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54
54화 ep21. 와일드 헌트 (1)
* * *
리리와 나는 이틀을 잠만 자다시피 했다. 일어나니 이미 해가 중천이길래 근처 옹달샘에서 씻고 이번에 얻어 온 물건들을 꺼내 봤다.
거울 방호벽은 내가 손을 가져다 대니 다시 한번 문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지배자의 상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거 내가 쓸 일이 있으려나?”
어쨌든 가지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겠지.
그리고 이건 기록관의 반지.
룬 문자를 저장해 놓을 수 있는 황금의 유물이었다. 저장한 룬 문자는 발사하자마자 발동시킬 수도, 아니면 발동을 보류한 채 원하는 공간에 새길 수도 있었다.
여러 실험 끝에 사정거리가 있다는 것까지 알았다. 정확히 재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십 미터. 하지만 단정 지어선 안 된다. 이계의 물건이니까.
아공간 가방은 말할 필요 없이 쓸모가 많은 물건이고.
“이 정도인가.”
으에엑! 거리는 룬 문자는 솔직히 모르겠다. 쓸 데가 있나? 진짜 장난으로 만들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한 번의 여행으로 얻은 물건이 많았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펼쳐 놨던 물건은 가방에 대충 쑤셔 넣은 뒤,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아직도 피로가 남아 있었는데, 콜드 프로스트를 붙잡고 있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늘어져 있고 싶었다.
힐끗 눈을 내려 보니 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리리 발도 완전 만신창이가 되었던데.
“부츠를 좋은 거로 하나씩 사야 하나.”
돈을 제대로 써 본 적 없으면 쓰는 법도 모른다는 말이 딱 맞다. 계좌에 2억이 훨씬 넘는 돈이 들어가 있는데, 부츠 하나 새 걸로 바꿀 생각을 안 했다니.
시간 내서 서울로 쇼핑 한 번 갔다 와야겠네.
마당에서 이러고 있자니,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리리가 빼꼼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좋은 아침.”
리리는 날 바라보고, 그다음에 마당에 있는 텃밭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더니 부스스한 흑발을 손가락으로 몇 번 빗었다.
“씻고 올래.”
수풀 뒤쪽으로 사라졌던 리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역 같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둘둘 감으며 다시 등장했다.
동대문에 들렀다가 사 준 티셔츠와 돌핀 팬츠를 입고 등장하는 리리.
피부가 유독 약해서 아무거나 입지 못하는 뱀파이어인데…….
“그거 입을 만해?”
“엄청 편해. 솔직히 놀랐어.”
면과 폴리에스테르의 합성원단은 뱀파이어가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원단이었던 거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당 5천 원짜리 티셔츠에 들어가는 그 원단이 이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종족을 만족시키는 셈.
지구의 기술이 대단하다는 걸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체감했다.
“근데…… 이거 바지 좀 짧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여자들이 편하게 입는 옷 아무거나 달라고 해서 사 온 건데, 귀족 예법에 익숙한 뱀파이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어색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다른 거 사 올게.”
리리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내가 뭐 따질 처지가 아니잖아. 당신도 여유가 있는 건 아닐 거고. 이것만 해도 한두 푼이 아닐 거 같은데…….”
아닌데.
설명하자니 복잡해질 거 같아서 그냥 넘겼다. 나중에 시간 되면 가서 사 오지 뭐.
“이제 뭐 할 거야?”
“좀 쉬다가 다음 유물 계획 세워야지. 너도 좀 쉬엄쉬엄해.”
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텃밭으로 갔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해서 올 거 같은데…….
“안녕! 좋은 아침!”
호랑이도 제 말하면 찾아오는 법이었다. 고개만 슬쩍 돌려 정장 차림의 차소희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여관에 가니까 직원분이 말씀하시더라고? 네가 날 찾는다고.”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옆을 보니 서지아와 같이 왔다. 물론 서지아는 이전의 그 헤드폰을 끼고 귀를 가린 상태였다.
“넌 왜 왔어?”
“볼 일이 있으니까 왔지.”
“……너희 둘이 아는 사이?”
“응, 지아 씨랑 예전에 일 한 번 같이 한 적 있어.”
생각해 보니까 차소희는 하운드 계약 건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것 같았지.
서지아는 하운드 쪽에서도 끗발을 좀 날린 모양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왜 불렀어?”
“이거.”
나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엘시니들이 나에게 건네준 그 핸드폰.
이건 분명 OWIC 직원 중 한 명의 것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곳에서 지구의 물건이 발견될 리가 없었다.
“이거 왜?”
“안에 있는 데이터를 좀 복구할 수 있을까? 너는 이런 거 잘 알 것 같아서.”
차소희는 핸드폰을 받아 살펴보았다.
“침수된 건 아닌 거 같고, 액정이 깨져 있긴 한데 메인보드까지 충격이 안 갔으면 뭐 상관없고…….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된 거야?”
“글쎄. 몇 달?”
차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동안 방치된 게 아니면 메모리 휘발도 크게 걱정 없고. 그럼 웬만하면 될 거야. 근데, 누구 건데?”
“이번에 동쪽으로 갔다 왔든?”
“버뮤다 숲?”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보다 더 멀리.”
“응? 거기 방문 불가 지역일 텐데?”
“어떻게 허락은 받았어. 어쨌든 거기서 찾은 거야.”
“……방문 불가 지역에 어떻게 핸드폰이 떨어져 있어?”
“OWIC 놈들은 알지 않을까?”
여기까지 들은 차소희는 대충 감이 왔는지 눈빛을 반짝거렸다.
“오……. 뭔가 미션 임파서블 작전 같은데……. 두근거리잖아?”
차소희의 망상력이 발동하길래 서둘러 본론을 끝내기로 했다.
“할 수 있겠어?”
“해 봐야지. 수소문해서 구해 볼게. 외부 발설 안 할 만한 믿음직한 사람으로.”
차소희가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왜에에에에엥—
갑자기 마을에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와 리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리리는 어느새 헌팅 나이프와 내 황금 지침을 오두막에서 가지고 나오고 있었다.
그 침착한 대처는 칭찬해 줄 만했지만, 지금은 우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판단할 차례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리번거리는데, 차소희와 서지아는 왠지 차분했다.
“……뭐야 이거?”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지아는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갑자기 어디에서 너 같은 인간이 튀어나왔나 했는데……. 너 여기 베이스캠프 온 지 얼마 안 됐구나? OWIC발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
차분한 둘의 모습에 나와 리리도 맥이 빠져 버렸다.
곧, 안내음이 들렸다.
<중앙 통제실에서 전달합니다. 현재 북쪽 초소에서 이계인의 집단이 마을로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적대적인 집단이 아니니 당황하지 마시고, 이계용 복장으로 환복 후 행동 수칙을 준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전달합니다. 현재 북쪽 초소에서…….>
“…….”
서지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들 진짜 장난 아니야.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난 상상도 못했거든.”
차소희는 저게 무슨 말인지 모를 거다. 물론 서지아가 엘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나도 감을 잡았다.
아무리 차원문이 운 좋게 이계 변방에 열렸다고 해도 이계와 아무 연관이 없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OWIC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 위장 정책을 펼치는 거니까.
“이렇게 이계 쪽에서 방문하는 경우가 자주 있어?”
“간혹 있어. 이번이 네 번째인가 그럴걸? 한 번은 제국에서 와 가지고 진짜 완전 비상이었다?”
차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고는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지아 씨는……. 그 정도 복장이면 되겠네요. 부럽다. 저는 정장이라……. 빨리 여관으로 가 봐야겠네. 핸드폰 내가 챙겨 간다? 나중에 결과 나오면 말해 줄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 준 후 나도 리리를 바라보았다.
“……리리? 옷 갈아입자. 너 드레스로.”
의문을 품을 법한데, 리리는 우선시키는 건 생각하지 않고 곧잘 따랐다.
어렸을 때 훈련을 받았다는데, 그게 군대식 훈련이었던 걸까?
나도 적당히 환복 후, 이계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법한 물건을 오두막 안쪽으로 들여놨다.
“자기, 생각보다 이런 거 잘 따르네?”
서지아가 그런 나를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안 따를 이유가 없다면 따라야지.”
“그때는 안 따를 이유가 있었던 거네. 할 땐 하되, 먼저 폐를 끼치진 않는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아는 아마 아파트에서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완전 맹수인 줄 알았는데.”
“짐승 새끼들은 짐승처럼 다뤄야 하는 게 맞지.”
서지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틀린 말이 아니네. 자기 앞에서는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어.”
그런 대화를 하는 사이에 리리도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깨끗이 세탁을 한 덕분에 본래의 멋을 다시 되찾은 귀족의 드레스.
“뭔가…….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데 어색하네.”
붉은색과 검은색의 조화에 중점을 둔 디자인이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지구의 고딕풍 복장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뱀파이어와 고딕풍 드레스라니 꽤 어울리는 조합이네. 이렇게 보니 진짜 흡혈귀 가문의 백작 느낌도 풍겼다.
“신카 가문의 자제가 돌아오셨네.”
서지아도 이계 공용어로 그렇게 말했다.
그 사이에 북쪽에서 오는 사람의 무리가 보였다. 점점 더 가까워졌고.
“어.”
그들이 내 쪽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결론을 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그들과 마주했다.
20명 정도 되는데, 짐마차를 하나 끌고 있었다. 딱 봐도 제법 긴 여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아홉 신이 이 마을을 굽어보기를.”
이계 공용어였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하지?
“저희는 주신교의 순례단입니다. 이 마을의 대표와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폐가 안 된다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다행히 서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면 될 거예요.”
순례단의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이 신기했다. 겉보기에는 인간이랑 비슷했는데…… 눈동자가 이상했다.
“……뭐야. 우주야?”
마치 별과 은하가 그 안에서 떠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리가 내 옆에서 속삭였다.
“별의 자손들이야. 아홉 신 모두에게 사랑받는 종족.”
리리의 말에 순례단의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종족 자체에서 인자한 분위기를 풍기는 느낌이었다. 서지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성좌를 제일 많이 배출해 낸 종족 중 하나기도 하지. 그렇죠?”
오.
쉽게 말하면 그건가?
“종족 자체가 금수저 물고 태어난 세…….”
리리의 눈치는 진짜로 대단하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를 거면서 직감으로 그냥 입을 틀어막아 버렸으니까.
그렇게 조금 기다리자, OWIC에서 파견되었을 게 뻔한 중년이 이계 촌장 코스프레를 하고 다가왔다.
순례단의 대표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홉 신이 이 마을을 굽어보기를.”
“마제토의 촌장이 방문객을 환영합니다.”
오…….
이게 훈련받은 기만자라는 건가.
서지아가 내 옆에 와서 속삭였다.
“이 회사 진짜 사이코패스야. 맞지?”
지금은 나도 동감이다.
순례단은 내 건물과 마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리 마을엔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저희는 주신교의 순례단입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곳에 마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혹시 몰라 방문했는데…….”
순례단 대표는 내 오두막과 멀지 않은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더니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마을은 귀족령이나 왕국의 비호를 받지 않는 거로 보입니다. 맞는지요.”
촌장 코스플레이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모르실 거 같아서……. 경고를 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저희는 정치적인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촌장 코스플레이어가 단호하게 말하자 순례자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틀 뒤, 운데라가 라 시마에게 완전히 가려지는 밤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데라? 라 시마?
서지아가 말했다.
“달 이름이야. 그러니까, 크고 빠르게 움직이는 달이 고정된 작은 달을 가린다고.”
이계식 월식인가 보네. 달이 달을 가리는 월식이라니.
근데 그게 뭐가 문제지?
촌장도 무슨 의미인지 몰라 당황하는 게 보였다.
“운데라는 지옥의 마수로부터 물질계를 지키는 신입니다. 운데라가 지상을 비추지 않는다면, 일시적으로 지옥의 망령들이 지상을 휩쓸게 됩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모르셨나 보군요. 큰일입니다. 그건 서둘러 대비하지 않으면 참사가…….”
솔직히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입을 열었다.
“그건, 와일드헌트를 말하는 건가요?”
내가 입을 열었다. 촌장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을 벌리려다가 억지로 입술을 꾹 닫았다.
내가 이계의 언어를 한 게 놀랍게 느껴졌다 보다. 아무래도 OWIC이 또 시끄러워지겠구만.
“와일드헌트…… 이 지방에선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군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악령의 행렬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냥을 하는 현상이요. 잘은 모르지만 대충 이거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순례단의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곳에 아는 이가 한 명은 있었군요.”
수천의 이계 존재가 무리를 지으며 지상을 휩쓰는 현상.
나는 그 현상을 겪어 본 적 있었다. 심지어 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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