의 질문에 한 광대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어린 리리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는 조금 굽은 등을 보인 채, 고개만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을 보는 게 아니야.”
강선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속으로 달리는 렐릭시나 위에서 강선후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덤을 보는 거야.”
그 말에 리리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조화로 둘러싸여 있는 왕의 뒷모습이 보였다.
“악마는, 악마는 우리를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겁니까?”
리리 뒤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아르고가 그렇게 말했다.
광대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 뒤 비로소 첫 번째 행동을 시작했다.
구우웅—
그건 그저 걷는 것뿐이었다.
악마는 왕국으로 한 발자국씩 걷기 시작했다.
첫 번째 머리가 떨어진 채 더욱 왕국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본체도 마찬가지였다.
이 악마들은 미답의 땅에 도달한 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강선후는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리리는 존슨의 방향을 돌려 강선후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엘신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좁혔다.
“어쩔 생각이야?”
강선후는 대답하는 것 대신 속도를 높였다. 저 악마들보다 빠르게 달려 더 늦기 전에 사정권 내로 접근하는 것.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리리도 그 사실을 이해했다.
하지만 강선후는 찜찜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강선후가 이런 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리리는 지금 상황에 더 큰 무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뒤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고, 그렇기에 결정은 빨랐다.
강선후는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삐이익—.”
그와 나란히 날던 불꽃이 다가왔다. 세계의 끝과 신의 묘지부터 제 기사를 돕기 위해 날아온 생명의 화염, 불사조.
“조금 떨어져.”
리리와 엘신은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화르륵—
불사조가 강선후를 뒤덮었다. 와일드헌트의 사냥마 렐릭시나는 그 화염을 거뜬히 견뎠다. 붉게 빛나는 코트를 입은 것 같은 모습. 렐릭시나의 푸른 불꽃과 불사조의 붉은 불꽃이 뒤섞여 묘한 빛의 꼬리를 길게 늘어트렸다.
강선후는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 손에는 기록관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섯 개의 보석. 하나는 안토니오가 기록해 준 지식의 룬이 기록되어 있었고, 나머지 네 개는 무슨 룬이 들어가 있는지 리리도 알지 못했다.
기록관의 반지에 달려 있는 보석 중 두 개의 보석이 빛을 발하더니 룬을 내뱉었다. 룬은 강선후를 감싸고 있는 불꽃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불꽃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고 남기 시작했다.
모로스moros.
에너지를 현재 상태로 고정하는 룬.
조금만 응용하면 에너지를 ‘물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고정된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해답은 의지를 가진 에너지의 집합체인 저 불사조에게 있었다.
이게 강선후의 결론이었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강선후가 만들어 내는 긴 불꽃의 꼬리는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선을 그렸다.
강선후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대로 모은 손을 풀고, 왼손을 다시 왼쪽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파아악—!
그를 감싸 안았던 불꽃이 순식간에 수십의 조각으로 나뉘어 그의 주변을 소용돌이쳤다. 사라지지 않는 불꽃은 선을 그렸고, 기하학적인 소용돌이 모양이 강선후의 주변을 휘몰아쳤다.
그 불꽃의 조각 하나하나는 각각 작은 새의 형상이었다. 그것들은 강선후의 손짓을 명령 삼아 움직였다. 멀리 퍼져 나가기도 하고, 작은 영역에 머문 채 복잡한 문양을 그려 나갔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불꽃이었고, 먹물이었으며 붓이었다.
리리는 이 시점에서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눈치챘다.
“아르고.”
“네, 아…… 네?”
“꽉 잡아요.”
고삐 대신에 흩날리는 엘더 스피릿의 털을 꽉 부여잡았다. 그리고 우측으로 급선회하여 강선후와 빠르게 멀어졌다. 엘신도 리리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의도일까요?”
엘신의 질문. 리리는 한 발자국씩 천천히 왕국과 흑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대악마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시도해 본 적 없는 걸 하려고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예전부터 궁금해했어요.”
단순히 커다랗게 그린 룬이면 위력도 그만큼이나 거대해질까?
언젠가 강선후는 이렇게 속 편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생각이 맞다면, 단순히 룬을 크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어떤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겠어? 신기하지 않아?’
강선후는 그렇게 말했었지만 리리는 저 가설이 전혀 색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수백의 획 중 하나, 그 끄트머리의 방향만 잘못되어도 작동하지 않는 게 룬이었다.
그렇게나 거대하게 그리는 게 애초에 가능하다면, 그건 시전자의 능력에 적합한 힘이 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강선후는 그때의 망상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선후와 멀찍이 떨어진 리리는 그의 속도에 맞춰 달려나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해하면 안 돼요. 거대한 룬은 우리가 그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염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오염될 정도로 민감한가요? 룬이란 건?”
엘신은 룬에 대해서 잘 몰랐다. 룬을 노래하는 별이었던 시절이 오래되었음에도 그랬다.
엘신의 시대에는 룬이 없기에 그랬다. 룬 역시 황금으로부터, 어쩌면 왕으로부터 비롯된 언어였기에.
“땅에 있는 돌 하나, 발자국 하나, 어쩌면 일렁이는 화염의 모양과 모래알 하나마저 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 모든 요소 사이에 오차가 존재하는 순간 모든 게 헛수고가 될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엘신은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출발한 수백의 불꽃 새는 사방으로 흩어져 각양각색의 선을 그렸다.
“……아름다워요.”
오랜 옛날 수없이 만났던 많은 주술사들 중 저토록이나 아름다운 마술을 전개하는 자는 없었다.
그렇게 완성된 건 하나의 룬.
불꽃의 물감으로 그려진 한눈에 볼 수 없을 크기의 룬이 이 공간을 잔뜩 밝혔다. 하늘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가로등으로 가득 찬 축제의 밤거리를 걷는 듯 세상은 밝았다.
“삐이이익—!”
다시금 하나로 합쳐진 불사조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강선후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연금술사의 시약병』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을 수 있는 병.
그 병을 얻을 때부터 이미 무언가 담겨 있었던 첫 번째 병.
그 뚜껑을 열었다.
그 옛날 연금술사가 우주에서 담아 왔던, 은하 한 방울을 땅에 떨어트렸다.
똑—
그 순간, 이곳에 은하가 펼쳐졌다. 외우주의 힘이 잠시나마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건 룬의 한계를 초월하기에 충분한 마력이었다. 파도치는 사막에서 흐르는 마력이 그러했듯.
엘신은 저 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이었기에 그랬다.
그래서 저 힘을 다루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강선후가 그린 룬에는 우주의 힘을 다루기 위한 회로도 미리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도 방금 깨달았다.
땅이 일렁였다. 바닥을 가득 메우던 황동색의 흙과 모래, 그리고 바위가 녹기 시작했다.
아니, 증발하기 시작했다.
표면부터 시작해서 안쪽으로 파고들며 급속도로 사라졌다. 아니, ‘변환’되었다.
땅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가 신의 첫 번째 원소인 불꽃으로 변해 하늘로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지옥도로 변한 일대. 리리는 빠르게 천잠사의 망토를 풀어헤쳐 아르고와 자신의 몸을 덮었다.
모래가, 흙이, 바위가. 모두 불꽃으로 변했다.
원소의 본질을 변형하는 고대의 기술.
「연금술」
리리는 과거 강선후를 거뒀던 도시의 인물이 연금술사였다는 이야기를 다시금 떠올렸다.
불꽃은 솟아올라 하나가 되었다.
불꽃은 잡아먹을 것이 없다면 한곳으로 모이는 법 없이 흩어지는 이기적인 원소였다. 하나, 지금만큼은 구심점이 있었다.
강선후와 서약한 영물, 불사조는 이기적인 원소를 한 데 규압해서 통일을 불러일으켰다.
대지가 통째로 변환된 막대한 양의 불꽃은 불사조의 발톱이 되었고, 눈이 되었고, 날개가 되었다.
전설 속에서, 불사조는 태양이 되고자 하던 새라고 알려져 있었다.
신의 영역을 넘보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 노래로 전해져 내려오고는 했다.
“……태양.”
그런 오만한 새는 지금 이 순간, 태양이라고 불릴 자격을 얻었다.
눈앞의 광경을 리리는 그 짧은 한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흑성이 뿜어낸 짙은 어둠 아래, 태양이 있었다.
‘뭔가 불안하다.’라고 말한 강선후는 불안감을 타파할 해답으로 태양을 만들어 냈다.
이게 강선후의 진심이었다.
불사조는 울지 않았다. 소리로 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그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구구구구—
순수한 불꽃에서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등을 돌리고 있는 광대에게 달려들었다.
“으읏……!”
섬광이 터져 나갔다. 호흡이 가빠졌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불꽃이 공기를 태운 탓이었다.
불사조는 순식간에 광대에게 쇄도했고, 경로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땅이 울퉁불퉁해서 제대로 달릴 수 없었다.
후폭풍은 불지 않았다. 바람이 허락되지 않은 땅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맨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태양이 된 불사조를 온몸으로 맞아낸 광대의 운명을.
모험가를 미물 취급마저 하지 않은 광대는 저항의 기회도 없이 소멸해 버렸다.
‘악마의 흔적’만이 땅에 남는 과정을 내내 멍하게 바라보던 엘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런 섬세한 통제는 엘프도 불가능해요.”
“지금 시점에서 불가능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잖아요.”
엘신은 리리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누구도 발을 들인 적 없는 미답의 땅.
별을 포기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자신.
리리의 말이 맞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은 이미 너무 많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는 중이었다.
엘신은 승천자의 지위를 포기한 후 시간이 지나자 점점 생각 많아지는 걸 느꼈다.
번뇌와 고뇌.
수행자의 시절에는 언제나 멀리 두어야 했던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이 급박한 순간에서도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에 잊었던 것들이 다시금 자신의 안에 차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기에.
“모든 일이 끝나고 천천히 돌이켜볼 여유가 있다면 좋겠네요.”
“모든 일이 잘 끝났다면 그럴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우선 지금은…….”
리리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엘신의 바람이 이루어질지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추억을 되새길 여유가 있을까?
리리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할 이 질문에 유일하게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