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7
27화 ep11. 남쪽, 짧은 여행길 (1)
오랜만에 서울로 가서 필요한 탐험 장비들을 구매했다.
차태식 씨가 장비를 제작해주는 약 한 달간 악착같이 일을 한 건 아니었다. 탐험의 감을 되찾으려고 버뮤다 숲에 놀러 가거나, 아니면 여관에서 내놓은 신메뉴를 맛보는 등, 쉴 땐 쉬면서 설렁설렁했다.
의뢰 중 어려운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충 무슨 약초나 소재들을 구해달라는 의뢰가 대부분, 가장 컸던 게 호기롭게 외부 관광하다가 조난 당한 패스파인더와 그 고객들을 구조하는 일이었다.
이건 심지어 경비대와 합동 작전으로 했었지. 막상 가보니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게 대충 육백.
그래서 총 잔액은.
<41,324,120원>
“···돈이란 게 이렇게 쉽게 벌리는 거였나.”
그렇게 돈을 아껴 쓰지도 않았는데 처음 귀환했을 때보다 잔고가 여덟 배는 넘게 불었다. 물론 메두사에게 당한 사람을 치료해준 의뢰가 컸긴 했지만, 앞으로도 내게 의뢰할 사람들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진 않을 텐데.
맨 처음부터 다짐하고 시작했듯, 돈에 대한 관심은 애초에 크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벌면 된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벌린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한 달에 백만 원짜리 의뢰 다섯 개만 맡아도 오백이다. 물론 이건 최소치로 잡았을 때 기준이다. 실제로는 대체로 더 벌리겠지.
조금 더 신경 써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의뢰 위주로 묶어서 해결한다면 딱 일주일만 써도 열 개의 의뢰를 처리하는 게 힘들지 않다.
이 계산은 심지어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했다. 한달 내내 전력을 다 해서 한다면? 솔직히 예상할 자신이 없다.
물론 이제 와서 물욕이 생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많은 돈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돈 관련 문제는 급한 게 없으니까.
진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길드 사무소에서 뵐까요?]남쪽으로 출발하기 전, 그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OWIC의 직원에게 이야기를 좀 들어보기로 했다.
가장 적합한 사람은 아무래도 진서연.
이상하리만치 내게 협조적인 사람이었다.
짐을 한가득 들고 이계로 돌아온 뒤 분류하는 동안 진서연이 도착했다.
진서연은 내 작업을 한동안 구경하다가 입을 열었다.
“탐험 준비하시는 거예요?”
“티가 나나요?”
“해외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은 장비들이라서요.”
사무소로 도착한 진서연은 의자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연구원인데 어떻게 매번 방문할 수 있을까? 일이 안 바쁜가?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반대로 아예 퇴근하지 않는 수준이라 가능하다고 진서연은 설명했다.
저런 걸 들을수록 취직은 역시 싫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나는 진서연에게 남쪽 마을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남쪽 마을이요? AO-4등급 기밀이에요. 알고 계신 걸 보니 정보통이 생기셨나 봐요.”
“회사 기밀이 이렇게 밖을 나도는데 신경 안 쓰이세요?”
“그건 전략기획본부 책임이라 저는 모르는 일이네요.”
“비즈니스구나.”
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남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거죠?”
남쪽에 마을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게 남쪽으로 무작정 향하면 된다는 의미가 되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계의 동서남북은 편의상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 지구와 전혀 달랐다. 나침반도 없었다.
“OWIC이 그곳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찾아갈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그걸 듣고 싶은 거거든요.”
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밀이라고 해서 약간의 저항을 예상했는데, 진서연은 오히려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납득했다.
“구구절절 말해봤자 나중에 기억 안 나면 말짱 꽝이죠? 여기요.”
진서연은 품속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남쪽 개척 현황 지도예요. 작년 말 버전이긴 한데 위치 자체는 달라진 거 없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치자 베이스캠프 기준으로 남쪽으로 쭉 진행되는 지도가 펼쳐졌다.
“회사에 걸리면 문제 되는 거 아닌가요?”
“걸리면 문제 되죠. 걸리면요. 제가 왜 이계에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지 아세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계에 들어올 때 몸에 심한 부담이 가해진다. 그래서 웬만하면 선호하지 않는 게 정상이기 마련일 텐데.
진서연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이계에 있는 동안은 무선 도청을 당하지 않거든요.”
“······.”
직원들에게 도청 장치를 달아둔다고?
“미친 회사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도와주는 거예요?”
“글쎄요? 사익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아니면, 좋은 거래처가 될 수도 있어서? 개인적인 연구 열정 때문에? 어쩌면··· 그냥 팬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요.”
팬?
의문이 들어서 진서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
다음날, 관리사무소에서 탐험 허가를 받은 뒤 바로 짐을 쌌다.
“안전줄, 여분 밧줄, 여분 장갑, 껌, 속옷하고 양말······.”
쿠크리 나이프, 사냥용 나이프.
그리고 롱재킷은 입고, 천잠사로 만든 망토는 끈으로 묶어 가방에 단단히 고정했다.
리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물건들이네. 다 엄청나게 튼튼해 보여. 재질도 모르겠고···. 우리 왕국에서는 이 정도면 특등품 취급했는데.”
“너는 어쩔 거야?”
“같이 가. 인도자의 의무를 지켜야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는 건장해 보이는 체격이 아니었지만, 몇 번 데리고 다니면서 내 예상보다도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눈치챘다.
모든 뱀파이어가 다 그러진 않을 텐데, 움직이는 걸 보면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미리 준비해둔 짐을 가방 속에 차곡차곡 넣고, 빠르게 준비를 끝냈다.
아, 맞다. 이것도 있었지.
“리리.”
“응.”
“자.”
리리는 내가 내민 걸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차태식 씨에게 의뢰한 건 망토와 재킷뿐만이 아니었다.
스캐븐 울프 가죽을 특수하게 처리해서 탐험용 상·하의 한 벌을 더 만들어달라고 따로 부탁했었지.
이건 따로 부탁하는 거라 소소하지만 비용도 지급했다.
“······.”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로 돌아다니려고? 넘어지면 많이 민망할걸?”
“그거 실례잖아.”
“그러니까 이거 입고 다녀.”
리리는 그 옷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음은 고마운데 우리 종족은 피부가 약해서 아무 옷이나 못 입어. 특정 재질에 특별하게 처리된 옷만···.”
“했어. 특별한 처리, 특정 재질.”
스캐븐 울프 가죽의 내피 부분을 특별하게 처리해달라고 부탁드렸었다. 차태식 씨는 실력 하나는 확실했다. 말로만 설명했는데도 이렇게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주다니.
리리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받아 들은 뒤,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잠시 뒤에 나오는 모습은.
“오.”
영화에서 본 거 같은, 챙 모자까지 세트로 된 탐험 복장.
리리의 얌전하고 날카로운 외모와는 상반된 느낌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특별한 분위기를 주고 있었다.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꽤 무겁겠지만 그만큼 튼튼했다. 번데기의 외피 남은 걸 여기저기 덧댄, 나름대로 특제품이지.
“생각 보다 어울리는데?”
“언젠가 반드시 갚을게.”
“사원 복지라고 생각해.”
“로얄 블러드는 빚을 반드시 갚아.”
내 입장에서도 탐험 메이트가 생긴 셈이었다. 윌슨을 매번 만들었던 것도 사실 탐험은 꽤 외로운 취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출발하자. 우리 식량은 많이 안 챙겼으니까 참고해. 다 떨어지면 사냥해서 먹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리리를 바라보다가 배낭을 메었다. 묵직한 이 느낌. 진짜 오랜만인데.
끼이익—
문을 열고 남쪽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를 바라보았다.
목적지는 지평선을 따라 솟은 산맥의 뒤쪽. 그 숲 깊숙한 곳에 숨겨진 마을이 있다고 했다.
거리는 도보로 보름 정도였다. 지도를 보아하니 꽤나 길이 거친 모양인데.
“우리는 일주일 안에 도착할 거야.”
지도를 한 번 본 뒤, 재킷의 안주머니에 깊이 찔러놓고 단단히 지퍼를 잠갔다.
나침반 없이 지도로만 길을 찾는 건 한계가 있다.
OWIC도 생각이 있었는지 지도만으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신경을 쓰긴 했지만···
내겐 이런 잡기술이 필요 없었다.
손을 정면으로 뻗었다.
“마르카마 투 살리-운드 데 모스marlkaama to sali-wond de mohs.”
—불의 형상을 취해 별의 무덤을 추적하라.
불씨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내가 보는 정면으로 나열되었다.
별의 무덤.
그게 뭘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디에 있든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곳이었다.
지구의 극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
이거라면 나침반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었다.
“···룬 언어를 그 정도까지 쓸 수 있었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봤던 표정 중에서 가장 놀란 느낌이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첫 발걸음을 떼었다.
***
산에서 태어난 숲.
이 존재들은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산과 동시에 태어났기에, 산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고집 센 노인들이었다.
그래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젊었던 시절의 투기는 차가운 별빛을 받으며 어느새 식어버렸고,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지켜보는 것 역시 그저 유흥이었고, 열매 한두 점 정도는 거뜬히 내어줄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사는 존재들이 마찬가지로 너그러울 거란 보장은 없었다.
“으, 어억, 커억······.”
남쪽의 한 산속, 거친 덤불에 숨은 하운드 하나가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크어···. 켈룩.”
남쪽은 지구인들이 꽤 멀리까지 진출한 영역이었으나, 그게 모든 비밀이 풀렸다는 의미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에 새워진 사원은 땅속에 묻혀 무수히 많은 지하 던전이 되었으며, 일확천금을 꿈꾸는 하운드의 좋은 목표가 되었다.
별 볼 일 없는 하운드 다섯은 우연히 산 깊은 곳에서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고.
“으, 으으······.”
그들 중 넷이 사지가 잘려 죽었다.
철컥, 철컥—
금속이 거칠게 부비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땅을 밟아대는 그 금속 부츠의 소리에, 하운드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막았다.
철컥.
눈앞에, 검을 든 갑옷이 멈춰 섰다.
속이 텅 빈 갑옷.
자격 없이 침입한 인간을 도살하는 금속의 집합체.
골렘, 혹은 리빙 메탈.
철컥.
리빙 메탈이 뒤로 돌자, 그 등에 그려져 있는 원형의 문장이 보였다.
하운드는 그걸 바라보면서 덜덜 떨었다.
그의 동료들은 리빙 메탈과 처절하게 싸웠다. 수백만 원을 주고 불법으로 반입한 총마저 사용했다.
하지만, 급소도 형체도 없는 존재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네 번째 하운드가 사망하면서 리빙 메탈의 등에 적혀 있는 문장을 우연히 지웠다.
그러자, 그 존재는 힘을 잃고 후두둑 무너졌다.
리빙 메탈을 움직이는 힘은 그 문장에 있었다. 그게 이 괴물들의 약점이었다.
말하거나 적는 것만으로도 힘을 발하는 언어.
하운드는 저 문장의 정체가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룬이야······. 룬 문장···.”
하지만 이미 늦었다. 꿰뚫린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를 맨손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까.
“콜록···!”
마지막 하운드는 끝내 고통을 참지 못했고.
리빙 메탈의 날카로운 검이 그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떨어지는 하운드의 머리.
그의 시야가 어둠에 파묻히기 직전, 그는 눈코입이 그려진 풍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목격했다.
죽기 직전의 뇌가 만들어낸 환각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잘못 본 것뿐일까.
그걸 판단할 시간은, 그에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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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1. 남쪽, 짧은 여행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