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0
260화
ep74. 플랜 비 (1)
베이스캠프. 먹구름 짐승의 습격을 간신히 막아 내던 곳.
검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서지아는 저도 모르게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서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걸 알 수 있는 힘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불안했다. 극도의 불안감.
혼란스러웠다. 자신에게 이런 걸 느끼는 초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체 이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무언가를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지아는 어느새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황금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수의 꽃. 그 거대한 줄기를 감싸듯 맴돌고 있는 고리.
방금 느껴진 이 극심한 불안감의 정체는 서지아의 것이 아니었다.
한 엘프와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나무.
세계수의 영혼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서지아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세계수는 어째서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지? 이건 어쩌면 상실감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세계수는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묻고 싶었으나 두려워졌다. 왠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순간, 서지아는 세계수의 옛날 파트너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떠올렸다.
“…….”
서지아는 이번엔 노인을 바라보았다. 위험천만한 방벽 밖에서, 이 극도의 혼란 속에서 홀로 고요한 노인. 모든 게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이 모든 위험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서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 뒤에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았다. 빛이 없는 태양이었으나, 이 어둠 속에서는 의미 있는 붉은 고리를 가지고 있는 태양.
이미 옛날에 본 적 있는 태양이었다. 살아생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없었던 태양.
세 번째 태양이자 스스로 빛을 포기한 주신, 검은 태양.
유일하게 지상이 있기에 가려진 하늘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태양.
“당신이 내가 아는…… 그런 분이 맞으시다면.”
서지아는 노인을 바라보다가 신중하게, 정말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왜 여정을 돕지 않으십니까?”
“흥미로운 말이구먼. 내가 그대 자신을 돕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저 멀리 떠난 녀석의 여정을 돕길 바라는 건가?”
“…….”
여유로운 말투였다. 그렇기에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런 이야기 나눌 시간 따위는 없는 순간인데 어째서 이 대화가 성립되는 거지?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쉽게 받아들여지는 모순을 느꼈다.
“왜 여정을 돕지 않으십니까? 그럴 만한…… 힘이 있으실 텐데.”
“자네, 빛을 자진해서 버렸다는 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서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논제였으니.
“쉬운 문제지. 빛을 버렸는데 이전과 같은 힘을 여전히 품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부조리한가?”
“…….”
“각오에서 비롯된 행동은 그만한 상실을 동반하는 법이네. 그래서 각오가 숭고한 법이고, 각오는 반드시 숭고해야만 하니까.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만 기대하는 그런 힘은 없어.”
서지아는 저 말이 더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눈앞의 저 노인이 생각하는 그런 위대한 존재가 맞다면, 그 존재가 직접 등장해서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면.
그 희망을 좌절시키는 게 더 부조리한 게 아닌가?
이 시대는 그런 시대라며?
노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서지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비웃는 듯한 미소가 아니었다.
“하나 빛을 잃은 아비라 할지라도.”
그건 서지아가 그리워하던 그런 미소였다.
“그게 제 자식을 위해서였다면 능히 기꺼운 눈으로 바라봐 주지 않겠는가?”
“……누가 당신의 자식인데요?”
검은 태양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내내 후드 아래에 가려져 있었던 그 눈을 처음으로 보았다.
피로에 젖어 있고 축 처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늙은이의 눈빛이었다.
“너희 모두.”
그 순간 공기의 떨림을 느꼈다. 이계에서 듣기에는 낯선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서지아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소란스러운 전투의 소음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함선, 함선이야.”
“이계에 저런 게 있었다고?”
서지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등 뒤, 하늘 높은 곳.
그곳을 가리는 거대한 검은색 무언가.
거칠게 회전하는 거대한 엔진. 그곳에서 뿜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검붉은 에너지. 간헐적으로 선체 전체에 몰아닥치는 번쩍이는 전류.
차원문을 찢고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이곳에 도착한 그것은, 관성을 무시하고 허공에 그대로 정지했다.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선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노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발칸 셀루니아. 새 미션을 설정합니다.」
「이는 예언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고, 신의 뜻을 좇고자 함도 아니며 우리의 숙명도 아님을 알립니다.」
함선을 통제하는 지능.
그 지능은 말했다.
「정령은 신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왕과 황금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정령이란 그런 존재였다.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깨달은 정령은 숙명이 끝나고 나서도 사라짐을 택하지 않았다.
검은 태양은 끌끌 웃었다. 반항스러운 피조물들을 오히려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유별난 신의 독특한 취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
그곳에 달린 무수한 포신이 검은 불꽃을 뿜었다.
그건 일시에 모든 짐승을 증발시켰다.
폭음 뒤에 찾아온 정적은 비현실적이었다. 이곳을 가득 채운 매캐한 냄새. 그 안에서 베이스캠프의 사람들은 경악했다. 서지아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지구인들의 머릿속에서 이계의 사람들은 언제나 미개인이었다.
그들의 세상이 보여 준 이 모든 건 그렇기에 충격적이었다.
서지아는 그런 반응들 사이에서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
문뜩 깨달았다.
방금 전 함선이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차원이 찢어진 특유의 모양.
그건 지구와 이계를 연결한 차원문들의 모양과 완전히 같았다.
검은 태양은 다시 서지아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고는 웃었다. 서지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원문도, 강선후를 이동시켰다는 그 균열도, 교회에서 사용한다는 비프로스트도.”
비프로스트라는 차원문이 교회의 기도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뜬금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건 검은 태양의 작품들이었다.
“흐음.”
“이 미래를 위해 당신이 다 계획하신 겁니까? 강선후라는 놈을 굳이 잡아간 것도…….”
“오해하지 말게. 뭔가를 의도하고 행한 일들은 아니었으니까. 그 꼬마가 여기까지 해낼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이렇게 되리라 계획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그저…… 주사위를 굴려 봤을 뿐이지. 가끔 무언가 더 나아지길 바랄 때, 이미 그려진 그림을 붙잡고 애쓰는 것보단 도화지를 찢어 버리는 게 답이 될 수도 있거든.”
검은 태양은 이제 비워진 황무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지아의 눈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서는 한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지아가 아는 이들이었다.
모두가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검은 태양 앞에 섰다. 일부는 사제복을 입은 적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별빛과 밤하늘을 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검을 차고 있었다. 사제단을 지키는 수호기사들이었고, 그 선봉에는 단발머리의 뱀파이어가 서 있었다.
그들 모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앞에 있는 존재가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들 맨 앞에 선 한 별의 자손은 그러지 않았다.
홀로 선 채 예를 표하지 않고 검은 태양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칠흑처럼 어두운 단검을 물고 있었다.
* * *
리리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황금 지침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겨울 늑대의 영혼을 슬쩍 바라보았다.
주인을 잃은 늑대. 하지만 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짐승의 감정을 읽는 건 그 남자만 할 수 있던 것이었다.
리리는 다시 황금 지침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내게 건넸다는 건 지금 이 잠깐의 기회 동안 도망치라는 거겠지. 서두르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짧은 시간. 선악과의 악마와 광대가 힘싸움을 벌이는 이 순간 아주 작은 여유.
새하얗기만 한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이 가득했다.
‘다른 방법이 있었잖아.’
그의 입장에서는 이 여정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일까진 아니었다. 우리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다른 세상의 알 바 아닌 일일 뿐인데.
“왜,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당신답지 않잖아.”
어떤 계획이 있을까 끝까지 믿었다. 하지만 그 실낱같은 희망이 방금 사라졌다.
리리는 그를 말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지금도 내적인 갈등의 해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그랬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몰려 왔다. 리리의 정신을, 영혼을 삼키려고 했다.
그때.
“분명, 부, 분명……!”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가 돼서야 자신이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리리는 아르고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눈물은 이제 와서야 흐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귀족의 품격 때문에 우는 모습을 숨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너무 싫었다.
“……죽음에 어떤 이유가 있어.”
“인간은 그렇게 쉽게 죽기로 결심하지 않아요!”
리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르고를 바라보진 않았으나,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특히 영웅이라면! 영웅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는 자들이라 배웠습니다! 그런 분들이라면 더더욱 삶을 이어 나가려고 하실 겁니다!”
이미 다 갈라진 목. 거친 그 목소리.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알아요!”
리리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아르고를 바라보았다.
“나도 인간이니까! 그 마음만큼은 나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며 아르고는 존슨의 위에 올라탔다. 이제 더 이상 그 늑대 영혼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더 큰 두려움을 극복하며, 작은 두려움에선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랬다.
“뱀파이어께서는 해야 할 일을 빨리 결정하세요! 저는, 저는 저 악마의 주의를 돌려 보겠습니다!”
“……뭘.”
그렇게 말하고, 존슨을 출발 시키려고 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다.
뱀파이어의 결정은 그의 예상보다 빨랐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리는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엘신의 백마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혼자 뭘 할 생각인 거야.”
그렇게 말하며 리리는 백마에 올라탔다. 주인을 잃은 말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건 그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 * *
명계왕은 쭈그려 앉아 정신을 잃은 채 이제 막 떨어진 두 영혼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그가 당황할 정도로 정순한 영혼이었고, 하나는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명계왕은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올 생각이었냐? 내가 빨리 보고 싶었던 거면 뭐 반갑긴 한데…… 막상 이러니까 좀 당황스럽거든?”
물론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 죽음은 친분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닐 테니까.
“사는 게 좀 고달팠냐? 가끔 제 의지로 뛰어드는 놈들이 있긴 하다만.”
그러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살아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윗놈들은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구만. 뭐.”
명계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지난번에 말했지. 두 번은 없다고. 명계에도 명계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강선후가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상태. 본능과도 가까운 움직임.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죽은 인간.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바로 흩어져 버려 명계의 기운에 뒤섞여 사라질 미약한 영혼.
그 영혼은 언제 가지고 왔는지 모를 보잘것없는 무기 하나를 쥐고 있었다.
수정 도끼.
익숙한 것이었다.
명계왕은 하늘이 떨리도록 웃었다.
“또 나와 싸울 생각인 거냐? 수만, 수십만 년 동안?”
그러면서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럼 뭐 다시 이길 수 있겠지. 폭주하여 솟아오르는 내 기운을 타고 저 위로 올라갈 수 있겠지. 그때처럼 말이야.”
그러면서 명계왕은 강선후를 내려다보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그럼 제시간 안에 올라가긴 틀렸겠지만.”
눈앞에서 저 혼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길 반복하는 미천한 영혼을 바라보았다. 저 의지가 과거 언젠가 나에게 공포란 감정을 알려 줬었지.
대체 무엇이 저놈을 저렇게 움직이게 하는 걸까.
대체 뭘 이루고 싶은 놈인 걸까.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저 위의 일 따위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썅.”
명계왕은 강선후가 쓰러진 땅을 통째로 파 올렸다.
그 순간, 정신을 잃은 듯 쓰러진 강선후 영혼의 팔이 움직였다.
그 팔은 자신과 같이 떨어진 옆에 있는 영혼을 부여잡았다.
명계왕은 어이가 없었다.
“미친놈일세. 진짜.”
그러고는 다시 웃음기를 뺀, 분노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모든 게 네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 왕이 인정해 주니, 왕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느냐? 오만한 것아.”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