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59
259화
ep73. 넘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2)
뒤에서 지켜보던 리리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끝을 모르고 솟아오르는 연기에 가려져 있었지만 거대한 악마는 처참하게 폭발하여 그 흔적만 간신히 남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황금의 시대 종말을 상징하는 악마, 그 첫 번째는 그렇게 사라졌다.
“…….”
너무 쉽게 끝났다. 아니, 그 일련의 과정은 충분히 납득되었다. 저 악마를 부수는 게 가능할 법한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끝났다. 강선후가 말하는 ‘위대한 목적은 그만한 장애물을 겪기 마련이다.’라는 말에 위배되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어쨋든 이런 느낌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목표를 주시하는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잡념일 뿐.
그래서 털어 버렸다. 리리는 빠르게 속도를 높이는 강선후의 뒤를 따라잡았다. 강선후는 빠른 속도로 악마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저 악마는 무력화되었을 뿐, 아직 소멸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아, 안전한 겁니까? 악마는 사라진 건가요?”
놀라 말을 더듬는 아르고의 말에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악마는 심장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영원히 복구돼요.”
“다시 살아난단 말씀이신가요!”
“괜찮아요.”
리리는 확신했다. 저 정도로 파괴된 악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회복되는 경우의 수는 없었다. 그저 가까이 다가가서 언제나처럼 집행자의 검으로 꿰뚫으면 끝. 간단하고 확고한 결론이었다.
강선후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눈앞에 있는 거대한 검은색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엘신과 리리, 아르고가 도착했다.
강선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의문이었다. 왜 바로 검을 뽑아 찌르지 않고 저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 거지? 주저할 이유 따위가 전혀 없었다.
이 생각이 듦과 동시에 바로 답을 깨달았다.
이건, 이건.
“……아니잖아.”
리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불안감은 이미 전해져 내려왔다. 아르고는 벌써 사색이 되었다.
“악마의 심장이 아니잖아.”
그저 검은 덩어리일 뿐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악마의 심장과 닮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오해하도록 의도한 가짜 심장.
이 악마는 애초에 심장이 없었다. 그제야 리리는 이 악마가 저 멀리에 있는 악마의 세 머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이 악마가 세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였다고……?”
이 광대가 심장도 없이, 본체에서 떨어져 이토록이나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과 연결된 어떤 영혼도 없이, 이 악마의 ‘부품’은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광대는 자신의 뒤를 추격하는 이들을 기만했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도록 태어난 존재였기에.
정신을 차린 그 순간.
과정조차 깨달을 수 없는 압도적인 속도로 원상복구된 악마.
여전히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하얀 광대.
분명 영혼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 역시 광대의 기만이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오른팔을 휘적였다. 손을 털어 내는 가벼운 동작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마력의 폭풍만으로 귀찮은 존재들을 쓸어내기에는 충분했다.
폭풍이 시작되고 그 힘이 닿자마자 칼로 갈라지듯 벌어지는 땅의 균열을 목격한 그 순간.
리리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폭풍은 가까워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무언가 대처법을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리리의 눈에 강선후가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 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광대가 부활하기도 전에 이미 행동을 시작했던 것 같았다. 지금 상황 역시 그의 계획 중 하나일 뿐일까? 그를 믿어야 하는 걸까?
믿고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늦기 전에 뭔가를 시도해야 할까?
어느 쪽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눈 깜빡일 만큼의 시간만 있어도 충분히 결론 내릴 수 있는 사항인데, 지금은 그럴 시간마저 없었다. 그게 리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행동은 판단을 거치지 않고 일어났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리리는 강선후의 앞에 있었다. 그의 어깨를 거세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너무 급하게 물어뜯느라 패인 상처에서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피.
정돈된 느낌 하나 없이 거칠게 몇 겹이나 쌓아 올려지는 피의 방패. 증기조차 될 시간이 없어 출렁이며 펼쳐지는 피.
리리는 생각했다.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했는지는 저도 몰랐다. 행동을 판단할 시간도 없었고, 행동을 평가할 시간도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오는 마력의 칼날.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한 힘.
지체조차 시키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찢어지는 피의 방패.
다음은, 아마도 내 차례.
여기까지 생각이 드는 순간 눈앞을 무언가 가렸다.
허리 아래까지 오던 금발이 휘날렸다. 그 푸른 눈은 악마 쪽이 아니라 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신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딱 세 가지였다.
엘신이 자신 안에 남은 마지막 별빛을 사용했다는 것.
리리와 강선후를 포함한 모두가 다시 왕의 무덤이 있는 위치로 이동되었다는 사실과
광대의 첫 번째 손짓에 휘말린 사람은 오직 엘신 뿐이라는 사실.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엘신은 없었다.
엘프의 머리카락 몇 개만 그 자리에서 휘날릴 뿐이었다. 리리는 자신의 동공을 붉게 물들였다. 통제할 여유 따위도 없이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어디에도 정순했던 작은 새 영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악마의 영혼만 어디에든 있었을 뿐이었다.
“……이건, 안 돼.”
그 순간 광대의 두 번째 손짓이 이곳으로 향했다.
대단한 힘이나 준비가 필요한 동작조차 아니었다.
폭풍이 이곳으로 정확히 쇄도했다.
강선후는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앞에 불사조가 모였다. 기록관의 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룬. 리빙 메탈의 룬은 바닥의 모래와 불꽃을 섞어 단단한 방패를 만들었다.
콰아아앙—!
리리와 아르고는 무사했다.
하지만 강선후는 아니었다.
강선후의 전신의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서 있는 것만으로 기적처럼 보였다.
리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그 튼튼한 재킷과 셔츠가 반쯤 찢겨 있었다.
강선후는 단 한 번도 가벼운 옷을 입었던 적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가리고 싶어 하는 듯하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흉터.
엄청난 흉터들. 저 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을 죽이고도 남을 법한 상처의 증명들.
그런 흉터들이 셀 수 없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 인간이었다. 강선후는 불완전하게나마 광대의 공격을 막을 힘이 있었다. 아마 이다음의 계획까지도 있을 터였다.
강선후는 그렇게 서서 한동안 광대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엘신의 죽음을 눈앞에 뒀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리리는 첫 번째 공격이 들어온 순간을 되새겼다. 그때 강선후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아마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지도.
아니, 확실히 그렇게 됐을 터.
그런데, 내가 괜히 뛰어든 바람에 엘신께서, 우리를 위해 첫 번째 성좌 자리를 포기하고 내려오신 그분이.
내가 전부 망쳤어.
리리는 무너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내가 전부 망쳤어.’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리될 수 없는 잡념이었다. 온갖 수모를 겪고도 무너지지 않은 정신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곳은 미답의 땅이고, 우리의 마지막 기회였으며, 내 모든 인생을 바쳐서 도달해야만 하는 숙명의 무대였다. 그 모든 게 단 한순간만에…….
“정신 차려.”
리리는 어느새 강선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리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는 그런 그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가문의 법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이 사람을 보좌해야 했고, 그의 말이라면 최선을 다해 따라야만 했는데, 지금 이 간단한 요구조차 리리는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리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왠지 미소를 짓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리리는 붕괴되어 버린 정신이 환각을 보여 주는 것이라 판단했다.
강선후는 허리를 굽혀 리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물건은 다시금 리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황금빛 원판. 한 손에 꼭 들어오는 그 물건은 이제 익숙한 고대의 유물.
황금 지침.
그리고 어느새 다시 봉인한 에드워드의 마법 램프.
“이걸, 왜, 왜 나한테 주는 거야.”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강선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리리가 받아 들 때까지.
리리는 손을 뻗어 황금 지침을 쥐었다. 그 모든 행동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강선후가 내뿜은 무언의 압박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황금 지침의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낯설었다.
이제까지 손에 거의 쥐어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 뒤에는 여덟 개의 보석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나머지 네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유물 중 하나는 리리가 가지고 있는 가면이었으며, 두 개는 쌍성이 되어 왕국 위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열두 번째 마지막 지배자의 유물은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사실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불안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그 느낌. 간신히 입을 열어 숨소리 나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대체 어쩌려고.”
“왕좌로 가는 건 지배자면 된다며?”
그러면서 다시 허리를 펴 광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대는 몸을 돌려 다가오고 있었다. 강선후가 공격을 막아 내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꾼 모양이었다. 느릿한 몸짓이었으나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하지만 그런 모습 따위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강선후가 방금 한 말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지금 여기에 지배자가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당신,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말려야 했다.
아니, 말려야 하는 걸까?
아니, 다른 방법이 있어? 애초에,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의 여정에서…… 어차피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생각은 길었고, 강선후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플랜 비야.”
그렇게 말하면서 달려나갔다. 이계의 언어가 아니라, 지구의 언어로.
저 단어의 뜻을 리리는 알지 못했다.
그 어떤 황금의 유물도 몸에 지니지 않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사조마저 저 멀리 보낸 상황. 그저 홀몸으로 렐릭시나에게만 의존한 채, 바람의 속도로 빠르게 광대에게 달려나갔다.
그런 뒷모습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다. 너무나 찰나의 순간 모든 일이 벌어졌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변명을 해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강선후는 그대로 악마에게 뛰어들었다. 악마의 뻥 뜷린 배의 구멍에서 그를 찢을 듯 무수히 많은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건 강선후를 아무렇게나 끌고 갔다. 육체와 영혼을 자기 것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결과는 그저 죽음. 확실한 죽음이었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으니까.
강선후와 렐릭시나는 그렇게 사라졌고, 광대는 여유롭게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뒤틀었다.
아르고와 리리는 또 다른 악마가 악마의 속에서 막무가내로 비집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악마를 리리는 알고 있었다.
선악과의 악마.
두 악마가 뒤섞여 서로 반목했다. 태양과 같은 공격마저 아무렇지 않게 견뎌 낸 악마는 지금 이 순간 고통스러운 듯 온몸을 뒤틀었다. 처음으로 감정이란 걸 표현하는 모습이었다.
리리는 다시금 깨달았다. 강선후는 데미이블과 맞선 그 날 이후로 악마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심지어 방금 그 상황까지 몰렸으면서도.
인간으로 남고 싶다.
오랜 옛날 강선후가 제 친구를 성좌로 대신 승천시키며까지 했던 말이었다고 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