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52
52화 ep20. 격동의 사계 (2)
덥수룩한 수염과 구불구불한 단발의 머리카락.
그 진중한 외모와 대비되는 유쾌한 표정.
아무렇게나 앉아서 커다란 책에다 펜으로 무언가를 적는 듯한 조각상이었다. 그 책에는 놀랍게도 완성된 룬 문장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누굴까?”
“……책과 펜이라.”
리리는 아는 눈치였다.
“초대 기록관이 아닐까?”
“기록관?”
“지배자 중 하나야. 만약에 맞다면, 이름은 안토니오 슈거.”
조각 옆에는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건 동상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진짜 가방이었다.
부분적으로 금속 징이 박혀 있었고, 금테가 여기저기 음각으로 박혀 있는 튼튼한 가죽 배낭.
딱 봐도 특제품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의심을 안 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그래서 함정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충분히 관찰했다.
내가 가방을 잡은 건 거의 30분이 흐른 뒤였다. 리리는 그 의도를 이해하고 뒤에서 숨죽인 채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가방을 든 뒤,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안 보이네.”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역시 벽에서 스며 나오는 푸른빛에만 의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모스mohs.”
그래서 불꽃을 소환했다.
“……?”
그 시점에서 리리도 가까이 다가왔다.
내 반응이 퍽 이상하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리고 곧, 리리도 나와 같은 반응이 되었다.
“안…… 보이네?”
그래도 안 보였다.
리리와 나는 그 뒤로 30분을 더 고민했다.
매번 생각하는 사실이지만, 모험은 자살과 동의어가 아니다.
속이 보이지 않는 가방이 모험심을 자극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헉! 이게 뭐임? 궁금함! 하면서 손을 쑥 집어넣으면 그걸로 마지막 작별이 될지도 모른다.
테스트는 당연했다.
<방랑자의 활>
밧줄 화살을 소환해서 입구로 쏴 본다.
간단하잖아?
그렇게 쐈는데, 밧줄이 거의 다 들어갈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중간에 밧줄을 잡지 않았다면 분명 다 들어갔을 거다.
잡아당겨 보니 아무런 손상 없이 그대로 빠져나왔다.
안전하단 뜻이겠지?
내 손이 들어가는 건 그 뒤였다.
손을 집어넣자, 안쪽의 촉감은 놀랍게도…… 일반적인 가방이었다.
심지어 딱히 크게 느껴지지도 않는 공간.
아까는 분명 이백 미터가 훌쩍 넘을 밧줄이 통째로 빨려 들어갔었는데 말이지.
“……이거 그건가? 아공간 가방.”
“고대인들은 이런 가방을 썼었나 봐.”
고대 문명의 우월한 기술로 만들어진 아공간 가방이라니.
“진짜 사기 수준이네. 이런 건.”
너무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안쪽을 더듬었는데, 내 손에 무언가 잡혔다.
순간적으로 눈이 번쩍 뜨여 끄집어내 보았다.
그렇게 검지와 엄지 사이에 잡혀 나온 그 모서리가 날카로운 동그란 물건.
아니, 보석.
“…….”
리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황금의 유물…… 이야.”
이렇게 찾을 줄이야.
아니, 오히려 이런 식이 당연한가? 유물이란 원래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법.
이미 이 유적은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충분한 방호를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이 지하실마저 리리와 내가 아니었다면 열 수조차 없었지.
나름대로 납득한 뒤, 보석을 손에 쥐고 부드럽게 주먹을 쥐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기에 리리는 조금 뒷걸음질 쳤다.
푸른 보석이 품고 있는 가벼운 온기가 손바닥에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찰나의 순간.
손가락 틈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빛이 뿜어 나오더니.
그대로 멈췄다.
“뭐야. 안 된 거야?”
리리가 저렇게 반응할 법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문제없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손바닥을 펴 보았다.
내 손바닥에 있는 건.
“반지구나.”
반지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어두운 푸른 보석이 총 다섯 개 박혀 있는 그런 반지.
여기까지 왔으면 전혀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로 오른손의 검지에 껴 보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방랑자의 활처럼, 유물이 사용자의 의도를 이해해 준 걸까?
“진짜 딱 맞네. 놀라울 정도인데.”
내 말을 듣고 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랑자의 활이랑 마찬가지로, 유물이 사용자의 의도를 이해한 거일 거야.”
“전혀 안 불편해. 안 낀 것처럼.”
“황금의 유물이니까. 그 이름값은 해야지.”
“……진짜 안 꼈을 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
보통, 반지 하면 버프 효과 아닌가? 영화에서도 그렇잖아. 투명해진다든가, 못 보던 걸 보게 된다든가.
그런 걸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좀 알아봐야 하나.”
리리도 모르는 눈치니 시간을 두고 알아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 무한한 아공간 가방과 두 번째 유물, 그리고 휴대 가능한 대규모 거울 방호벽까지.
생각보다도 많은 걸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적 하나에 이 정도라면 딱히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하지만 잊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초대 기록관의 석상이 들고 있는 책, 그건 그저 장식이 아니었다.
“여기에 룬 문자가 하나 있어.”
리리도 흥미가 동했는지 다가왔다. 나는 그 사이에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룬 문자에 손가락을 올렸다.
“카…….”
시동어를 차마 다 욀 수도 없었다.
그 전에 사라졌으니까.
“……?”
나는 오른손에 낀 반지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는 어두운 푸른색의 보석. 그 다섯 개 중 하나가 밝게 빛났다.
아니, 정확히는 희미한 빛이 그 안에 깃들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룬 문장이 보석 안으로 들어가 빛이 된 상태였다.
* * *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생각보다 반지의 능력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문자 형태의 룬을 총 다섯 개 저장해 놓을 수 있다. 그리고, 원하는 걸 그때그때 하나씩 꺼내 쓸 수 있었다.
이때 몇 가지 장점이 딸려 왔다.
우선.
파악—!
손바닥을 땅에 데자 물이 사방으로 팍 튀었다. 룬 문자 형태의 씨르thir. 문자 형태로 저장해 놓은 게 하나 소모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악—!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문자가 발생하더니 소멸하며 물이 터져 나온다.
이처럼,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의 표면에도 룬 문자를 ‘던지듯’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씨르thir나 모스mohs 같은 것들은 원래도 어느 정도 원거리에서 사용할 수 있지만…….
“같은 언어는 대부분 입으로 외는 것보다 문자 형태가 출력이 강해.”
“응, 그건 배웠었어.”
“그렇다면, 여기에 저장해 둔 모스mohs는 입으로 외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단 뜻이겠지.”
대단한 살상력을 발휘하기는 힘들겠지만, 강한 건 무조건 좋기 마련이다.
그리고 화력 증대보다 더 도움이 되는 건 속도였다.
아무리 빨리 읊더라도, 룬 언어는 룬 언어다. 나로서도 마냥 속사포처럼 내뱉을 순 없었다. 룬 언어의 성립 조건에는 억양과 속도의 강약도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이거라면.
파악—!
이런 식으로 손을 뻗자마자 딜레이 없이 발동된다.
“……이게 기록관의 반지?”
간단한 능력이었지만, 방랑자의 활과 마찬가지로 내가 얼마나 고민하냐에 따라 그 사용법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아, 그리고 이게 있었지. 방금 조각상의 책에 쓰여 있었던 룬 문장. 마침 이 반지에 마지막으로 저장되어 있는 문자가 그거였는데.
이게 뭐냐 하면…….
“으헝헝!”
이건 내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룬 문자에서 난 소리였다.
“…….”
“…….”
리리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내 표정도 저럴걸?
리리는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초대 기록관은 장난기가 심한 사람이었나 봐.”
“어, 그러게. 그 사람이 남긴 기록이 있다면, 그거 믿을 수 있는 거야?”
“그…… 래도 지배자니까. 격이 있지 않았……을까?”
내친김에 하나 더 그려서 발사해 봤다.
“응킼킼!”
그러고는 리리를 바라보았다.
“격? 혹시 킼!을 잘못 발음한 거야?”
“……당신 나한테 왜 그래?”
할 말이 없어지니 틱틱대길래 그만 놀리기로 했다.
이 문자를 쓸 데가 있을까?
확신은 없다만, 알아 둬서 나쁠 거야 없었다. 뇌에 용량 차지하는 것도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할 게 남아 있었다.
기록관의 반지를 잠시 보석 형태로 바꾼 후, 황금 지침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지침이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게 이제 세 번째 유물이 있는 방향일 터.
“마르카마 투 살리-운드 데 모스marlkaama to sali-wond de mohs.”
나만의 나침반을 소환한 뒤, 시계의 중앙에 그 방향을 정확히 맞춘다. 그리고 지침이 가리키는 쪽을 펜으로 표시해 뒀다.
“뭐 하는 거야?”
“나중에 알려 줄게.”
나침반과 지침을 비교해서 방향을 알아내는 독도법이 있다.
원래는 북극성과 태양을 이용하는 방법이긴 한데, 응용하면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 결과는 베이스캠프로 복귀하면 알게 될 예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리와 내 가방 속에 있는 짐을 몽땅 아공간 배낭에 집어넣었다. 내친김에 가방들도 모두 때려 박았다.
무리 없이 들어갔다.
들어 보니까 무게가 아예 안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대략 3분의 1정도로 줄어든 느낌?
진짜 말도 안 되는 걸 쑤셔 넣는 게 아니면, 앞으로 짐의 무게 때문에 고생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소지품을 챙길 때도 훨씬 더 선택권이 많아지는 거고.
“난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마음에 드네.”
“유물보다?”
“유물보다…… 까지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제일 와닿아.”
그램 이즈 킬로그램.
무게를 줄인다는 게 탐험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보면 이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전리품이었다.
지하 시설에서 나간 뒤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시간이 좀 남은 시간, 출발하기에는 적당한 시간이다. 식량 문제도 조금 있었으니 여기에 계속 남는 것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숲에서 움직이는 게 나았다.
우리는 제단 앞을 지나가며 기계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그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 갈게.”
고양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혀로 앞발을 핥으며 그릉댈 뿐이었다. 아무리 기계라곤 하지만 속 편해 보여서 보는 나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유적을 떠났다.
“이럴 때마다 항상 아쉽단 말이야. 구경할 건 다 했는데.”
“그럼 밤은 여기서 지내고 떠나는 건 어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아쉬움을 남겨 두면 나중에 다시 왔을 때 의미가 커진다. 굳이 지금 당장 모든 욕구를 해소할 필요는 없다.
들어왔던 길을 따라 돌아갔다. 이대로 숲을 가로지를 생각이었는데, 누군가 유적의 입구에 서 있었다.
“이전에 그 엘시니들이야.”
“……볼 일 있나?”
뒤늦게 복수라도 다짐했나?
가볍게 그런 생각을 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고 표정을 살펴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지배자님.”
엘시니들이 일제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시대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꽤 멀리까지 들렸겠지.”
대장 엘시니, 적금발의 더벅머리 젊은 엘프가 고개를 들었다.
“엘 로크라 벨라는 거리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계에 귀를 연 모든 이들이 새 시대의 시작을 들었을 겁니다. 끝없는 어둠 너머의 매마저.”
리리에게 들었던 이야기네.
그나저나, 온 세상의 사람들이 다 들었다면 좀 큰 사건 아닌가?
“……세상이 복잡해지겠지만, 저희는 계속해서 참선해나가겠습니다.”
이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집이 별로 멀지 않나 보네.
그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대장 엘시니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혹시 지배자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챙겨 왔습니다.”
빤히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스마트 폰이었으니까. 게다가, 신제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