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3
263화
ep76. 신앙, 자유, 믿음
성녀, 벨라 비바치시모는 앞을 보는 대신에 뒤를 돌아보았다. 보자마자 놀랄 정도로 큰 힘을 가진 악마를 외면하고자 한 게 아니었다. 악마의 해일은 큰 충격을 받아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아마도 짧지 않은 공백이 있을 터였다.
벨라는 가늠하고 싶었다. 강선후가 밟아 온 길이 어땠는지, 그 편린이라도 조금이나마 느껴 보고 싶었다.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발이 어째서 종국에는 왕국으로 향했는지, 어째서 이 인간이 자유가 아니라 왕좌라는 의무를 선택했는지. 거기에 강한 의문을 느낀 탓이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듯, 이곳에서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건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함부로 추측할 수조차 없는 전투의 흔적만이 이곳에서 무슨 역경이 있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
종국에, 그녀가 바라보게 된 건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의 광원이었다.
왕의 무덤.
엘 네르키오el nercio.
너무나 당연하게 한 편의 위기감조차 없이 불꽃을 잃어버린 이 시대더라도, 언젠가 황금이 반짝였다는 걸 잊지 않게 해 준 시대의 등대이자 영광의 증명. 저 빛 하나로 황금의 시대를 부정하던 모든 학자들에게 반박할 수 있었고, 저 빛이 우리를 종국에 옳은 길로 인도해 줄 것이라 아이들에게 가르치곤 했으며, 누군가는 왕은 사실 승천하여 별이 되었고 이 황금빛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성녀는 알 수 있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악마 하나 정화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취급 받았고, 예언이라는 능력 단 하나 때문에 성녀라는 입지를 지킬 수 있었던 벨라였지만 지금 만큼은 신을 사랑하며 그 권능을 제 양손에 감히 품은 대주교였다.
왕의 무덤에 대해서 내려온 모든 전승. 그건 벨라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 본질을 벗어난 것들이었다.
왕의 무덤의 빛은 신성이자, 권능이었다. 그 자체로 신에 필적할 정도의 빛이었으며, 그게 평범한 인간의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뒤에도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이유였다.
벨라가 보기에 본질은 여기에 있었다.
어째서 왕의 육체가 빛을 뿜어낼 정도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가. 어째서 신에게 버금갈 정도의 정순하고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가.
왕이 생전에 평범한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수명이 짧아 이런 운명을 맞이했다면.
모든 주신에게 버림받아 가호를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어째서 왕의 유해가 저런 신성을 뿜어내고 있는가.
벨라는 지금 이 순간 이 의문의 대답을 찾아냈다.
근거는 부족했지만 벨라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대답은 그 자체로 너무나 거룩했으며, 영광스러운 성인의 길 그 자체였으니까.
인간이 신에게 버림받아 가호가 없는 이유.
자애롭고 평등한 주신의 가호를 인간이 가지지 못한 이유.
그건 인간이 신에게 버림받아서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벨라가 생각하기에 이건 확실했다. 주신께서는 애초에 인간을 버릴 분들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인간이란 종족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옛날부터 지금 바로 이 순간까지도.
인간이 가호가 없는 이유는.
종족 전체의 가호가 단 한 사람의 몸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이 시대의 미래를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이며.
그 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왕의 결정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주신께서는 그 선택을 존중했다.
마땅히 그러시는 분들이니.
그렇기에 왕의 유해는 찬란히 빛났으며
셀 수 없는 그 모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과거, 그 옛날 찬란하던 시대의 인간은 후손을 위해 기꺼이 성인의 길을 걸었다.
모든 이가 하나의 뜻으로 뭉쳐 새로운 빛을 만들었다.
이는 기적이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고 의심할 수도 없는 기적.
인간이라는 종족이 스스로의 손으로 빚어낸 기적.
짧은 시간이었으나 긴 고뇌처럼 느껴졌다. 성녀는 손을 올렸다. 입에 물고 있는 단검을 부여잡았다. 단 한 명, 수호기사단장 레베카를 제외한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저 입에 물린 악마. 신의 단말마에서 태어난 콜브‘랑데쥬가 정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단검이 입에서 떨어졌다.
모든 신도들은 제 대주교이자, 예언자이자, 성녀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녀의 첫 마디는 제 신도들을 향하지 않았다. 무력했던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인연을 향했다.
그녀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종족은.”
모든 신의 가호를 받는 별의 자손은 모든 신에게 버려졌다 취급받던 종족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신의 장기말이 아니었던 거야.”
스스로의 선택으로, 스스로의 희생으로 기적을 빚은 이들.
강선후는 과거 예언에 시달려 스스로를 장기말이라 여겼던 성녀를 떠올렸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야. 인간뿐만이 아니야.”
이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벨라의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던 마지막 고뇌마저 털어 내게 만들었다.
예언으로 인해서 도시를 파괴하고, 뱀파이어를 학살한 죄책감으로 매일 밤 비명을 질렀던 반쪽짜리 성녀.
그게 너무 싫어서 정화하지 못한 대악마를 입에 물었던 한 명의 별의 자손이 고백했다.
“우리는 신의 장기말이 아니야! 예언도, 숙명도 우리의 것이 아니야! 우리는 죄인도 아니고! 어린 양도 아니고……! 길 잃은 이들도 아니야……!”
성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혜성조차 저 멀리 사라져 가고 이제는 몇 개의 별밖에 남지 않은 어두운 하늘.
“하지만 그게 우리가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흑성의 어둠은 신과 세상을 단절시켰다. 언제나 우리를 내려다보는 신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여전히! 여전히 아침에 찾아오는 빛에 기쁨을 느끼고, 달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니.”
성녀는 악마였던 단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날카로운 날에는 이미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주님. 그대들의 품이 아닌 자유에 몸을 던지고자 하는 저를, 우리를, 우리가 인도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사랑해 주세요.”
어제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새로 열리게 될 시대에도.
눈앞의 인간에게 배웠다.
우리는 신을 사랑하더라도 우리의 자유를 향유해야만 했다.
그게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주는 지표니까.
이 남자가 그걸 증명하니까.
그때, 지하의 숲이 고맙다며 건넨 작은 꽃이 아직도 벨라의 품 안에 있었으니까.
성녀는 강선후 옆에 나란히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입에 물고 있었던 악마의 그릇은 이제 손에 쥐여 있었다.
하늘을 가려졌고, 신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 허수아비 악마가 저런 식으로 하늘을 가렸었다.
신은 너무나 위대한 존재라 단순히 가려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찾지 못하고는 했다. 우리는 그분들에 비해서 너무나 미약하고 미천하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니까.
하지만 성녀는 이 목소리가 하늘에 닿으리라 믿었다.
성녀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생전 무기를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아무렇게나 붙잡은 강대한 힘의 그릇을 꼭 쥔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마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판단은 그분들의 몫이었으며,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게 신앙의 바른길이니.
그 길에서 빛나는 건 오직 믿음뿐이니.
이 모든 게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쩌면 성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지상에서의 유일한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죽기 전에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경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삐이이익—」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전역에서 울리는 듯한 그 소리는 천 년마다 우주 저편에서 날아오는 매의 것이었다.
아홉 주신 중 하나.
지금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법칙을 깨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하늘이 갈라졌다. 빛이 한 줄기 떨어져 손목을 적셨다. 검은색 칼날이 미약한 한 줄기의 빛을 반사하여 하얗게 빛났다.
태양 세피롯. 아홉 주신이셨다.
신들은 그저 존재하는 존재들이었다. 의지를 품고 세상에 관여하는 건 세계와 신의 약속을 깨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하나 기꺼이 깼다. 사랑하는 딸이 고백한 신앙에 화답하기 위해서.
그래도 되는 시대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죽은 신의 단말마에서 태어난 악마의 칼날은 하얀빛을 품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더 이상 마기가 아니라 권능이었다.
악마는 성유물이 되었다.
그 빛에 정신이 아늑해졌던 성녀는 어느 순간 앞을 바라보았다 몰려오는 해일에서 수십의 가시가 성녀에게 먼저 달려들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저 멀리 있었던 것 같은 해일은 어느새 지척에 있었고, 가시는 그보다 더 가까이에 있었다.
그 몸에 가시가 닿기 직전, 푸른 불꽃이 눈앞에 휘날렸다. 동시에 은빛 검격이 원을 그리며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흑마에서 뛰어내린 인간, 그리고 그가 막 거두고 있는 은빛의 검.
조각나며 산개하는 수많은 가시들.
단검이었던 악마는 성유물이 되어 길게 빛나는 창의 모습으로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악마는 비명을 질렀다. 그 심장에 복구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가 생겼으며 영혼이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해일은 뒤로 튕겨 나가며 몸부림쳤고, 온갖 짐승과 인간의 형상으로 빠르게 변하면서 고통을 표현했다.
하나로 뭉쳐져 폭발할 듯 부르르 떨다가도 금세 안정된 듯 고요한 바다의 형상을 모사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부짖은 수천의 인간이 되다가 다시 녹아내리더니 서로를 물어뜯는 짐승들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다가 전조도 없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녹아내리듯 바닥에 깔렸다. 왕의 빛을 반사하여 유일하게 황동색으로 반짝거리는 바닥마저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곳에서 하나씩 고개를 드는 악마들.
검은 본 드래곤, 허수아비, 이름 모를 대악마. 명계에서 만났던 데미이블의 흉측한 영혼.
그건 강선후가 아는 것들이었다.
강선후와 대립했던 모든 악마가 이 자리에서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저것들 하나하나가 본래의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걸까? 그건 알 도리가 없었다.
여전히 왕국을 가리고 있었던 거대한 검은 벽, 그 가운데에 그림자의 형상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벽은 기다란 날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왕국을 가로막던 벽. 그건 날개가 되어 거칠게 휘적였다.
흑성이 뿜어내는 어둠에 힘을 실었다. 어마어마한 풍압을 뿜어내는 것처럼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어둠을 뿜어냈다.
강선후는 렐릭시나의 등 위에 올라탔다. 렐릭시나의 푸른 갈기는 어느새 새하얗게 빛났다. 흑마는 불타오르는 것 같은 콧김을 연신 뿜어냈다.
“이젠 진짜 지체하면 안 돼.”
강선후는 그렇게 외쳤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으나, 본능적으로는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이 어둠은, 정말로 위험했다.
그렇기에 대악마들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따위는 고려사항조차 되지 않았다. 어떻게는 뚫어 내야 했고,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었다.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르고는 물었다. 저 사이에 뛰어드는 건 참을 수 없는 공포였으니까.
강선후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아르고는 더욱 공포에 질렸다.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를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그럼…….”
“내가 만든 이야기를 믿을 때지.”
강선후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죽지 못하는 운명 속에서 죽음을 택하여 악마가 된 본 드래곤이 거칠게 그에게 다가왔다. 그 발짓, 날갯짓 하나하나가 세상을 뒤집을 듯한 움직임이었다. 강선후는 이를 악물고 왕국을 향해 다가갔다.
악마가 검은 숨결을 머금은 그 순간.
무수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수천 마리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난데없이 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이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태양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수천의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강선후가 아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숲들이 서로 정보와 자원을 교환할 때 그 매개로 쓰는 새들.
대신에 숲에게 양분을 얻는 식으로 서로를 돕는 존재들.
“……버뮤다.”
숲은 제 목숨을 구한 인간을 잊지 않았다.
수천의 새들이 각각 씨앗을 들고 왔다. 반절은 평범한 것이었고, 반절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그들이 물고 온 세계수의 꽃가루가 이곳에 휘날렸다. 생명을 품었던 적이 없는 곳이 생명으로 가득 차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명의 영역을 제집으로 삼는 존재가 있었다.
녹색의 반딧불이가 모래 사이에서 올라오는 듯하더니, 땅에서 수천의 칼날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올라왔다. 그건 본 드래곤의 뼈를 파고들고, 부수면서도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덩굴은 그 몸을 관통하며, 들어 올렸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녹색의 반딧불이들은 온 세상을 생명으로 가득 채웠다. 죽음을 선택한 존재를 부정했으며, 그 존재에 격노했다.
「우리의 사명을 지킬 수 있어 기뻤습니다. 우리의 주인.」
강선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멀어질 정도의 속도로 달려나가고 있었으니까.
허수아비는 어둠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렐릭시나의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어둠. 속도가 느려지는 걸 느끼는 찰나, 진정한 의미의 해일이 허공에서 날아왔다.
황금댐의 거대한 물의 정령이 제 숙적을 휘감았다. 지배당한 적이 없어 거칠기만 한 그 정령은 막무가내로 허수아비를 내리깔고, 두들겼다. 강선후는 그 아래로 지나갔다. 물이 닿는 모든 부분의 상처가 치유되었다. 리리는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허수아비의 아래를 지나갔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위에서 거대한 손이 내리쳤다. 검은 태양의 숭배자들을 운명으로 묶었던 대악마.
그것이 강선후 위를 내리쳤다. 피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크게 문제는 없었다.
“……답은 찾으셨어요?”
「아직.」
팔꿈치로 악마의 손아귀를 막아 낸, 황금으로 빛나는 갑주는 말했다.
리빙 메탈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이 현신할 때 금속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 영역에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바람에 실려 있는 황금의 영광들.
그게 한데 모이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곳에 올 수 있었다.
천공의 기사는 자신이 막고 있는 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답 하나는 찾았다. 작지만 옳은 답이라 생각하고 있다.」
천공의 기사는 아래로 빼 두었던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과거의 영광과 기억을 머금은 주먹이었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 굳이 답을 먼저 찾아 둘 필요는 없다는 것.」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