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ep77. 귀환
마지막 대악마는 조각났다.
단 한 번의 타격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황금의 갑주는 그렇게 서서, 강선후를 바라볼 뿐이었다. 둘 사이에 이 이상 대화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해야 할 일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강선후는 다시 달려나갔다.
악마는 황금으로의 행진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건 처절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악마가 흑성을 도우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그저 둘의 뜻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오묘하게 같은 길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선후의 전진을 막고자 발악한 악마의 시도는 순식간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길을 가로막았어야 마땅한 모든 거대한 존재는 순식간에 압도되었다. 강선후는 그저 전진만 했을 뿐이었다.
“크아아아악—!”
렐릭시나는 울부짖었다. 아르고가 견딜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달려 나가며 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머리를 휘저었다. 그 뒤를 엘신의 백마. 그리고 불사조와 설산 늑대의 영혼이 따랐다.
「이익…… 진짜!」
괴팍한 해적이 강선후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았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날 대했다간, 네놈을 처형할 것이다!」
강선후는 웃음을 터트렸다.
“미안해요. 그때는 그럴 일이 있었어요.”
에드워드는 자신을 봉인한 강선후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네놈은 목숨줄 가지고 협박하는 건 씨알도 안 먹히겠군.」
“저도 제 목숨 소중한 건 알거든요.”
「그게 개소리라는 걸 지금 이 상황이 증명하지 않더냐.」
강선후는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 보였다. 에드워드도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저것들이 공 하나 세우려고 저토록이나 몸을 비트는데, 선장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이 정령 역시 강선후를 이루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었다.
그 역시 황금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에 함께할 권리가 있었다.
이곳에 온 모든 이들, 그리고 이곳에 오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맡은 바에 충실한 모든 이들 마찬가지였다.
강선후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를 막는 건 악마의 단 한 부분.
벽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겠지.”
강선후의 예상대로 벽 전체를 제 날개로 삼은 존재는 강선후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코입이 없었으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가능.
그걸 존재 의미로 삼은 악마에게 왕국은 허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 악마는 황금의 시대가 끝나서 태어난 게 아니야.”
강선후는 그렇게 확신했다. 슬픔까지는 황금의 시대가 만들어 낸 게 맞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가능은 그 시대의 책임이 아니었다.
리리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시대가 시작되며 태어난 악마.”
강선후는 대답을 보류했으나 이는 사실상 긍정을 뜻했다.
황금의 시대가 만들어 낸 악마가 아니라 풍화의 시대가 만들어 낸 악마였다.
이 시대가 맞서야만 했던, 이제까지 피해 왔던 게 벽의 형태로 눈앞에 있었으며 흑성의 시대를 흩뿌리는 장본인이 되어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피하고, 외면하면, 그건 나중에 더 큰 벽이 되어서 다가올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그 벽과 맞서야 한다.
강선후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생각이었고, 강선후의 삶에 한계라는 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 모든 건 오래전 다 부서진 지 오래니까.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벽도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었다. 그의 모든 경험이 믿음의 근거가 되었다.
벽을 날개로 삼은 그림자는 그런 강선후를 향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뜻 여유로운 모습 같았으나 그게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심장은 금이 가 영혼이 흘러나가고 있었으며, 모든 시도는 돌파되고 있었다. 강선후가 계속해서 그래 왔던 것처럼, 악마 역시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었다.
벽이 올라갔다. 더 이상 강선후를 가로막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장애물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그림자의 양쪽에 하나씩 달린 거대한 날개.
그건 위로 치솟으며 진정한 의미의 날개가 되었다. 전승 속 악마의 날개라 말하는 그 모습 자체가 되었다. 악마는 필멸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악마다운’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죽어 가고 발악한다.
그 과정에서 폭주했다. 모든 악마가 그렇듯 저항하고 폭주할수록 정돈된 형태를 잃고 끔찍한 모습으로 변해 가고는 했다.
껍데기를 벗고 본질에 가까워지는 악마.
불가능이라는 걸 실현하기 위한 형태가 되었다. 악마는 목적에 따라 능력을 맞추는 존재이기에, 모든 걸 극복해 버리는 인간 앞에서 당연한 것처럼 초월했다.
악마는 흑성이 되었다.
작은 흑성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몇 개의 우주가 들어 있었다. 작은 것처럼 보였으나, 절대로 작지 않은 흑성.
리리가 가장 먼저 깨달았다.
악마가 검은 구멍의 형태가 되는 그 순간, 지평선 저편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던 흑성은 모습을 감췄다.
포기하고 물러났을 리는 없었다. 사라졌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흑성이 이제까지 우리를 내려다보던 그 존재라는 사실을.
별이었던 적 없이 처음부터 흑성이었고.
최초에는 하늘에서 군림하던 신에게 죽음의 달콤함을 속삭여 투신하게 한 장본인.
이름이란 개념보다 먼저 존재했기에 이름이 없었고, 삼라만상의 순환에 따라 차례가 다가오면 위대한 암흑시대를 열어 우주를 차갑게 식히는 “끝”의 상징.
무명성(無名星)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저토록이나 멀리 있었음에도 세상에 그런 영향을 주던 존재였다. 이 점에서는 별과 같았다.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다면.
그 뒤에 찾아올 재앙은 쉽게 예측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절망은 너무나 쉽게 찾아왔다.
과정 따위는 없었다.
불은 꺼졌고, 세상은 어둠만이 남았다.
* * *
많은 이들이 깜깜한 세상 속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둠에 잠식된 곳에 있는 이들은 제 눈을 미칠 듯이 비볐고, 누군가는 훌쩍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영웅이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섭정이 전했고 왕의 무덤이 정했던 희망은 어둠 속에서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만 느껴졌다.
* * *
손이 떨렸다. 리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별도, 사람도, 강선후를 돕기 위해 찾아온 모든 열정들이 전조도 없이 사라졌다.
“선후.”
소리마저 어둠에 묻혔다. 목구멍을 넘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허무, 후회. 이런 감정조차 사치였다.
압도적인 절망감 앞에서 그런 사소한 것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위대한 암흑시대.
드디어 그 시대가 열린 걸까.
세상 모두가 이런 암흑 속에 갇히게 된 걸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리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 거잖아.
그 사람이 이렇게 의미 없이 끝나는 건 안 되잖아.
우주의 순환이라고? 알 게 뭐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그 순간이었다.
“—엘 라EL LA.”
모든 게 어둠에 잡아먹힌 지금, 유일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였다.
엘el.
평범하지 않은 것에 공통적으로 붙는 접두어.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논쟁거리인 단어.
강선후 역시 그 의미는 몰랐다.
아니, 리리가 보기에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의미 있게 여겼다.
“돈 베르니카DON BERNIKA.”
왕의 언어는 듣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와 언제나 함께 다니며, 그와 영혼을 연결한 리리는 저 단어를 마음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단어였고, 그가 아는 이름의 도입부였다.
길을 여는 여정을 떠나는 자.
돈 베르니카 키호테.
어떤 군주의 이름.
목소리는 다시 멈췄다. 어서, 빨리, 다음 어절을. 마지막 어절을……!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강선후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걸로 끝났다.
대체 왜?
이 한 시라도 아까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인 거지?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의 선이 사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이 광선은 보란 듯 우주의 법칙을 위배했다.
그 주변을 맴돌며 희미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구형의 순수한 에너지 밀집체들.
그 반딧불이 같은 모습은 고요한 듯싶었으나 이미 이걸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리리는 이 안에 응집된 힘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응집된 힘이 너무나 강대하여 그 영역을 벗어나 산란되는 현상.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힘은 리리가 알기로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고요가 허락된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 짧은 시간 리리는 강한 의문을 품었다.
……강선후는 불멸자의 진명을 외지 않았는데?
문장은 중간에 끊겼는데.
그러다 문뜩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끝나는 문장이 있었다.
강선후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왕의 언어.
엘 라 돈 베르니카EL LA DON BERNIKA.
“……길을 열지어다.”
거대한 폭풍이 시작되었다. 지난번처럼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풍이 아니었다.
리리는 그게 등 뒤에서 시작된 폭풍이라는 걸 알았다.
세상이 빛을 되찾았다. 왕의 무덤의 광채가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리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게 빛을 발하는 한 쌍의 날개가 보였다. 반가운 얼굴일까?
아니,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키호테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천한 존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고요는 끝났고 숨결은 흑성을 강타했다. 리리는 옆으로 뛰어들어 몸을 낮췄다. 그러면서도 저 위대한 종족, 신의 첫 번째 자손을 악착같이 바라보았다.
그때가 돼서야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쪽. 세상이 끝나는 지점. 지금까지 우리가 거쳐 왔던 길.
그곳에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 둘.
열.
마흔.
백.
…….
…….
* * *
세계의 모든 곳이 절대적인 어둠에 묻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짙어지는 어둠을 더 이상 막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시야는 짧아져 갔고, 공세는 버티기 어려워져만 갔다.
제국의 수도, 솔라는 불사조가 선사해 준 불꽃을 빛 삼아 버텨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였다.
목자의 상을 타고난 꼬마 모험가는 부상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빛나는 날개가 하늘을 가득 채운 탓이었다.
새의 날개가 아니었다.
* * *
리리가 목격한 브레스는 온 세상을 뒤흔들고 땅을 내려앉게 만들어 지층을 형성할 정도였다.
지금, 하나의 존재만을 멸하기 위해 쏘아진 브레스는 그렇게 거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극한으로 압축되었으며, 공간을 자르는 칼날이 되었다.
첫 번째 브레스를 견디는 흑성. 그 숨결 위에 하나의 숨결이 더 얹어졌다. 두 개가 부족하다면 다섯 개가 되었으며, 곧이어 셀 수 없고 쳐다볼 수도 없는 광채의 선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열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하지만 흑성은 견뎌 내고 있었다. 부조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신의 첫 번째 자손마저 저 흑성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군주를 폄하하는 건 불경죄였기에 그랬다.
그렇기에 그저 고개를 돌려 붉은 날개를 바라보았다. 그 움직임은 우아했으며, 야성적이고 뜨겁게 열정적이었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내뱉기도 전, 리리는 깨달았다.
예전에 성녀와 목격했던 그의 브레스는 군주의 진심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저 여정 중 내뱉은 가벼운 한숨에 지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길을 열지어다.
강선후가 알고 있었던 유일한 왕의 언어에 길을 여는 자가 화답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시간마저 꺾어 버리는 힘 탓에 온 혼란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 안에서 검을 치켜들고 브레스를 순풍 삼아, 마침내 노출된 검은 천체에 쇄도하는 황금빛 갑주. 그리고 은빛 검의 잔상을 보았을 뿐이었다.
고인물은 이계가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