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4
34화 ep13. 참을 인 세 번이면 도리는 지켰다. (2)
***
‘서지아는 원래 지훈이하고 저의 개인 거래처였어요. 처음에는 그렇게 막무가내가 아니었는데··· 나쁜 물이 들더니 점점 통제가 안 되더라고요. 돈에 대한 집착이 심해 보였어요. 거의 병적으로.’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OWIC의 상부랑 거래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부터는 연락만 유지되는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어제부터 그 연락도 두절되더라고요. 아마 나쁜 일이 생긴 거 같은데.’
‘하운드 점조직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어요. 간혹 있는 일이거든요.’
진서연은 서지아에 대해서 아는 대로 이야기한 뒤 자리를 떴다.
나는 그 이야기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일지를 읽고 있었다.
“뭐 해?”
어딘가에 숨어있던 리리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드레스가 아닌 활동복이라 평소보다 움직임이 훨씬 가벼웠다. 진작에 입혀줄걸.
“생각.”
“그건 알겠는데, 아까부터 당신이 읽고 있는 책. 뭐야?”
“일지.”
“일지? 일기 같은 거?’
“나 예전에 숲속에서 살 때 매일 적었던 거야. 정신병 안 걸리려고.”
“흐음.”
리리가 관심이 생긴 듯 내 옆에 들러붙어서 책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거 무슨 언어야?”
살짝 인상을 쓰는 걸 보니 내 말은 알아들어도 내가 쓴 문자는 읽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진지하게 읽고 있는 거야? 추억 회상이라고 하기에는 표정이 좀 진지한데.”
“공부.”
“어···.”
리리가 입을 살짝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가까운데 바로 옆에서 저런 표정을 하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유도 모르겠고.
“왜 그래? 갑자기.”
“당신 공부도 하는 사람이었어?”
그렇게 말하며 지하 유적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하고 앉아 있다. 얘도 차소희 과인가?
“···농담이야.”
“너도 농담을 할 줄 알았네. 목석인 줄 알았더니.”
정말로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저런 말을 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어쨌거나 저 말은 사실이었다.
“나도 이제까지 알아낸 룬 언어를 다 기억하는 건 아니야.”
사람이란 게, 자주 쓰지 않는 기술은 일 년만 지나도 까맣게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일지가 내게 굉장히 중요했다.
지금은 기억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소중한 경험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낚싯바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턱—
일지를 덮고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방금 복습한 룬 언어를 이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이계에서 살던 시절, 멘탈이 좋지 않고 항상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던 언어였으니까.
리리의 숨소리가 멀어지는 거로 보아 날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거리를 조금 벌린 모양이었다.
차분하게 읊었다.
“탐-탓사Tham-tatha.”
순간적으로 아찔한 느낌이 들어 이를 악물었다.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하지만.
풀벌레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 바람 소리, 리리의 심장 박동 소리가 한 번에 들린다. 그리고 확대된 나뭇잎 표면의 모습이 닫힌 눈꺼풀 너머로 보인다.
나무 내부의 까끌까끌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수천의 감각이 뒤섞여 한 번에 몰아친다.
“으···.”
역시 견디기가 힘들어 눈을 떴고, 동시에 룬 언어의 효과는 해제되었다.
리리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탐-탓사는 어디에서 배웠어?”
“이게 뭔지 알아?”
“점성술사의 룬 언어잖아.”
이건 역설적이게도 내가 맨 처음 배웠던 언어였다.
정확히 무슨 효과인지 알기까지만 수년의 시간이 걸렸지.
뒤늦게 알아낸 효과는 이랬다.
“지성체를 제외한 근방 모든 생물의 감각을 빌려오는 룬.”
문제는 이거다. 하나만 선택해서 빌려오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몰아붙인다. 주변에 있는 모든 동식물. 그 수천의 눈, 수천의 귀, 수천의 코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한 번에 몰려오니 오히려 뭐가 뭔지를 모르게 된다.
—라고 생각해서, 이제까지는 쓰지 않았다.
“···숲속에서 살았을 땐, 조금만 부정적인 감각도 최대한 피했어. 조금이라도 생존에 문제가 되면 후회해봤자 늦을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구로 돌아오면서 나는 목숨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잔뜩 날카로워진 감정도 차분해지자 내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감당할만한 고통을 정면으로 부딪칠 여유가 생겼다.
다시 눈을 감았다.
“탐-탓사Tham-tatha.”
몰려오는 수천의 감각.
그것 중에서 내가 필요한 것만 남기고 하나씩 소거한다.
참선에 들어간 수도자처럼 하나씩, 천천히 의식 뒤편으로 파묻는다.
그러자.
“리리.”
“응······.”
“너 어깨 위에 벌레 있네.”
“응, 으힛!”
리리가 거칠게 어깨의 벌레를 털어내자, 내 시야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그 벌레의 감각이 나의 감각이 되어 있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감각 하나만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한 거다.
그건 지금의 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버리면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이거면 되겠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지구로 출발했다.
***
“강선후! 오랜만!”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차소희.
차원문 플랫폼.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이곳으로 얘를 불렀다.
나는 대충 손을 들어 보였지만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뭐임. 왜 이렇게 인사가 불성실해? 다시 해···. 응?”
툴툴거리며 다가오는 차소희가 우연히 내 핸드폰 화면을 바라본 모양이다.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뭘 하고 다닌 거야?”
<잔액: 241,294,102원>
아까 정지훈과의 협상이 떠올라서 혹시 몰라 실행해봤는데, 벌써 입금한 걸 보니 일 처리 하나는 빠른 회사인 모양이었다.
비현실적인 숫자. 평생 내 통장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던 자릿수였다.
“···몰라. 갑자기 들어왔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근데 솔직히 예상하긴 했어.”
“예상?”
“너 돈 많이 벌 거 예상했다고. 요즘 이계 커뮤니티에서 너 소문 엄청 도는 거 알아?”
모르고 있었는데 차소희 덕분에 알았다.
이계 일 하는 사람들이 서로 정보를 나누는 익명 커뮤니티가 있단다. 쉽게 말하면 이계 종사자 버전 블라인드라는데, 거기에서 요즘 내가 많이 언급된다는 이야기였다.
“너 질투하는 하운드 개 많아. 조심해.”
“조심하라니?”
“하운드들 이상하게 해코지하기로 유명해. 자기 업장 시들 거 같으면 경쟁자한테 가서 지랄하는 놈들 많거든.”
무슨 무림이야? 멋대로 해코지하게? 법은? 경찰은?
안 그래도 내가 묻고 싶은 게 이거였다.
“내가 귀환하고 나서 세상에 너무 관심이 없는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지금이라도 좀 들어보려고 불렀어.”
“귀환하고 나서 관심이 없어? 너 뭔가 잘못 알고 있는데.”
차소희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넌 새꺄 중학생 때 이미 병 걸려서 세상에 관심을 잃어버림. 이 누나는 네가 성인 되어서도 계속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명의네. 명의.”
혼자서 킥킥하고 웃는 차소희는 곧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카페 가자. 너 서울 오면 데리고 가고 싶었어. 가서 이야기하자. 그러고 보니 이거 옷 우리 아빠가 만들어준 거네? 맘에 들어?”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카페로 향했다.
잡담이 끝난 뒤 내가 물어본 건 하나였다.
“하운드들이 그렇게 문제를 많이 일으켜?”
“······.”
예상 외로 차소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차소희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짬이 있는 터라, 역설적이게도 숨기는 건 참 많은 편에 속했다. 우울하게 보이는 것 자체를 자존심 상해하는, 그런 강단이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다는 아니야. 그런데 그런 놈들은 확실히 있어. 사실 차원문 생기고 나서 서울 치안 엄청 안 좋아졌거든.”
“뜬금없이 서울이 왜?”
“서울에서 밉보여도 이계에서 해코지하면 되니까. 거기선 잘 안 들키거든. 사실 우리 아버지도 말은 안 하는데 자릿세 내고 계실지도 몰라.”
“···그 정도라고?”
“도시에서는 잘 못 그러는데, 좀 외진 상업가에서 그런 소문이 도네.”
대충 분위기는 알 것 같았다. 진서연도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었지.
“···OWIC이 하운드 뒤 봐주기도 한다며?”
“응. 걔네 관계 진짜 이상해. 싸우면서 거래해. 애플하고 삼성 관계의 뒷세계 버전이랄까.”
대충 분위기 파악은 끝났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 가?”
“오늘 좀 바쁠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안주머니에서 꺼낸 건 황금 지침이었다.
열어보니, 차원문 바깥에서보다 지침의 흔들림이 심해져 있었다. 목표물에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지.
지침이 향하는 곳은 결과적으로 잠실이었다. 약간의 예측, 그리고 운이 조금 따라줘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잠실에 도착한 뒤 도보로 1시간정도 걷자.
“···진짜 회전하네.”
지침이 360도로 거칠게 돌기 시작했다.
리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나서는 지침이 목표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내게는 또 다른 이정표가 존재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잠실 미개발 지역.
그 한 가운데서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손을 뻗어 조용하게 읊조렸다.
“마르카마 투 마르크 데 모스marlkaama to marlk de mohs.”
—불의 형태를 띠어 마르크를 추적하라.
서지아에게 새긴 룬 언어. 마르크marlk를 추적한다.
지침이 가리키지 못한 곳을 내 룬 언어는 정확하게 가리킨다.
가로등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거리, 모스의 불빛이 그 거리를 가로지르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이 외진 동네에서도 더욱 외진, 산 능선에 만들어진 4층짜리 구 아파트 건물.
다 쓰러져가는 그 건물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탐-탓사Tham-tatha.”
건물 내에 있는 모든 미물의 감각이 내게 넘어온다.
필요 없는 것을 소거하고, 또 소거하자.
「허억······. 흐윽······.」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년 다 뒤져가네. 쯧.」
「강선후 그 새끼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
밤 아홉 시.
이계와 지구가 동시에 밤인 날은 이주에 세 번꼴로 찾아온다.
통합분석실은 이때마다 야근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 시기에는 베이스캠프에서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그 모든 건 OWIC 입장에서 수집해야 할 데이터기 때문이었다.
정보 1팀의 주임 정지훈은 한창 근무 중, 강선후의 연락을 받아 바로 출장을 준비했다.
「사무소로 와주세요.」
강선후는 대체로 용건까지 바로 말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저 와달라는 연락 하나뿐.
정지훈은 직감적으로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다.
차원문을 넘고, 독기 충격을 견디고는 바로 베이스캠프를 벗어났다.
강선후의 사무소는 베이스캠프 외벽에서부터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외졌고,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위험했다.
그 자리에 사무소를 건설했다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무소에 도착했다.
잘그락—
사무실은 어두웠다. 강선후가 서서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는 그 테이블 위에 잔등 하나가 휘적이며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림자가 좌우로 요동치는 그 모습에 정지훈은 절로 목청을 낮췄다.
“오늘 입금한 건 확인하셨습니까?”
강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요.”
“아뇨. 어차피 업무의 일환입니다. 오히려 전 반갑더라고요. 무슨 일 때문에 이렇게 부르셨습니까?”
“오늘 휴가 겸해서 서울을 좀 돌아다녔어요.”
“네. 서울에서 연락하셨겠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하운드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우연히 하운드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니, 그게 말이 되나?
하운드들은 공개된 자리에서 일 얘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모든 정보가 수익과 직결되니 자연스럽게 폐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냥 잡담하는 걸 들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강선후가 입을 열었다.
그저 평탄한 어조로 하운드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서지아, 이년 생각보다 목숨이 질기다.
오히려 다행이다. 지금 죽으면 우리가 골치 아파진다. 어차피 조만간 죽을 거 같긴 하다.
강선후 그놈은 어떻게 하냐?
그 새끼, 남쪽으로 갔다 와서 떼돈 벌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분명 그 뱀파이어년이 그 새끼한테 들러붙은 게 틀림없다.
뱀파이어는 피도 큰 가격에 팔리더라.
생포는 포기하고 죽여서 피만 뽑아오자.
—강선후는?
그 새끼도 죽여. 이제 뭘 신경 써. 아직도 서지아 밑에서 일하는 버릇이 몸에 배었느냐.
그 내용은 다분히 충격적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니, 어디서?
정지훈이 무슨 판단을 하기도 전에 강선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세 번 참았어요. 유튜버, 뱀파이어, 그리고 첫 습격.
원래 첫 만남에서는 더 조심하게 되잖아요? 저는 이 사회를 처음 만났으니 최선을 다해서 존중하고, 그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 거죠. 그런데.”
강선후는 화살을 들어올려 가방 속에 넣었다.
“하운드들이 또 날 죽일 거라네. 이제 네 번째 아닌가? 아무래도 그 규칙 나만 지키는 거 같더라고.”
“······.”
“OWIC은 법 위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보니까 정부에 로비도 좀 한 모양이던데.”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강선후 님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약속했으니.”
정지훈은 이전의 다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에 관련된 사업은 시스템적으로 더러운 일을 병행하게 됩니다. 많은 기업이 그렇듯,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저 부탁 하나만 할게요.”
그때, 강선후가 나이프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기생체를 도살한 바로 그 사냥용 나이프.
정지훈은 그때부터 강선후의 부탁이 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오늘 밤에 저는 이 오두막에 계속 있을 겁니다.”
“······.”
“잠실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거예요.”
강선후의 가방 속에서 많은 날붙이가 잔등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줄 수 있죠?”
부우욱—
가방의 지퍼를 잠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선후는 그제야 뒤로 돌았는데, 그의 입에는 어느새 처음 보는 궐련이 물려 있었다.
“···강선후님의 세부 알리바이부터 준비하겠습니다. ‘이계에서 뭘 하고 있었다.’까지는 만들어야 합니다. 생각해놓으신 게 있습니까?”
강선후는 마치 라이터를 들어올리듯, 손가락을 담배 끝 근처에 가져다대었다.
“사냥.”
따악!
정지훈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으며.
흔들렸던 시야가 돌아왔을 때, 강선후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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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4. 서울 잠실, 사냥.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