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53
53화 ep20. 격동의 사계 (3)
“이걸 어디서 얻은 거지?”
“이전에 들어왔다가 저주에 희생된 인간의 소지품이었습니다.”
예상컨대 OWIC일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장벽의 존재부터 이미 알고 있는 녀석들이었으니까. 이중 속임수까지 써 가며 감췄었지.
그놈들이 이 너머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엘시니 대장이 건넨 핸드폰을 받았다.
“이건 도움이 될 거 같긴 하네.”
“도움이 되신다면…… 염치 불구하고 지배자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전혀 어려운 부탁이 아닙니다.”
“우선, 들어 보기나 할게.”
“저희 엘프가 성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자주 들은 이야기다. 서지아도 자랑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 성좌의 이름은 엘신.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승천의 길을 발견한 엘프입니다. 우리는 그의 고행길을 따라가 같은 깨달음을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대륙 어딘가에 엘신의 후계자가 살고 있습니다. 혹여 그를 만나게 되면 이야기를 전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엘시니의 대장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약속된 때가 왔으니, 엘시니를 이끌어 달라. 이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그 표정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황금의 시대가 열렸다는 건 이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길었다. 충분히 생각에 잠길 기회가 있다는 뜻이 되었다.
“리리,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
“무슨 생각?”
손을 앞으로 다소곳하게 모아서 걷는 건 리리의 버릇이다. 아마 귀족 생활을 하던 시절 배웠던 예법의 흔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상태로 리리는 고개만 살짝 돌려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뭐…… 엘 뭐시기?”
“엘 로크라 벨라. 당신 이름 진짜 못 외우네.”
“좀 그런 편이긴 해. 리라.”
“……유치해.”
저 가벼운 경멸이 담긴 시선이 재밌다. 리리 특유의 과장되지 않으면서 놀리고 싶어지는 그런 표정.
어쨌거나 본론은 이랬다.
“그 종소리, 전 세계 지배자의 상도 다 들었겠지?”
“그렇겠지.”
“지배자들에게 황금의 시대는 어떤 의미일까?”
“…….”
리리의 표정은 복잡했다.
좋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이건 아마 꽤 오래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 같았다.
복귀하는 길에는 특히 많은 유성이 떨어졌다.
내 입장에서 보기엔 그저 유성이었다. 외계의 부유물이 낙하하면서 마찰 때문에 불타는 현상.
하지만, 그걸 본 리리의 표현은 퍽 서정적이었다.
“성좌들이 황금의 시대를 축하하고 있어. 당신이 만들어 낸 거야.”
성좌가 개인의 행동에 반응한다는 건 퍽 신화적인 발상이었다.
리리는 의무를 제대로 행했다는 데에 자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보기 좋았지만, 머릿속에 남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내가 황금의 왕국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최선을 다할게.”
리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난 솔직히 이런 느낌이었다.
“……못 찾으면 어때?”
그래. 못 찾으면 어때? 찾는 과정도 충분히 즐거운 건데.
리리는 이럴 때마다 눈을 흘기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문제 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연히 내 입장에서도 농담이었으니 그랬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 과정이 처절한가, 즐거운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쪽이 아무리 생각해도 낫다.
서른의 밤이 도착하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급하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짐을 풀고 엘시니들에게 받았던 핸드폰을 꺼냈다.
OWIC에게는 우선 숨기고, 차소희에게 한 번 물어볼 예정이었다. 복구하는 법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걔가 더 잘 알 테니까.
짐을 대충 푼 뒤 남은 시간은 마당 의자에서 일지를 읽으며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막 해가 진 시점.
“서지아.”
“역시 알고 있네.”
툭—
높은 나무에서 서지아가 날렵하게 착지했다.
저런 걸 보면 확실히 엘프가 맞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다녀왔어? 자기.”
“누가 네 자기야. 한동안 진지하더니 또 태도 바꿨다?”
“틈틈이 연기 연습하는 거라고 생각해. 너 완전 난리를 일으켰더라. 지금 서울 어떤지 알아? 사람들 광화문에서 시위하고 있어. 당신이 만든 종소리 때문에.”
“OWIC이 고생 좀 하겠구만.”
“그 새끼들은 고생하다 뒤지든 말든. 어차피 조만간 언플해서 잘 덮겠지. 항상 그랬으니까.”
서지아는 가볍게 웃었다.
리리는 그런 서지아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해 줄 말이 있는데.”
다시 서지아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엘신이라는 성좌가 있어.”
“엘프의 성좌 말하는 거지? 수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승천했다는 엘프.”
“알고 있네. 생각보다 우리 세상에 박식한데.”
“주변에 열린 입이 많아서.”
서지아는 오두막의 벽에 등을 기댄 뒤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 엘신이 성좌가 되고 처음 내려 준 예지가 있어.”
“뭔데?”
“엘 로크라 벨라가 울린 직후 찾아올 계절, 격동의 사계.”
“……격동의 사계? 황금의 시대가 아니라?”
“두 시대 사이에 끼어 있는 구간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음, 이해했어.”
“그 네 개의 계절 동안 많은 일이, 정말 많은 일이 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다고 했어.”
서지아는 눈만 힐끗 올려 리리를 바라보았다.
“다른 지배자들은 뭐 하는데? 다들 왕좌를 원하지 않아?”
평소부터 궁금한 사항이었다.
이게 혹시 배틀로얄 게임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할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왕좌에 가고 싶은가?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지금 당장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할 거 같았다.
그런데 서지아의 답변이 미묘했다.
“……글쎄. 모든 지배자가 과연 왕좌를 원할까?”
그 대답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장 서지아도 지배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얘도 전혀 왕좌를 원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서지아는 하루빨리 자유로워지고 싶은 눈치였다.
지배자의 숙명에서, 해방되고자 했다.
* * *
지하 무덤.
버려진 섬의 지하 무덤.
이 지배자가 자신의 안식처로 직접 선택한 곳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회전형 돌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잔등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오래 닫혀 있었던 문이 열리며, 곰팡이가 열린 문 바깥으로 공기와 함께 쓸려 나갔다.
들어온 이는 이런 불쾌함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구멍이 숭숭 난 아마포 망토로 코를 한 번 닦은 다음, 쪼그려 앉으며 등불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듬성듬성한 수염투성이였으나, 깊은 눈이 배움이 없는 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억하길 거부하는 자여.”
그가 등불을 들이민 건 한쪽에 쓰러져 있는 해골 바로 앞이었다.
관절마저 좀먹어 이제는 하나라고 할 수 없는 뼈들의 모음.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해골에게 남자는 말을 걸고 있었다.
“기억하길 거부하는 자여. 엘 로크라 벨라가 울렸다.”
“기억하길 거부하는 자여. 현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첫 번째 지배자여.”
“기억하길 거부하…….”
“거기 아니야. 띨빡아.”
등불을 든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먼 반대편 구석지.
거기에 처박혀 있는, 아무렇게나 조립된 해골.
“넌 아직 뒤지지도 않았으면서, 대가리 무게가 벌써 나보다 가볍냐? 벌써 몇 번째냐?”
“아,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쇼 스승님. 여기 있는 것들은 다 똑같이 생겼는데, 내가 알 바입니까?”
남자는 투덜거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뭐? 눈까리는 두더지 주고 왔냐? 이걸 구분 못한다고?”
“어차피 이 방에 들어와서 중얼거리면 스승님이 먼저 여기 있…… 다 하시는데, 제가 고생해서 찾아낼 이유는 뭡니까?”
“어이고 내가 가르치고 본 새끼가 알고 보니 오크 변소 출신이었구나.”
“거기가 여기보단 낫겠습니다.”
남자는 투덜거리며 가지고 온 접착제로 대충 해골을 붙였다.
숲의 생명을 머금은 특수 접착제.
해골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뒤지겠네. 아까 말했던 거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진짜 노망나셨네. 엘 로크라 벨라가 울렸습니다.”
“허…… 그 신카가 지배자를 선택했다고? 몇 시대 만이지?”
“저야 모르죠. 스승님은 기억하기 싫어하실 거고. 그나저나…… 제 스승님 맞죠? 혹시 자연 발생 언데드 잡것이 구라치는 거 아니죠?”
“네 스승이 언데드다, 개늠시키야.”
“……내 스승 이름은? 이 언데드야. 대답하지 못하면 당장 사지를 원상복구 시키겠다.”
“육시럴. 네가 말해 봐. 내가 누구지?”
중년의 남성은 비틀거리는 뼈에게 맞으면서도 껄껄 웃었다.
“최초의 기록관, 안토니오 슈거 님이십니다.”
“그래. 넌 내 제자가 맞는 모양이다. 장난 그만 치고 옷이나 내놔.”
최초의 기록관, 안토니오는 제자가 준 망토로 온몸을 가리고는 마스크로 얼굴을 단단히 가렸다.
“……올라가자. 오랜만에 해를 보겠구만.”
안토니오는 문으로 걸어가며 읊었다.
“바크vakk.”
문이 조용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 * *
이름 없는 설산의 정상.
그 깎아지르는 절벽 앞에 선 채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한 기사.
단 하나의 빈틈도 없는 육중한 금속 갑옷이 설산의 흰빛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맹수의 털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망토는 고산의 돌풍에도 꿈쩍없이 제자리를 유지했다.
어떤 젊은이가 그 기사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변변찮은 털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맨살을 내놓은 소년은 벌써 보랏빛으로 질리고 있었다.
이 모든 고통을 견디며 기사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이시여, 지배자의 운명 짊어진 분이시여, 집행자시여!”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젊은이는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속절없는 짓이었다. 설산의 바람은 야속하게도 그때마다 더욱더 강하게 불어닥쳤다.
“엘 로크라 벨라가 울렸습니다. 약속된 때가 왔습니다. 집행자로서 의무를 다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견습 기사는 과감하게도 그렇게 외쳤다.
“당신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황제마저 벤 기사잖습니까! 왜 이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당신이 검을 버렸다는 건 압니다! 다시는 검을 들지 않겠다 맹세한 것도 압니다! 하나 그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를 집행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서 온, 지배자이자 왕의 표본이시지 않았습니까!”
기사는 계속해서 지평선만을 바라보았다.
“검은, 검은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왕좌는 언제든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으니!”
기사는, 지평선만을 바라보았다.
* * *
“성녀님.”
고대 문명의 양식을 본떠 만든 창을 통과한 햇빛은 색색의 광택이 되어 주신교 예배당의 바닥을 물들였다.
이곳의 성녀는 그저 단상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어 얹은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베일에 가려진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적색 머리카락만 약간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성녀님.”
누군가 본다면 잠들었거나, 혹은 죽은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모두가 이 성녀는 잠들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절대로 잠들 수 없었다.
그 뒤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제는 최대한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성녀의 등을 보고 있는 그 미간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눈앞의 ‘성녀’가 바로 교회를 배신한 자였기에 그랬다.
그런데도 사제는 그녀를 여전히 성녀라고 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배신자지만, 미약하게나마 남은 희망이기도 했기에.
“성녀님. 종소리는 들으셨겠지요.”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제는 이를 악물었다.
“엘 로크라 벨라가 울렸습니다. 비로소 황금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교회는 이날을 위해서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다는 것. 성녀님도 아시겠지요.”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예언자십니다. 열둘 지배자의 상 중 하나인 예언자입니다.”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언자의 의무가 뭔지 아십니까. 선대 예언자가 지배자의 격을 계승해 준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성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사제는 잠깐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숨소리가 조금 더 커졌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예언자는 교회를 단합하고 이끄는 중추가 되어……. 우리를 다시 예전의 영광으로 돌려놓아야 한단 말이다.”
사제가 들고 있던 스태프를 내던졌다.
“결국 이때가 왔지 않느냐! 나는 네년이 예언자로 있을 때 이 시대가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성녀는 교회의 예언자였다.
모두의 사랑을 받고, 또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열렬한 신도였다.
그녀는 촉망받는 지배자의 상으로 자라왔다.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예언을 거부했다.
교회에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를 설득했다.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인내가 사라진 종국에는,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예언자의 입을 열게 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그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내가 널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데…… 예언자의 숙명을 저버려? 어떻게, 어떻게 네가…….”
성녀가 뒤로 돌았다. 평범한 태도, 평범한 표정으로.
그리고 사제 쪽으로 걸어갔다.
그 얼굴을 마주한 사제의 눈에는 분노보단 슬픔이 먼저 자리 잡았다.
“대체 왜,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이냐. 대체 우리 교회가 무엇을 부족하게 해 줬길래. 우리가 너에게 무슨 부담을 주었길래……!”
성녀 비바치시모.
적색 장발을 늘어트린 한 명의 수도자.
이 시대 예언자의 상.
그녀의 입에는 단검이 물려 있었다.
그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오는 단검, 그녀 자신마저 반드시 멸할 단검이었다.
저주도, 희생도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스스로 물었다.
예언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위해서.
절대로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위해서.
비바치시모는 사제를 지나쳐 예배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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