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3
43화 – ep 17, 생명의 정령 (1)
***
스프리건을 만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파밍 웜을 거기에 가만히 두면 온갖 이계 짐승들이 뜯어먹고 튀는 참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체를 먼저 가지고 오는 걸 택한 거다. 마을 사람들에게 경비를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게 컸다.
어차피 서쪽 폐광은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고, 위치를 찾으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오두막 바깥에는 거대한 파밍 웜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저걸 그대로 쓴다고 발전기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저런 가공을 해야 한다. 내 머릿속에는 벌써 몇 개의 아이디어가 오가고 있었다.
오두막 밖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파밍 웜의 사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나온 건가?
그러던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대체······.”
정지훈이었다. 아무래도 나가봐야겠네.
“리리. 안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응. 서쪽으로 출발할 때 나 놓고 가지 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웅성대며 파밍 웜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다행히 함부로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무례한 놈들이 많은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상식을 지키는 사람이 훨씬 많기 마련이다.
내가 파밍 웜에게 다가가자 사람들이 조금 뒷걸음질 쳤다.
정지훈이 다가왔다. 그 표정이 참 볼만 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네.”
정지훈의 시선이 다시 파밍 웜에게 향했다.
뭉툭한 애벌레처럼 생긴 땅지렁이. 사후 경직이 오면서 길이는 더 짧아지고, 더 통통해져 있었다.
“이번 의뢰 때문에 서쪽 폐광으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맞죠.”
“거기서 잡아 오신 겁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 의뢰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렇게 손수 토벌까지···. OW리소스에서 이 토벌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요.”
“그 회사 의뢰 때문에 죽인 건 아니라서요. 이거 제가 필요해서 잡은 거예요. 겸사겸사.”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는지, 정지훈은 조금 주저했다.
“파밍 웜의 성체를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설비 좀 만들려고요. 이참에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나는 우선 스프리건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이참에 모든 일을 한 번에 해결해야지.
그사이에 다른 준비를 끝내놓는다면 일이 더 빨리 해결되겠지?
필요한 부품을 종이에 적어서 정지훈에게 건넸다.
정지훈은 그걸 읽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내일 저녁쯤 해서 사람을 통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 잠깐 자리 비울 건데 이거 좀 지켜줄 수 있으실까요?”
파밍 웜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누가 건드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정지훈은 문제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이스캠프에 상주하는 요원들이 있습니다. 교대로 이곳을 정찰하라고 말해두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나도 오두막에 있을게.”
옆에서 듣던 차소희가 말했다.
“근데, 나중에 나한테도 얘기해 줘. 이거 대체···.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거대한 괴물의 시체는 차소희에게 퍽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정도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 날 귀찮게 하는 하운드 놈들도 없어졌으니.
나는 바로 서쪽 폐광으로 출발했다.
***
폐광의 메두사들은 이미 씨가 말라 있었다. 내가 부른 남쪽 마을의 신도들이 아주 도륙을 내놓았으니까.
평범한 마을 사람 치고는 생각보다 잘 싸운단 말이지.
“도시의 보호를 받지 않는 마을은 그 자체로 군벌이나 다름이 없어.”
“그래?”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고 정착했다는 의미니까.”
리리의 말에 납득했다. 이계는 그만큼 혹독한 곳이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서쪽 동굴에 진입했다.
한 번 와봤던 길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여유가 있었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많아졌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내 뒤를 조용히 따라오던 리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밍 웜의 시체로 뭘 할 생각인 거야?”
“발전기. 그 안에는 전기 기관이 있거든. 저 정도 거대한 파밍 웜은 실제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전압이 높아.”
“전기를 어디에 쓸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거 언젠가 썩지 않아?”
“그렇긴 하지.”
생물은 죽으면 썩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 파밍 웜이 아무리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영구적으로 기능이 유지될 리는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는 몇 개 있었지만, 확실한 해결법은 떠올리지 못했다. 우선 들이박아 보는 거지.
지금은 우선 스프리건에 대해서만 생각할 때다.
어느새 첫 번째 공동에 도착했고, 바로 드워프가 건넨 약도를 꺼내 봤다.
조잡하게 그려져 있지만, 정확히 뭘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 지도가 가리키는 최종 위치는 우리가 예전에 갔던 그 공동의 다음 방이었다.
아는 길은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파밍 웜을 사냥했던 바로 그 대규모 공동.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던 그곳이었다.
“···대박이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스펀지처럼 푹푹 들어가고 온통 바스러지던 곳이었다.
이 공간 전체가 죽은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사이에 이렇게 되었다고?”
“산의 뿌리에 흐르는 정기는 생명의 기운이야.”
리리의 말대로 이곳 자체가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갈라졌던 벽은 투명한 수정으로 메꿔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상처 위에 딱지가 생긴 것처럼.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모를 선선한 바람에는 달콤한 향기가 실려 오고 있었다.
귓가에는 희미한 노랫소리 같은 게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공간 자체가 희미한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뿌리가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장관이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이 모습을 바라보는 리리도 무심했던 눈빛에서 한층 더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당신이 이 산의 뿌리를 살렸어. 파밍 웜이 다 망칠 뻔했는데.”
“망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리리는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밍 웜이 나쁜 건 아니야. 그냥 생태계의 구성원인 거지. 걔네들도 생존을 위해서 선택을 하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
리리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거 같기도.”
“그래서 이런 장면이 멋있는 거야. 내가 모르는 거대한 생태계가 작동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순간이니까.”
“···당신은 가끔 자연 철학자처럼 말해.”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 순환의 이치.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기에 매몰되었다. 누가 옳은가, 누가 나쁜가. 그 복잡한 갈등에서 벗어나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흐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유가 뭔지에 대해서 깨닫는 기분이니까.
“이런 걸 보려고 돌아다니는 거지.”
신대륙을 방문한 탐험가들이 아마존을 발견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지금의 감상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급할 거 없으니.
더 이상의 불꽃도 필요 없었다. 공기 자체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어서 천장까지 무리 없이 볼 수 있었다.
투명한 수정이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자라는 모습이 보였다.
리리와 나는 한동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리리.”
“응.”
“이곳 어디에 스프리건이 산다고 했잖아. 걔들 어떻게 생겼어?”
리리는 내 예상과 다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나는 정령을 직접 본 적은 없어. 대부분 사람이 그렇겠지만.”
“직접 본 적은 없다고? 너희 왕국은 정령이랑 동맹이었다며.”
“지배자의 상은 어머니가 가지고 계셨거든. 어머니는 직접 봤을지도 모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정령이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만을 볼 뿐이었어. 실제로 정령과 마주할 수 있는 건 지배자뿐이니까.”
그렇게 된 건가.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야 한다는 말밖에 되지 않겠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이상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귓가에 노랫소리가 흐르는 느낌.
“···?”
거기에 귀를 기울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저 듣기 좋았으니까. 계곡 한가운데서 불어오는 미풍을 즐기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런데.
“노랫소리···.”
“응?”
“이거, 안 들려? 노랫소리.”
리리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더니, 눈빛이 달라졌다.
“···들려.”
귓가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룬 언어로 된 노래가.
내 말을 들은 리리는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동공이 흑적색으로 물들었다.
영혼을 보는 뱀파이어 귀족의 능력. 그게 발동될 때마다 저런 변화가 있다는 건 오래전에 눈치챘다.
리리는 지금 이 공간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세히.
그와 동시에 리리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너무 희미해서 못 봤어. 왜 내가 이걸 못 봤지?”
“뭔가 보여?”
“영혼이 보여. 밝은 초록색의···. 새싹 형태의 영혼.”
“어디에?”
“······여기 전체에.”
리리가 바라보고 있는 건 이 공동의 정 중앙이었다. 나도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귓가를 스쳐 가는 노랫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리리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프리건은 지금 내 주변에 있었다.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던 리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영혼의 상이 점점 더 선명해져.”
어디에서 온 것도 아니고, 이곳에서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그냥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사라졌던 산의 정기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산의 정기는 생명과 풍요로움의 상징.”
스프리건은 생명을 창조하는 듯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건 내가 예전에 조난 생활을 하던 시절 알아낸 사실이다.
그때도 의문이었다. 생명을 창조한다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능력이 아닌가?
허공에 푸른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정기가 모여 생명의 형태를 띠는 듯했다.
리리가 바라보는 영혼의 상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스프리건의 노랫소리도 점점 더 명확해진다.
그리고,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형상.
어쩌면, 스프리건은 산의 뿌리에 편리공생을 하는 생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스프리건은 정기를 먹고 사는 생물이 아니었어.”
“어쩌면······.”
“정기 속에서 태어나는 생물이었던 거야.”
리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숲의 뿌리가 스스로를 수복하는 모습이 아니라, 생명 에너지로부터 잉태된 하나의 자아가 태어나는 과정이었던 거다.
노랫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어느새 완성된 한 아름 정도의 푸른 빛은 내 앞에 구름처럼 내려앉았다.
푸른 빛을 희미하게 발하는 작은 입자 수만 개가 모여 만들어진 구름.
지금 내 눈앞에 만들어진 존재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비유였다.
리리는 나를 바라보더니, 진중한 자세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배자를 섬긴다는 정령, 그 주도권을 내게 양보한다는 의사 표현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그곳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푸른 빛의 솜털이 내 손가락 끝을 감싼 순간, 귓가에 울리는 노래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병들었던 우리의 생명을 구해준 황금의 후손.」
「우리가 섬길 황금의 후손.」
「우리, 왕이 없는 무리는 잠시나마 기댈 곳을 찾았도다. 그 환희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으리.」
“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남쪽 마을에서도 그렇고, 리리와 처음 영혼을 연결했을 때도 그렇고.
이계의 의식은 항상 나를 주저하게 한다.
나는 리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리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건가?
“···안녕?”
「안녕하세요?」
푸른 빛은 내 손을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반갑게 악수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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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7. 생명의 정령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