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7
47화 ep 18. 탐험가, 그리고 스폰서들 (3)
“···풍선?”
차소희도, 서지아도, 정지훈도, 그리고 리리도.
내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내 시야는 서지아의 머리에 교묘하게 가려졌다.
“아무것도 없는데?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바라보니, 없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빨간 점처럼 보였던 그 풍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로 있다 치더라도, 풍선이 뭐가 어쨌다고?”
서지아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정지훈은 나름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헬륨 풍선은 반입 금지 품목인데···. 오히려 금지라고 하니 간혹 주정뱅이들이 여관에서 장난을 치는 경우가 있더군요. 그걸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생존에서 착각은 죽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뭔가를 잘못 보거나 착각할 일은 절대로 없었다.
분명 그 풍선에 달린 줄까지 선명하게 봤다고.
서지아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무튼간에 조심해야 해. 성좌의 가호를 받은 숲은 엄청나게 위험하니까.”
가호를 받은 숲이 위험하다는 건 뭔가 아이러니한데, 이계에서는 상식인지 리리도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리리가 이걸 알고 있다면 굳이 서지아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다.
성좌의 가호야 뭐······.
아니, 이건 생각하지 말자.
손에 들려 있는 약초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리리는 그런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오며 말했다.
“요즘 많이 피곤하긴 했잖아. 다음 탐험 때까지 충분히 쉬자.”
아니···. 아니라고.
그 뒤, 서지아는 나를 좀 더 설득하려다가 단념하고 떠났다.
떠나면서 리리를 힐끗 바라보는 그 눈빛을 나는 눈치챘다.
***
긴 의자에 팔을 괴고 누워 차소희에게 말을 걸었다.
“···질문이 있어.”
“무슨 질문?”
“만약에 네가 만든 풍선이 있어. 만들고, 친구먹은 풍선.”
“윌슨 말하는 거야?”
“맞아. 그게 어느 순간부터 널 따라다니기 시작한다면? 막 길 가다 보이고, 하늘에서 보이고······.”
“무슨 B급 공포영화 스토리야?”
그러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달이 두 개 뜨는 밤이다.
하나는 지구에서 보는 달과 비슷한데, 다른 하나는 훨씬 큰 데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밤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처럼 이계의 하늘은 다채로웠다. 낮이고 밤이고 구경할 맛이 나는 풍경이었지.
차소희는 해먹에 걸터앉아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가 엘프라고? 엘프가 지구에서 산다는 이야기야?”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라곤 하는데, 그게 내 비밀은 아니잖아? 지켜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리고 차소희는 원래 일을 크게 만드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눈치가 있는 편이란 거지.
“진짜 OWIC 기분 나빠. 숨기는 게 너무 많아.”
“그렇긴 한데.”
서지아가 엘프라는 건 OWIC에서도 모르는 정보라고 했다.
정황상 진서연과 정지훈만 알고 있는 모양인데······.
정말 OWIC에서 모르고 있을까? 또 속고 있는 거 아냐?
“진서연하고 정지훈은 딱히 직급이 낮아 보이지도 않은 거 같은데 말이지.”
OWIC의 높으신 분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여기까지 오니까 오컬트 미스테리 같아서 흥미가 조금 동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게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펼쳐보았다.
어쨌거나 서지아 덕분에 유적을 감싸고 있는 대규모의 숲이 보통 숲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좌의 가호를 받은 숲이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성좌니, 아홉 신이니, 이런 신앙적인 걸 이계 야생해서 깨달을 순 없었으니까.
“성좌의 가호를 받는 숲이라고 했지?”
“엘신 포리에리.”
리리가 옆에서 말했다.
“무슨 뜻이야?”
“엘프 고유어야. 공용어로 직역하면 성역화된 고대 숲 정도. 말 그대로 성좌의 가호를 받은 숲이란 뜻이지 뭐.”
“성좌가 구체적으로 뭔데?”
계속 미뤄뒀던 질문이었다. 이제는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성좌가 신이야?”
“정확히 말하면 신이랑은 달라. 반신이라고 보면 되겠네.”
“신은 뭐고 성좌는 뭔데?”
모닥불 앞에 앉아서 불을 쬐고 있었던 리리가 눈을 뜨며 말했다.
“두 개의 달과 세 개의 태양, 그리고 끝없는 어둠 저편에서 천 년마다 찾아오는 매. 재앙과 희망을 예언하는 두 개의 혜성, 추락한 신의 시체 위에 뿌리내린 이 대륙. 이게 아홉 주신이야. 영원불멸하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자들.”
지구의 설화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지구의 어떤 신화든 달과 태양, 그리고 대지는 항상 신 취급을 받아왔었지.
역시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는 건가.
“그리고 성좌는, 저기 있는 모두.”
리리는 하늘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 개의 별이 각양각색으로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신이 아닌 몸으로 태어났으나, 끝내 승천한 모든 이들은 별이 되어 우리를 내려다봐.”
“···그래서 성(星)좌구나. 뭔가 낭만적인 이야기네.”
별 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한다니. 지구 신화 중에서 별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있던가? 내가 모르는 거일 수도 있다.
이계의 사람들은 꽤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잠깐.
이 시점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윌슨이.”
신이 아닌 몸으로 태어났으나, 승천한 존재라고?
아니 그렇게 거창한 존재가 되었다고?
사실 끝까지 헛소문일 가능성을 생각했다. 이계는 온갖 일이 다 일어나는 곳이니, 섣부르게 단정 지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남쪽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마음으로는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거야. 아까 그 엘프가 말했던 대로, 성좌는 인간을 가호하지 않아. 인간은 주신에게 외면받은 종족이니까.”
그런데도, 주신을 거역하면서 나를 가호하는 성좌가 되었다. 그 뜻인가?
내 결론은 이거였다.
“노빠꾸 성좌네. 나한테 배운 건가.”
“···대체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성역화된 숲을 지나가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 이거 하나만 중요할 뿐이었다.
“리리, 물약은 어떻게 되고 있어?”
“내일 오전이면 다 만들어질 거 같아.”
“그럼, 내일 오전에 바로 출발해야지.”
차소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너 안 쉬어? 바로 출발한다고?”
“뭘 쉬어. 노는 건데.”
“하, 참나. 진짜···.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려고 사 왔는데.”
“앞에서 마시는 거 봐줄게.”
그렇게 차소희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부터 잠에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깨 보니 얇은 이불 하나가 대충 내 위에 올려져 있었다.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지평선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뜬다는 의미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차소희는 떠난 모양이었다.
“밖에서 자버렸네.”
차가워진 코를 문지르며 시끄러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의 종류는 우당탕탕이 아니라 보글보글이다. 물이 끓는 소리가 수십 배 더 요란한 느낌.
내가 당황하지 않은 이유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일어났어?”
“뭐 해?”
리리는 서울의 과학사에서 사 온 현대식 기구들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게 이상할 건 없었다. 현대의 물건들은 오히려 사용하기 쉬운 쪽으로 진화했잖아?
“···당신네 마을은 제국 눈에 들어오지 않길 바라야 할 거야.”
“왜?”
“이런 기술을 가진 마을이 존재한다는 걸 제국이 알게 되면, 가만둘 리가 없을 테니까.”
글쎄.
제국이 만만하진 않겠지만, 저 마을의 정체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도 지겨워서 위성 무기에도 눈독 들이는 무시무시한 문명이라고.
“어쨌든 포션은 이제 완성됐어. 이제 유리병에 옮기기만 하면 돼. 준비 해왔어?”
“여기다 담자.”
어느새 자재가 잔뜩 쌓인 창고를 뒤져서 꺼낸 물건들.
“이게 뭐야?”
“다이소에서 산 미니 약병.”
“···다이소? 유리병 아니면 포션이 변질될 거야.”
“유리는 깨지잖아. 탐험 준비에 유리를 가져가는 건 미친 짓이야. 이건 괜찮아.”
“······.”
리리는 약병을 만져보더니 말랑말랑한 촉감에 놀랐다.
“이런 소재를 대체 어떻게 양산하는 거야? 이렇다 할 공장도 안 보이는데.”
“글쎄, 실력 있는 연금술사라도 있으려나?”
“흠.”
리리는 더 묻지 않고 조심스럽게 담기 시작했다. 작업에 열중하는 동안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30개 정도의 작은 포션이 만들어졌다. 세 개는 이전에 썼던 인화성 화합물이니 어쩔 수 없이 소주병을 쓸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가방에 넣으니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번엔 어깨 좀 아프겠네.”
그렇게 짐을 챙겼다. 나머지는 미리 준비해놨기에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준비를 끝내고 허리를 펴자마자 오두막 바깥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강선후.”
서지아였다. 어제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가보니, 붕대 차림이 아니라 평소에 입던 검은 정장 바지와 흰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너 다친 거 아니었어?”
“나은 지가 언젠데. 다친 척하고 있었던 거지.”
완전히 정상적이었다.
사실 어제도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서지아는 인간이 아니었고, 내가 모르는 신체적 특징이 있을 수도 있어서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었는데.
“굳이 먼저 간다길래 급하게 왔어. 자.”
투명한 봉투에는 담겨 있는 떡. 나는 그걸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노바 도리안.”
그게 뭐야?
고민하던 차, 리리가 뒤에서 대신 설명 해줬다.
“저거 식량이야. 엘프만 만들 수 있는 식량.”
서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은 봉투에 하얀 떡이 다섯 개 들어 있었는데···.
“무슨 렘바스야?”
“그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만들었어?”
서지아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 숨어 들어가느라 고생 좀 했지.”
“개 못 만들었네. 너 어디 가서 떡집 알바는 하지 마라.”
“···나도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어쩔 수 없어. 중요한 건 모양이 아니잖아?”
“맛도 없어 보여.”
서지아는 눈을 질끈 감더니 간신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엘프의 손길이 닿은 식재료는 조금만 먹어도 허기를 채워 줘. 그게 중요한 거야.”
리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요식업이 엘프들한테 점령당한 것도 저 이유거든. 내가 아는 어떤 도시는 엘프가 식당 차리는 걸 법으로 막아놨어. 경제 망가진다고.”
“······.”
이계인들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지식인 모양이었다.
“이거, 하루에 몇 개 못 만들어.”
“왜 이걸 주는 건데?”
“긴 여행이 될 테니까.”
나는 서지아를 한 번 바라보다가 비닐을 받아들었다.
“이거 주려고 온 거야?”
서지아는 대답 대신 리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리리는 약간 당황했지만, 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 보았다.
아, 맞다.
얘 리리를 납치하려던 전적이 있는 녀석이지.
아직도 뱀파이어 몸값에 미련이 있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너 신카 가문의 후계 맞지. 이번 세대 인도자의 상.”
“···?”
서지아가 저걸 어떻게 알고 있지?
“어떻게든 널 만나려고 몸을 비틀었는데, 이 남자 때문에 이루어질 줄이야.”
“···잠깐.”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은데.
“너 돈 때문에 납치한 거 아니었어? 밑에 놈들 시켜서 이계인 팔고 돈 버는 놈이었잖아. 인신매매단.”
“바깥사람들은 그렇게 알아야지. 돈을 핑계 삼아야 그 양아치 새끼들이 움직여줬을 테니까. 그리고, 누가 인신매매단이야? 내가 납치한 건 이 흡혈귀 말곤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랬다.
하운드에 대해서 알아보며 서지아의 악소문을 좀 들었지만, 대부분은 하운드 사이의 갈등이지 외부 사건이 아니었다. 리리 외의 다른 이계인을 팔아치웠다는 소문도 없었고.
서지아는 살짝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자기 합리화를 하는 느낌도 들었다.
“괴팍한 방법을 쓴 건 사과할게. 근데 나도 선택권이 없었어. 이미 감시를 당하는 상황에서 직접 움직이며 지배자의 상이니, 명가의 뱀파이어 같은 이야기를 떠들었다면···.”
“OWIC이 먼저 선수를 쳤을 수도 있었다는 말?”
“그래. 그렇다고 신중하게 기다렸다간 이 뱀파이어 꼬마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거 같았지.”
“그래서 저지른 거네. 다른 방법을 떠올릴 머리까진 안 되었으니까.”
“부정은 하지 않겠어.”
서지아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돈에 미친 뒷골목 하운드 서지아? 그게 틀린 말은 아니야. 그래서 오히려 더 그런 척을 해야 했어. OWIC은 미친놈들이야.”
OWIC의 악착같은 집착이 떠올랐는지, 서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하들 시키지 않고 내가 직접 움직였다면, 얘한테 뭔가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챘을걸? 그렇게 되면 이 피먹이 꼬마한테 일어날 일은 뻔하지.”
“···누가 꼬마야.”
내가 리리를 데리고 OWIC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상황.
이게 비로소 서지아가 리리와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셈이었다.
서지아는 옷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열쇠였다. 아주 낡은 황동색의 열쇠.
“도이나 신카가 이걸 전달해달라고 내게 부탁했어.”
“어머니가···?”
리리는 그걸 받아 들지 못했다.
눈 앞의 엘프. 모종의 이유로 이곳까지 왔다가 차원문을 넘어가버린 그 엘프가 리리의 어머니의 명을 받아 온 거라니.
즉, 서지아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리리의 흔적을 뒤쫓아오다가 모든 일을 겪은 셈이었다.
“네가 인도자의 의무를 다할 지배자를 선택하면, 그자와 함께 성의 지하실을 방문해라.”
“······.”
“도이나의 전언이야.”
리리는 그 열쇠를 받아들었다.
“대체 왜? 어머니는 왕국이 침략당할 걸 알고··· 계셨던 거야?”
“나야 모르지.”
리리의 눈빛이 이토록이나 흔들리는 건 처음 보았다.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도 독기를 잃지 않는 눈이었는데.
서지아는 후련한 듯한 표정이었다.
“좆같은 숙명 때문에 별일을 다 당했는데,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다니.”
“그 도이나란 사람한테 빚이 있었나 봐?”
서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고 하지?
낡은 아파트에서 다 죽어가던 서지아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숙명이란 게 어느 정도인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할 말이 많은데, 우선 여기까지 해야겠네.”
서지아는 짐짓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나도 얘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정지훈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여기에 와 있었군요. 매번 이러니 정말 골치가 아픕니다.”
“감시 없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서지아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대화였습니까?”
“OWIC을 엎어버리자는 작당 모의.”
“지아 씨답군요.”
정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리리는 받은 열쇠를 어느새 품속에 감춘 상황이었다.
“강선후 님. 아직 출발 안 하셔서 다행입니다.”
“볼 일이 있으세요?”
정지훈은 품 속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이거, 챙겨가십시오.”
“이게 뭐예요?”
“버뮤다 숲 건너는 접근 금지 구역이라 외부 요원들이 문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우리 회사의 통행 보증서입니다. 보여주면 귀찮은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이거 저한테 줘도 되는 거예요?”
“원래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요.”
그러면서 정지훈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밑져야 본전이니 받아서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출발하려고 짐을 챙기고 나오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후 씨!”
진서연이었다.
“잠깐! 잠깐 기다려봐! 후우, 후우··· 안 늦었어. 다행이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뭐예요?”
“동쪽 산맥 생태 보고서인데, 선후 씨가 보기에는 허접해 보이겠지만 참고는 될 거예요. 하나 말하면 열을 아는 사람이잖아?”
“무슨 스폰서 같네요. 당신들.”
뒤에서 서지아가 팔짱을 끼고 보고 있었다. 리리는 내 뒤에서 조금은 경계하며 OWIC의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지아가 준 문서도 가방 안에 대충 넣고는, 부츠의 끈을 단단히 여민 후 일어섰다.
리리와 나는 나란히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제 푹신한 잠자리는 한동안 안녕이지.
“그런데, 선후 씨.”
진서연이 나를 불렀다.
“나침반 없이 되겠어요? 버뮤다 숲까지는 가봤으니 된다고 쳐도, 아무래도 산맥은 잘못 들르면··· 길 잃을 텐데요.”
잠시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다가 손을 살짝 들었다.
사실 숨길 이유도 딱히 없었던 거잖아?
“마르카마marlkaama.”
내 뒤에 서 있었던 누군가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진서연인 거 같았다.
“투 살리-운드 데 모스 to sali-wond de mohs.”
불의 형태를 띠어 별의 무덤을 추적하라.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불씨들이 남쪽을 향해서 나열된다.
이게 내 나침반이다.
“···지금 건 못 본 거로 하겠습니다.”
“대체··· 뭐야. 선후 씨 지구 사람 맞긴 해···?”
그러게.
왕의 자격자라는 둥, 선지자라는 둥, 룬 언어 쓰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둥···.
요즘은 내가 지구인이 맞긴 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경 쓸 필요 없는 이야기지.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첫걸음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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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9. 동쪽, 중간 여행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