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1
261화
ep74. 플랜 비 (2)
“으윽…….”
“괜찮으십니까!”
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입안에서 짙은 피 냄새와 신물이 뒤섞여 끔찍한 느낌을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떨리는 손. 이미 몇 번이나 상처를 낸 탓에 만신창이인 양손은 더 이상 회복되지 않았다. 혈술을 시동하기 위해 낸 상처는 금방 사라질 터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안 좋은 징조였다.
“…….”
각오가 있다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있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그런 가르침을 강조하고는 했다. 리리는 그 말의 의미는 직접 깨닫고 있었다.
로얄 블러드의 혈술. 고대 시절 다른 존재의 영혼을 막무가내로 탐식하는 짐승이나 다름없던 종족.
그 종족이 명예를 위해서 스스로에게 건 제약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며, 제약을 깬 대가는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이게 그녀의 이성과 몸을, 더 나아가 영혼을 갉아먹어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걸 위해서 죽음마저 선택했으니까. 벌써. 두 명이나.
“이잇……!”
악을 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겨울 늑대의 영혼에 올라탄 인간 남자는 쏘지도 못하는 활을 당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존슨은 그 위에 탄 인간을 배려하기 위해 발걸음을 달리했다.
바람의 추종자. 그 은밀한 습격자 특유의 보법이었다. 진동은 잦아들고. 거기에 순간 당황했던 아르고는 미숙하게나마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피잉—
활 끝에는 유리병이 하나 달려 있었다. 강선후가 자주 사용하던 주황색 폭발 화합물 병. 활 솜씨는 엉망이었으나 애초에 표적이 너무 컸기에 의미가 없었다.
“…….”
그걸 바라보는 리리의 정신이 또렷해지고 시야가 돌아왔다. 백마의 하얀 털이 붉게 얼룩지는 모습이 이제야 보였다. 수치스러웠다.
“……미안해.”
여러 의미가 담긴 사과였다. 다시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서 엉망으로 뒤섞여 본래의 모습은 거의 잃어버린 악마의 덩어리가 울렁이고 있었다.
리리는 다시금, 피의 증기를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 뾰족하게 기다란 창처럼 재구성하여 끄트머리에 예리함을 깃들게 했다.
혈술은 사냥하는 자의 기술이었고, 본디 누군가를 찌르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빠르게 쇄도하는 붉은 창이 악마의 몸뚱어리를 파고들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막무가내로 뒤섞인 역겨운 살점 사이에 들어가며, 닿는 모든 걸 입자 단위로 찢어발겼다.
너무나 압도적이라 범접할 수조차 없을 것 같았던 악마에게 지금만큼은 무언가 영향을 가할 수 있었다.
그 인간이 남기고 간 기회였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후회하는 것, 그리워하는 것, 미안해하는 것.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몸의 심부까지 깊게 들어온, 독침이나 다름없는 혈기를 느낀 악마는 몸부림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급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리는 신속하게 외쳤다.
“조심해요!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제가, 제가 뭘 하면…….”
“우선 기다려요! 급하지 않아도 되니까! 결정은 뭘 하려는 건지 알게 된 이후에 해도 충분해요!”
강선후의 원칙이었다.
쿵, 쿠우웅—!
거칠게 움직이는 악마는 간신히 두 다리를 노출시키고 기괴하게 꺾으면서 이동했다. 그렇게 왕국으로 다시 다가가나 싶더니, 마음대로 되지 않자 포기한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굴곡진 살덩어리 사이사이에서 수십 가닥의 ‘팔’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그건 일제히 땅에 박혔다.
쾅, 쾅, 쾅, 쾅, 쾅—!
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서일까?
물론 그 이유도 있는 것 같았다. 눈에 띌 정도로 흔들림이 안정화된 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순전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악마가 두 다리를 굽혔다. 무거운 걸 들어 올리기 전 일꾼의 자세였다. 그리고, 다시 힘을 줬다.
구그그그—
땅이 갈라졌다.
“……성을 분리하려고 하고 있어.”
미답의 땅. 왕국이 있는 곳. 섬이라고 부르기에는 거대한 이곳.
세상에서 분리된 외딴 대지.
그곳이 다시금 갈라지려 하고 있었다. 황금의 왕국을 다시 한번 세상에서 더 먼 곳으로 분리하려 하고 있었다.
저 악마의 힘으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땅은 시시각각 갈라지고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선이 넘어가는 순간 더 이상 돌이킬 수도, 기회도 없을 것이라.
리리는 이를 악물었다.
“……가요!”
악마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속도를 늦출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제는 악마가 무슨 공격을 하더라도, 어떤 위험이 덮치더라도 그냥 전진에만 집중해야 했다.
“부탁할게!”
엘신의 이름 모를 백마는 리리의 말을 알아듣는 듯 속도를 내었다. 한때 별자리였던 말은 렐릭시나에 절대로 밀리지 않을 정도로 앞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바람의 추종자가 따랐다. 달리는 능력은 말보다 뒤처졌으나, 늑대는 바람을 타는 법을 알았다. 백마가 만드는 작은 바람. 그 한 톨마저 놓치지 않고 자신의 순풍으로 삼았다.
그들은 빠르게 왕국을 향해 나아갔다.
거대하고 끔찍한 살점 덩어리가 눈앞을 가로막기 전에는.
“…….”
어느새 희고 검은 살덩어리가 눈앞에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이 악마 덩어리는 저 멀리 있었고, 리리와 아르고는 그것과 충분히 거리를 벌려 선회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합리성을 논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악마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살덩어리 속에 파묻혔던 광대의 머리가 보였다.
광대가 입을 벌렸다.
그 안에는 영혼을 불태우기에 충분한 힘이 담겨 있었다.
“……아.”
오히려 이 순간 느껴지는 편해짐이 아이러니했다.
최선을 다했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의무를 배반한 게 아니겠지.
평소에는 나약하게 여겨 머리에 담았던 적 없는 생각이 이 순간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광대의 입에서 수많은 얇고 기다란 검은 팔들이 뻗어 나와 리리에게 향했다.
리리는 고삐를 놓으려 했다.
콰아아앙—!
다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낯선 폭발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렸다.
황동색의 흙먼지가 얇고 높게 치솟았다. 뭔지 알 수 없었다.
흙먼지가 먼저 조금 내려앉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게 뭔지 깨닫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선후.
리리의 입술은 움직였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강선후는 흙투성이의 모습으로, 찢어지지 않은 멀쩡한 복장으로, 땅에서 솟아오르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평소에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을 수정 도끼는 지금 이 순간 회백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명계왕의 기운.
단 한 방울만으로 데미이블이라는 거대한 힘을 만들어 낸 근원.
도끼의 수정에 담긴 건 죽음의 주인에게서 떠온 한 그릇의 힘이었다.
위험을 직감한 듯, 리리에게 달려들던 악마의 팔들은 경로를 바꿔 강선후에게 쇄도했다.
“잠깐, 위험……!”
리리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제가 돕습니다.”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폭발이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좁은 영역에 드높게 솟아오른 흙먼지.
그 사이에서 몸을 거꾸로 한 채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백금발의 고귀한 영혼.
엘신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발사되었다. 특별할 게 없는 화살은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날았다.
강선후에게 달려드는 수십 개의 검은 팔.
이리저리 서로 뒤엉키는 그 팔들이 하나의 경로로 정렬되는 그 찰나의 순간.
엘신의 화살은 일시에 그 모든 팔을 관통하며 나아갔다. 나무 화살은 그 뒤에도 추진력을 잃지 않고 그대로 나아갔다. 강선후를 방해하려는 악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강선후는 도끼를 힘껏 내던졌다.
도끼는 거칠게 회전하며 살덩어리 사이로 비집고 나온 광대의 얼굴을 향해 직격했다.
악마의 한껏 벌어졌던 광대의 입이 닫혔다.
턱—!
“……아.”
그 날카로운 이빨들이 도끼를 부여잡았다. 악마 역시 강했다.
이건 실패하면 안 되는데.
“……여기서.”
리리는 살덩어리 뒤편으로 힐끗 보이는 왕국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이겼다.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리리가 가면을 뒤집어쓰려는 그 순간.
구우웅—!
폭발음은 한 번 더 들렸다.
흙먼지는 아직 솟아오르지 않았다. 진동은 땅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명계에서 올라와 본 경험이 있는 리리조차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폭발.
죽어 명계로 갔던 자가 둘이다.
그럼 세 번째로 올라올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폭발은 너무 거대했다. 그건 시작일 뿐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뭔가가 부풀듯,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처럼.
땅이 일렁였다. 물결치듯 움직이며 천천히 솟아올랐다.
아직도 뭔지 알 수 없었다. 온갖 불안한 추측이 팽이처럼 마음을 어지럽혔으나 수많은 생각 중 그럴싸하거나 의미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뭐가 뭔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이거 하나만은 명확했다.
강선후가 지금 웃고 있다는 것.
그리고 땅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새로운 안개가 하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안개는, 악마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거대해서 알아보기 힘든 영혼이라는 사실을.
“……설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한 이 생각을 후회했다.
이 시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남아 있지 않은 껍데기뿐인 말.
있을 수 없는 일은 이미 너무 많이 일어났다.
한 인간의 손으로 인해서.
콰아아아앙—!
땅이 솟아올랐다. 부풀다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더니 곧 사방팔방으로 산개했다.
거대한 먼지가 솟아올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으나, 너무 강렬한 힘이었기에 먼지마저 금방 날아가 버렸다. 자연 현상 없이 고요와 악마에 대한 공포, 그리고 왕의 무덤이 뿜어내는 빛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쉬이 느낄 수 없는 미답의 땅이 격변을 일으키듯 거칠게 요동쳤다.
그 공포 속에서, 리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막대한 먼지 뒤편에 가려져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먼지 이전에 이미 흑성과 어둠으로 가려져 있는 하늘이었다.
“……운데라가 없었어.”
명계와 이승을 나누는 신. 운데라의 달빛이 세상에 없었다.
명계가 이승에 관여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솟아오른 건 하나의 팔이었다.
죽음의 주인의 팔이 그 경계를 뚫고 올라왔다.
그 손은 미천한 한 악마의 불결한 몸뚱어리를 잡아 짓이겼다.
“킥, 키기긱…….”
기만과 여유로 가득했던 악마 덩어리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뭉개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떻게 버텨 내는 듯했다. 정말이지, 악착같은 생명력과 힘이었다.
광대의 입이 벌어지며 도끼가 떨어졌다.
이걸로 충분했다.
강선후는 푸른 갈기를 뿜어내는 말 위에 올라타 고속으로 달려나갔다. 애초에 명계 태생이었던 말은 죽음에서 자유로웠다.
강선후는 렐릭시나 위에 두 발로 올라탔다.
그리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렐릭시나 역시 도약했고, 그 추진력은 강선후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 줬다.
턱—!
강선후는 떨어지는 도끼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광대의 얼굴을 내리쳤다.
죽음의 기운이 심부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 악마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 심장을 파괴해야만 한다.
이런 법칙 따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