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9
49화 ep 19. 동쪽, 중간 여행길 (2)
***
‘장벽’은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에너지를 통과하는 것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 규모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면, 거기에 버금가는 균열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좁은 곳도 눈대중으로 이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낭떠러지가 눈앞에 있었다.
“···그 엘프는 어떻게 건너왔을까?”
리리가 말했고, 강선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다리가 있었을 거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돌다리. 그런 데를 우연히 찾아서 건너왔겠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균열을 바라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진 리리는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를 위해 열린 장벽의 문.
일반적인 룬 언어가 만들어낸 효과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규모의 영향력.
이는 강선후가 사용한 룬 언어가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의미했다.
엘 루나el runa.
그 기원이나 정확한 분류는 알려지지 않았다. 헛소문은 많았으나 고증이 확보된 연구 결과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필멸자는 들을 자격조차 없는 왕의 언어라는 전승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현 제국의 황제가 사용한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으나, 리리 입장에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실체를 아무런 극적인 사건 없이 목격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리리는 강선후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모르는 듯했다.
“···당신.”
“아까부터 왜 그래? 멀뚱멀뚱 서서.”
“당신이 방금 사용한 언어,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평범한 게 아니야. 왕의 언어라고.”
가방을 뒤지던 강선후는 고개를 들어 리리를 바라보았다.
“난 그냥 어깨너머로 보고 기억한 건데. 상단에서 교역을 나갈 때 쓰더라고.”
대체 어느 도시의 상단이 왕의 언어까지 사용해가며 교역을 나서겠는가?
···진짜로 왕족인 건가?
자신의 출신을 능청스러움으로 감추고자 하는가?
왕족이란 단어 그대로 왕국의 지배 가문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이계에서 왕족이란 그 자체로 고유명사에 가까웠다.
전설 속 고대 문명의 왕, 그 후손.
실제로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 핏줄.
실제로 있을 리 없는 존재를 눈앞에서 몇 번이나 증명받고 있다. 인지 부조화가 찾아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믿지 않고서는 바보가 아닌가?
하지만.
‘아홉 주신의 버림을 받은 종족이 고대의 왕족이라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리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강선후가 녹색 보석을 빼 들었다.
곧 형상이 드러나는 방랑자의 활.
그 왼손에 형성된 화살은 그래플링 애로우였다.
이전에 보던 것과는 그 형태가 조금 달랐다.
몇 번 사용하면서 생긴 노하우가 접목되어 보완된 형태.
강선후는 화살 세 발을 연달아 건너편으로 발사했다.
빠캉—! 캉—! 캉!
단순히 바위에 걸리는 게 아니라, 이차적인 기계식 작동으로 단단히 맞물리는 갈고리.
세 개의 밧줄로 된 다리가 만들어졌다.
강선후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따로 챙겨온 안전줄 두 개를 꺼낸 든 뒤, 바위와 나무에 몇 번이나 단단하게 묶었다.
그리고 리리와 자기 자신의 안전 고리에 묶었다.
“밧줄 화살이 풀려버려도 이거라면 우선 떨어지진 않을 거야.”
이차적인 안전 장치였다. 강선후는 이런 것에 꽤 철저한 편이었다.
리리와 강선후는 조심스럽게 밧줄을 타고 건넜다. 세 개나 설치한 덕분에 팔과 다리를 걸을 곳이 많았고, 별문제 없이 건널 수 있었다.
안전줄을 풀어 다시 수거한 뒤, 강선후와 리리는 뒤를 돌아봤다.
거대한 숲이 바로 눈앞에서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숲.”
강선후의 감상평은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그냥 숲이 아니야.”
엘프어로 엘신 포리에리. 성좌의 가호를 받은 숲.
리리가 직접 본 숲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거대한 영역이었다. 한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기에 지도로만 확인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하나의 평야 지대를 독차지한 숲은 그 영혼도 굉장히 강대했다. 리리는 고개를 들어 이 숲이 가진 영혼의 상을 바라보았다.
“뭐가 보여?”
“···하얀 뱀.”
“뱀이라···.”
“산을 감쌀 만큼 거대한 하얀 뱀이 똬리를 틀고 쉬고 있어.”
숲의 영혼이라고 하기에는 여유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 숲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듯한 영혼의 상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리리는 다시 숲을 바라보았다. 강선후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자. 이제부터는 긴장 바짝 하고.”
“응.”
성좌의 가호를 받은 숲은 성좌의 보살핌이 있어야만 진입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의 귀족, 로얄 블러드는 성좌가 있었다.
강선후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강선후는 이런 미풍에 반응하지 않았다. 거기에 어떤 냄새가 담겨있는가에 집중할 뿐이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리리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
나무가 우거지며 점점 모습을 감추는 하늘.
그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 무언가 날아가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
숲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했다.
아니, 너무 조용했다. 숲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졌다.
황금 지침을 꺼내 들어보았다.
아주 미세하지만, 그 끝이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네.”
어쩌면, 얼마 안 남았을지도.
리리와 나는 숲의 깊숙한 곳에 들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렇게, 나흘째 헤매기만을 반복했다. 결국, 장기전을 각오하고 아예 임시 야영지까지 구축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이동 속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꽤 튼튼한 편인 리리의 체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숲은 습기와 열기를 잡아두는 성질이 있다. 즉,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눅눅해지고 공기도 무거워지고, 달아오른 몸의 열기도 잘 빠지지 않는다.
지구도 그런데 지구보다 훨씬 더 높은 에너지와 많은 양분이 있는 이계는 오죽할까?
그날 하루, 남쪽 수색을 마친 우리는 야영지로 귀환한 뒤, 사냥한 동물을 잡아서 먹었다.
나는 서지아가 준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었지만, 리리는 피를 먹어야 했다.
땅을 판 뒤, 나무를 모아 구덩이 아래부터 쌓아 올렸다.
“모스mohs.”
불씨를 맨 아래에 만들고 잠시 기다리자 연기가 피어오르며 나무에 불이 붙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리리도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해 뜰 때까지 푹 쉬고, 다시 찾아보자. 동쪽은 나 혼자 가볼게.”
리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가. 괜찮으니까. 이 정도는 아버지 훈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해가 저물고, 내가 띄워둔 몇 개의 불씨만이 이곳의 유일한 조명이 되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우거진 나무 덕분에 하늘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야외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밀실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신기하지 않아?”
“뭐가?”
“숲은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 되면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방이 되어버려. 공간의 격리 뿐만 아니라, 순환마저도 숲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하거든.”
“흐음.”
리리도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성안에 들어온 기분이긴 해.”
“녹색의 거대한 성.”
“뭐가 살고 있을지 모르는 성인 거지.”
그 말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안락한 성은 아닌 셈이지.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니, 아까부터 계속 생각해온 사실이었다.
나는 일부러 고개를 내려 불에 시선을 고정하는 척하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리리.”
“응.”
“성에 원주민들이 있는 모양이야. 하긴, 주인 없는 건물이 어딨겠어? 그렇지?”
“······.”
조금은 돌려 말했다.
‘원주민’들의 청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니까.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할 가능성이 있을까?”
툭—
내 말을 들은 리리는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대체로 옳더라고.”
“괜찮은 대답이네.”
피잉-! 피잉-! 피잉-! 피잉-! 피잉-!
활시위가 퉁겨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움직였다. 리리는 앉고 있었던 통나무 뒤에 기민하게 숨어 첫발을 피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전방으로 달려들어 두 발을 피한 뒤.
까앙—!
얼굴로 날아드는 한 발은 팔뚝으로 막았다. 화살은 볼품없이 부러졌다.
재킷 내피에 관절을 피해서 부착된 합금 보호대.
태식 씨의 센스는 진짜 보통이 아니었다.
사사삭—!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첫 기습이 먹히지 않았으니, 이 관성을 이용해서 그대로 밀어붙이려는 속셈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걸로 알 수 있는 건, 이 녀석들이 누구든 조직적인 행동을 하고 철저한 계획을 수립하는 녀석들이라는 점.
숲속에 사는 하이에나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사냥꾼들.
아니, 이건 포식자가 아니라 분명 인간이겠지. 화살을 쐈으니까.
좌측에 둘, 우측에 셋. 전방에 다섯.
찰나의 소강상태. 이건 오래 가지 않는다. 녀석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한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는 건 바로 그 접근이다.
「방랑자의 활」
형태가 완성되기도 전에 시위를 당긴다, 화살의 촉에는 기름에 젖은 천이 묶여 있다.
“모스mohs.”
시위를 놓으며 룬을 왼다. 날아가는 화살 끝에는 불이 붙으며, 그 종착지에는 내가 미리 설치해둔 화합물 병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쾅쾅쾅쾅—!
연쇄적인 폭발, 그리고 화재. 미리 설치해둔다.
끼륵— 끼륵—
수천의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끄, 어억···.”
재를 뒤집어쓴 채, 날아와 땅에 구르는 몸에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걸로 처리한 건 셋.
화재는 번져간다. 아무리 습기가 많은 숲이라도 불길의 기세에는 속절없을 뿐.
하지만 이곳은 엘신 포리에리.
이계의 숲이 이 정도 화재를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다.
쏴아아아———
숲이 가진 방화 시스템이 작동하며, 하늘과 격리된 이 나무 아래에 비가 쏟아진다.
땅에 쓰러진 습격자에게 다가가 그 목에 나이프를 들이밀었다.
“···다 튀어나와. 얘 살리고 싶으면.”
나머지를 추격할 필요조차 없다.
이 정도의 조직성을 가졌다면 동료를 포기하고 막무가내로 달려들 일은 없을 테니까.
습격자 무리는 최소한 한 번은 고민할 거고, 그 반응을 보고 이후의 행동을 결정하면 그만이었다.
내 예상대로, 나머지가 엉거주춤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엘프였다. 젊은 엘프들은 이 숲에서 얻은 소재들로 이루어진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의외로 비쩍 말라 있었고, 신체 능력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증오는 명백했다.
“이놈!”
대장으로 보이는 젊은 엘프가 소리쳤다.
“감히! 외톨이 종족 주제에 엘신 포리에리에 발을 들이미느냐! 벌써 세 번째로다! 어디 놈이냐!”
“···세 번째?”
나 말고도, 인간이 두 번이나 이곳에 진입을 시도했다고?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지만 지금은 신경 안 쓰기로 했다.
“······.”
나는 쓰러져있는 놈에게 검날을 밀착한 채 말했다.
“너희들은 뭐지?”
“외톨이 족속 따위가 알 필요는 없······.”
“말하지 않으면, 얜 죽는다.”
“······.”
움찔한다. 확실히, 동료애는 있는 놈들이다.
이런 놈들은 대체로 말이 안 통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우리는 엘시니다.”
“엘시니?”
내 옆으로 다가온 리리가 말했다.
“···엘프 수도승이야. 다들 초보 수준 같긴 한데···.”
“뭐 하는 놈들인데?”
“성좌가 되기 위해서 성좌의 숲에서 참선하는 이들.”
“······.”
“엘프는 종족 전체가 성좌의 가호를 받은 유일한 종족이야. 그래서 승천하고자 은둔하여 수련에 매진하는 경우가 있어. 그들이 바로 엘시니. 공용어로 엘프 수도자쯤.”
수도승이라.
“왜 날 공격했지?”
“너희 족속이 이 숲을 더럽히는 게 벌써 세 번째다. 우리의 인내도 한계에 달했다. 당장 떠나라! 우리를 극복하더라도, 끝내 숲이 저주하는 건 피할 수 없을지니.”
“······.”
아무래도, 이 숲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숲에 유적이 하나 있는 거로 알고 있거든?”
엘시니의 대장은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서로 좋은 감정도 아닌데, 괜히 말을 길게 끌고 싶지가 않았다.
“알고 있네. 거짓말 칠 생각 하지 말고 안내해.”
“역시, 탐욕에 눈이 멀어 신에게 버림받을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린 종족답군. 허나, 그 유적은 너 따위에게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어차피 아무것도 얻어가지 못할 터이니, 화를 당하기 전에······.”
“안내하지 않으면, 얘도 죽고 너도 죽어. 지금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해?”
끼이이익—
손에 쥐고 있는 낚싯줄을 살짝 끌어 올리자, 여기저기에 설치해둔 덫이 내는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다.
“······.”
눈치가 있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서는 대장 엘프.
“따라와라.”
나는 쓰러진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리리는 내 옆에 바짝 선 채, 긴장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냥 지배자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
“애초에 인간이라고 개지랄하는 녀석들한테 그게 통할까? 나는 귀찮은 일은 빨리 끝내는 걸 선호해. 옳게 끝내는 게 아니라.”
리리는 무난하게 납득했다.
이건 틀리지 않았다.
덕분에 나흘 동안 헤매기만 한 일의 목적에 바로 닿을 수 있을 테니까.
***
엘시니의 대장은 이를 갈았다.
최근 1년 남짓한 시간에 인간이 신성한 숲을 더럽힌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그들도 참았다. 어차피 숲이 그 인간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몇 번이고 들어와서, 숲의 신성함을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상한 액체를 분사하는 기계로 숲을 오염시키려고 시도했다.
숲의 이치를 따라가 승천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삶의 전반을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참지 않기로 했다. 숲의 저주가 내리기도 전에 먼저 처리해버리고자 직접 움직였다.
이들은 전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들이기에 아직 이렇다 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반격을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막내 수도승이 상처를 입은 채 여전히 인간의 인질이 되어 있었다.
‘···지배자가 아니라면, 성역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오히려 그렇기에 대장은 침착해졌다.
성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포기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결국 저주에 잠식되어 죽게 되리라.
엘시니의 대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맘에 걸리는 건, 오직 저 뒤를 따라다니는 뱀파이어 여자뿐이었다.
저 여자가 만약에 귀족이라면, 성좌가 있을 테니 저주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우선 인간이 죽으면 결정하자.’
아까 전 전투에서도 대부분 인간 남자가 모든 일을 행했다.
그가 저주에 잠식될 때 생각해도 늦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은 남쪽으로 향했다. 강선후가 이미 방문했던 방향이었다.
“···이곳이다.”
강선후는 엘시니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숲뿐이었다.
하지만 강선후는 그제야 뭐가 문제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러니까 몰랐구나.”
거울이었다.
정확히는 거울처럼 주변의 풍경을 반사, 산란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벽이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거울 방호막이 돔 형태로 하나의 유적을 감싸고 있었다.
수풀에 숨은 위장복 착용자처럼 인지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으나, 인지하고 보니 이상한 점이 보였다.
“···리리, 우리 이쪽으로는 왔었지?”
“중간에 다른 쪽으로 틀었지.”
“···운 참 지지리도 없네. 위장만 안 되어 있었어도 충분히 볼 수 있었을 텐데.”
엘시니의 대장은 도끼눈을 뜬 채 인간을 바라보았다.
“자, 어차피 너는 들어갈 수 없다. 이 방호를 뚫을 방법은 없으니. 그만 단념하고 돌아가라. 지금 바로 돌아가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 목소리를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호벽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다가, 손을 가져다 댔을 뿐이었다.
모든 행동은 그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시니들이 숨을 멈췄다. 그들 중 일부는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했다.
어떠한 이음새도 없는 첨단의 방호벽이, 그의 손이 닿자마자 삼각형의 조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속 쟁반 위에 금속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이곳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인간이 손을 댄 곳을 중심으로 갈라지는 삼각형들은 서로 겹치고 겹쳐 계속해서 접히듯 작아져 갔다.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적 전체를 감싸던 방호벽이 선술집 나무쟁반 수준의 삼각형 하나로 완전히 재조립될 때까지.
툭—
삼각형 모양의 거울이 되어, 인간의 발 앞에 떨어졌다.
엘시니들이 놀란 건 그 장면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이 행하여질 때, 그 손등에서 주홍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의 문신을 모두가 보았다.
송곳니의 문신.
송곳니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으나.
빛을 발하는 문신이 뜻하는 바가 지배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강선후는 흥미가득한 표정으로 삼각형의 거울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엘시니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졌다.
지배자?
인간이?
명가의 가주인가?
아니면 후계인가?
우리는 지금 명가의 인물에게 무례를 범한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지 않은가?
인간이 어떻게, 지배자의 상을?
온갖 의문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만약 이들에게 아직도 기회가 남아 있다면, 그건 지금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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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0 격동의 사계 (1) – 무료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