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7
37화 ep14. 서울, 사냥. (3)
***
사냥에 앞서 덫을 설치하고, 사냥 도중에 그 덫을 작동시킬 시동줄을 틈틈이 설치했다.
이는 지구의 사냥에서는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계의 기상천외한 동물들을 상대할 때는 필요한 테크닉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맨 처음 한 행동은 바닥에 깔린 여분의 덫 줄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강선후는 이곳에 설치했던 덫이 어디에 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사냥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이곳은 이후에 OWIC의 인원들이 들어와서 뒤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들이 작업 도중에 남아있던 덫을 작동시켜버리는 상황은 원하지 않았다.
모든 덫을 해제한 뒤, 한 아름 들고 맨 처음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내려놨던 가방에 모든 짐을 쑤셔 넣었다.
맨 처음 강선후와 마주친 하운드는 시체가 되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 방에 있는 시체는 두 구였다.
아니, 어쩌면 세 구일 수도.
팔다리가 묶여 있는 서지아는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대중적인 갈색 장발이 잔뜩 떡진 채 펼쳐져 있었다. 죽은 딱정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그녀의 눈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강선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말라붙어 있는 피는 하운드들의 것이 아닐 터.
서지아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에는 짙은 핏자국이 있었다. 저 상태로 방치되었다면 살아있다고 생각하기에는 힘들었다.
뒷세계 삶의 결말은 항상 이럴 텐데, 왜 뛰어드는 놈들은 계속해서 나오는 걸까.
가벼운 잡생각은 금방 털어버리고 시야를 돌렸다. 이번에 주목한 건 방 한편에 놓여 있는 묵직한 금고였다.
품 안에서 다시 황금 지침을 꺼내서 열어보았다.
여전히 360도로 회전하고 있는 지침.
이 근처에 목표물이 있다는 뜻이고 진서연의 언급으로 인해 서지아가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 보물이 바로 목표물일 가능성이 컸다.
사실 확신이 있었다. 이계의 아티펙트가 난데없이 서울에 있는 이유는 그거 말고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찾는 건 바로 이 금고 안에 있다는 뜻이겠지.
사과박스보다도 훨씬 큰 금고를 바라보는 강선후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귀찮네. 진짜.”
금고가 어떤 구조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두께를 고려해도 금속 부식에 기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뿐더러, 이 정도 되는 금고는 손상에 반응해서 영구잠금이 걸릴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금속을 예외 없이 부식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인도 아직 못 했는데, 그런 재질이 중간에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정지훈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 회사에 이 안에 있는 걸 드러내는 것도 한편으론 꺼려지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가만히 앉아서 고민만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는 쪽이 옳았다.
강선후는 다이얼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청력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딸깍- 딸깍- 딸깍-
천천히 돌리면서 각 회전마다 들리는 소리를 서로 대조했다.
솔직히 자물쇠 푸는 법에 대해서 아는 건 없었다. 영화에서 본 게 있으니 따라 해보는 것뿐이었다.
하다 보면 뭔가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그게 강선후가 대부분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집중하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으로 두 바퀴, 오른쪽으로 한 바퀴, 그리고 왼쪽 두 칸, 오른쪽 다섯 칸. 왼쪽 한 칸.”
“···?”
강선후는 뒤를 돌아봤다. 미동도 없는 서지아의 머리카락 사이로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 유지. 버튼 꾹.”
“비밀번호?”
“뭐겠어.”
서지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발음은 명확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건 명확했다. 그 말끝에 신음을 삼키느라 입을 꾹 다무는 걸 강선후는 보았다.
강선후는 다시 금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에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틀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이얼을 돌렸다.
딸깍, 딸깍.
“날 구해준 거야?”
“자의식과잉이네. 너 여기 아직 있는 줄도 몰랐어. 저 드럼통에 담겨서 어디 실려 갔을 줄 알았는데. 너야말로 왜 순순히 금고 비밀번호를 알려 줘?”
“···어차피 이제 난 죽으니까. 살려달라고 빌 염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숨소리가 빨라졌다. 웃는 것 같았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그 내용의 심각성에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
“어떻게 그 상태로 살아있지도 신기하네.”
“엘프는 느리게 죽어.”
“와.”
그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서지아는 조금 주저했다.
“내가 엘프라는 게 안 놀라워?”
“관리를 그따구로 하는데 외계인 몇 명 못 넘어올 것도 없잖아. 진지하게 막을 생각은 있는지가 궁금할 정도인데. 정착은 뭐 알아서 했겠지.”
정말로 무심한 태도였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세상에 관심 없을 수가 있을까? 이 남자는 대체 뭘 원하는 걸까?
금고에 있는 황금 유물뿐일까?
“그거 비싸게 팔리긴 할 거야. 원래 가치는 영원히 아무도 모르겠······.”
“이거 마지막에 중앙 유지하고 뭐 하라고?”
“···버튼 꾹. 옆에 있는 거.”
딸깍-
금고의 문이 열렸다.
그 거대한 크기가 무색했다. 순간적으로 텅 빈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휑한 금고 한가운데에 완두콩 크기의 녹색 보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강선후는 품속에서 황금 지침을 꺼내 뒷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열두 개의 홈이 패여 있었는데.
“딱 맞네.”
녹색 보석은 거기에 딱 맞았다. 심지어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들어가면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서지아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도 강선후의 등 말고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강선후는 그 보석을 다시 빼내어 주먹에 쥐었다.
“최소한 보석이니까 비싸게 받을 순 있을 거야. 몇 푼 받고 팔기에는 아까운 물건이지만···.”
서지아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너 뭐야.”
강선후의 손에 쥐어진 보석은 빛을 발하며 다른 형태가 되었다.
좌우로 길어지고, 조금 탁한 녹색은 황금빛으로 변했다.
유연한 곡선과 은은한 황금빛.
예술가의 각인이 새겨진 아름다운 활이 되었다.
서지아는 조금씩 멀어져가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처음으로 노력했다.
“···지배자의 자격자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을, 네가 어떻게?”
인간이 왜?
게다가 우리의 세상 인간도 아닌데 어떻게?
“음.”
강선후는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세계에 열두 개밖에 없다는 황금의 유물을 목도에 두고 저런 반응이라니.
···이 남자가 지배자의 상이라고?
그렇게 찾아다녔던 지배자의 상을 이제야 만난다고?
그 뱀파이어 귀족에게도 이 이유 때문에 그토록이나 집착했던 건데, 이제야?
죽기 전에?
서지아는 눈을 감고 힘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in Lonsa puka pu···.”
인생 개 좆같네.
그때.
서걱—
서걱—
팔다리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고개를 돌릴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강선후가 자신을 풀어줬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
“좀 있으면 OWIC에서 올 텐데, 이거면 그때까진 살 수 있겠지. 이제 죽으면 너 탓이다.”
강선후가 페트병에 담은 물을 서지아의 입에 조금 흘려 넣었다.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숲의 뿌리에서 추출한 활력 수액.
“왜?”
서지아는 고개를 돌렸다. 처참하게 죽어 나간 하운드들의 시체가 보였다.
“난 쟤들이랑 다를 거 없는데?”
“알아.”
“그럼 왜?”
“아직 저기까지 갈 단계는 아니어서. 아직은.”
그렇게 말하며 널브러진 시체들을 엄지로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쓸 데가 있겠다 싶으면 썩은 고기도 잘 먹거든. 옵저버로는 쓸만하지 않을까 하는데.”
강선후는 뒤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저런 거 보고도 개길 심산이 남아 있다면 지금 말하고.”
“···썩은 고기 취급도 지금은 나쁘지 않네. 말했잖아. 애초에 그럴 마음은 없었다고.”
그 말에 대해 잠시 생각하던 서지아는 끅끅대며 웃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빚이네. 보답할게.”
“거창하게 말하는 거 안 좋아하는데. 대부분 그런 놈들은 책임도 못 지더라고.”
“엘프는 반드시 빚을 갚고 죽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간 종족의 입발린 말이랑은 무게가 다른 거야. 이해 못 하겠지만.”
강선후는 들고 있는 활을 쳐다보더니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다시 보석 형태로 돌아갔다.
그렇게 황금 지침의 뒷면에 보석을 끼워 넣은 뒤 건물 밖으로 나갔다.
***
“오메.”
OWIC의 ‘청소팀장’ 구덕만.
청소팀장이라고는 했으나 전 카테고리의 2등급 보안 사항 정도는 허가 없이 열람할 수 있을 정도의 고위 직급이었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보자마자 아연실색했다.
이계와 현대를 넘나들며 온갖 종류의 뒤처리를 전담한 베테랑이었지만, 이런 현장은 정말 오랜만에 봤다.
“시벌. 뭐 패싸움이라도 일어났어? 이 새끼들 도를 넘은 거 아냐? 어이, 정장 양반.”
정지훈은 전방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말이 없어? 이계에서 지들끼리 싸우는 건 그렇다 쳐. 근데 아무리 세상이 븅신 되었어도 서울에서 이지랄을 하는 건 좀 선 넘었다고 생각 안 해? 범죄와의 전쟁이냐고.”
“한 명이 한 겁니다.”
“···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껄렁대던 구덕만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한 명? 혹시 농담 시도한 거 아니지? 그런 거면 좆노잼이라고 욕할 건데.”
“비즈니스에 농담은 없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선생님.”
구덕만은 다시 안쪽을 바라보았다. 뼈가 굵은 그의 팀원들도 주저할 정도의 풍경이었다.
“···이게 한 마리 작품이라고? 데스나이트가 차원문 넘어오기라도 한 거?”
“데스나이트라면 이 정도로 안 끝났겠지요.”
그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방마다 하나에서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그래도 비현실적이긴 하네요.”
정지훈의 머릿속 강선후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무뚝뚝하고 날카로운 성격이지만, 오히려 시골 청년과 같은 무던한 면모도 있었다.
회사 인턴이 보인 결례도 거뜬히 용서해줬으며, 맘에 들지 않는 일도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는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행한 이 일.
데스나이트와 비유하는 게 어이없는 과장은 아닐 정도였다.
가끔씩 보여주는 이질적인 느낌은 이런 이면을 의미했던 건가?
게다가.
‘이계에서 무언가 능력이라도 얻어온 건가?’
강선후의 신체 능력은 아주 훌륭했으나 상식을 넘어선 수준까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차라리 강선후가 초인이 되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더 가능성 있을 정도로.
첫 만남 이후로 정지훈은 강선후를 단 한 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생각마저 과소평가인 건가?
청소팀은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덕만이 방 안에서 정지훈을 불렀다.
“정장 양반! 여기 좀 와봐.”
그 안에는 두 구의 하운드 시체.
그리고 한 명의 살아있는 여성이 있었다.
피투성이의 헤드폰을 쓴 채 벽에 기대앉아 의식을 잃은 여자였다.
“···여자 하운드도 있었나보이. 특이한 헤드폰을 쓰네. 알리에서 샀나?”
정지훈은 이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요즘 거기 희한한 거 많이 팔더만.”
“살아있습니까?”
구덕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겨. 처분할까? 아니면 병원차 부를까.”
“이 자는 저희 쪽에서 따로 수습하겠습니다. 일반 병원에 보내면 조금 곤란해질 수 있어서.”
의문이 들 수 있는 대답이었으나, 구덕만은 평소와 같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
“피곤해.”
대충 수습한 뒤 다시 오두막으로 출발했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에서 하룻밤 묵고 싶었는데.
“···이건 못 참잖아.”
황금 지침에 꽂혀 있는 보석을 바라보았다.
방금 얻은 활을 시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콜드 포레스트도 리리에게 건네준 상황. 이런 묵직한 피로는 정말 오랜만이었지만 호기심이 더 컸다.
차원문을 넘은 뒤 사무소로 곧장 향했다. 여전히 한밤중의 베이스캠프는 적막이 가득했다.
이 적막은 분명 도망친 한 명의 하운드를 숨겨주는 좋은 가림막이 되었을 터.
하운드 한둘이 자리에서 벗어나 이계로 향할 거라는 예상은 이미 했었다. 단신으로 모든 입구를 틀어막는 건 힘들었으니까.
시간이 충분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나 몇 시간 만에 모든 일을 끝냈어야만 했다.
이계로 넘어온 녀석은 백이면 백 내 오두막으로 향했겠지. 뱀파이어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빈집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리리한테 말했다. 누군가 찾아오면 오두막 안으로 숨으라고.
그 안에 골렘 두 기를 만들어놨으니, 하운드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그 하운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야?
“···네가 했다고?”
“응.”
고개를 끄덕이는 리리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표정하려고 노력했다.
그 애매한 포커페이스 뒤에 가려진··· 뭐라고 해야 하지?
칭찬을 기대하는 듯한 그 뿌듯함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도망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응?”
“오두막 안에 골렘 없었어?”
“어, 있었어.”
“그 뒤로 숨으라고 했던 거였어.”
리리는 당황했다. 정확히는 여유로운 척하는 표정 뒤에 당황함이 엿보였다.
“어, 당신, 날 시험하려고 한 게 아니었어?”
“시험?”
“내가 한 사람 몫을 할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는 거 같은데.
“우리 탐험가 길드 대기업 아니야. 나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도 아니고.”
리리가 방해라는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해본 적 없었다. 하물며 싸움까지 시킬 생각은 해본 적이 아예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쓰러진 하운드의 시체에 다가갔다.
단 두 방. 급소를 깔끔하게 베어냈다. 그 외의 상처는 리리에게도, 하운드에게도 없었다.
이 상처가 전투 흔적의 전부라는 의미였다. 결과만 보면 우아하다고 느낄 정도.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리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거칠게 성장한 녀석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귀족이라고 무시하는 건 이제 정말로 관둬야겠네.”
“맘에 찼어?”
눈빛을 반짝거리며 되물으니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진지하게 이게 시험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게 인도자의 의무인가 뭔가 그거인가?
안 해줄 이유도 모르겠어서 고개를 끄덕거리니,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애써 감추려는 게 느껴져서 예의상 외면해줬다.
그나저나 저거, 인도자의 의무. 마침 말 나온 김에 물어보기로 했다.
“리리. 그 인도자의 의무는 네 가문의 의무라고 했지?”
“의무라기보단, 숙명.”
“영혼 연결은 뱀파이어 종족이 가진 숙명이라고 했고.”
리리는 살짝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숙명이라는 게 종족마다 하나씩 있는 거야?”
“그런 걸 묻다니. 인간이라 그런가.”
리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인간 빼고 다 있어. 당신 종족이랑은 달리 나머지 종족은 여전히 신이 있으니까.”
“그럼 혹시 엘프에게 빚이란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어?”
“···엘프가 당신에게 빚을 갚는다고 했어?”
우선 대답하지 않았다.
“엘프에게 빚은··· 강해. 진짜로. 한번 빚졌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잊지 않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느 정도인데?”
“만약에 당신이 원한을 샀다고 쳐. 그럼 그 엘프를 확실히 죽여야 해.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대륙 반대편으로 떠나는 게 남은 삶이 편할 거야.”
“흠.”
반대로, 은혜를 갚는다는 거면?
묻고 싶었으나 비슷한 대답일 거 같아서 지나쳤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나는 황금 지침을 열어보았다.
이전까지는 서울을 향하고 있었던 지침이 이제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찾아낸 유물을 홈에 끼우면 다음 걸 추적하는 방식이구나. 편한 방식이네.
뒤에 꽂힌 녹색 보석을 꺼내 보았다. 리리는 그 시점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 지배자의 유물을 찾았구나! 세상에!”
리리는 생각보다 좋아했다. 이제까지 중에서 텐션이 가장 높은데?
나는 보석을 주먹에 쥐고 마음을 차분하게 먹었다. 명상하는 것처럼.
그러자, 손가락 틈에서 빛이 새어 나오며 활의 형상이 되었다.
금빛의 재질을 알 수 없는 리커브 보우. 놀라울 정도로 가벼웠는데, 그 견고함이 손에 쥐기만 해도 느껴질 정도였다.
콜드 프로스트도 말도 안 되는 견고함이지만, 심지어 그보다도 더하게 느껴졌다.
“활···. 근데 화살은?”
리리가 물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화살은 내 걸 써야 하는 거야?
“···유물치고는 시시하네. 기대했는데.”
시험 삼아서 쏴보면 뭐라도 다른 효과가 있지 않을까?
나는 가방 속에 있을 여분의 나무 화살을 떠올렸다.
그 순간.
“···?”
왼손에서 빛이 모여들더니 찰나의 순간 만에 화살이 생겨났다.
“나무 화살?”
리리의 말대로, 나무 화살이었다.
···내가 방금 떠올린 나무 화살 그 모양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 양궁에서 사용하는 카본 화살을 떠올렸다.
그러자.
“화살이···”
그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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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산요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