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oo easy to go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55
55화 ep21. 와일드 헌트 (2)
나는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 관심이 많았다. 탐험에서 문화는 빠질 수 없는 요소였으니까.
와일드 헌트(Wild Hunt)도 독일 여행 중에 알게 된 유럽 쪽 전설이었다.
어느 날 밤, 말과 사냥개, 그리고 괴수를 이끄는 망령 사냥꾼의 행렬이 휩쓸고 지나가는 현상.
지구 문화권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도 백귀야행(百鬼夜行)이라는 전설이 있고, 의외로 한국의 정월 대보름도 이와 연관된 날이었다.
물론, 지구에는 실제로 이런 현상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계에는 있었다.
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티를 안 내는 척하지만 나한테는 다 들렸다.
이 마당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느새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기억 속 책장 어딘가에 묻어 뒀던 일지를 끄집어낸다. ‘와일드 헌트’에 대한 내용이 적힌 일지를.
생각 정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 뒤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순례단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다. 오늘 밤, 그리고 내일 밤이 지나면, 그다음 날 밤에 와일드 헌트가 찾아온다는 뜻이니.
“이틀이면 길지 않네요.”
“촉박합니다. 보통 귀족령이나 왕국에 소속되어 있다면 우리 주신교의 성물을 내려 행렬의 피해를 최소화합니다. 하지만……. 이 마을은 그런 게 없어 보입니다. 맞습니까?”
촌장이 반응하지 못하길래 내가 대신 고개를 끄덕여 줬다.
“아홉 주신의 은총을 행하는 수도자로서, 마을의 위기를 보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마을을 돕고자 합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촌장이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동굴에 숨어 들어간 뒤 입구를 막거나, 근처 숲으로 들어간 뒤 숲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을은 폐허가 되겠지만 사람이 죽는 비극은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을이 폐허가 된다.
그 말을 들은 촌장의 얼굴은 경직을 넘어서서 핏기까지 가시기 시작했다.
이 마을의 정체는 지구의 베이스캠프다. 저렇게 보여도 각각의 건물은 사유재산이란 뜻이다. 하룻밤 만에 쓸려 가 버린다면 정말로 복잡한 문제에 부딪치게 될 거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차원문이었다. 숨기기 위해 온 정성을 들여 만든 차원문의 위장이 부서진다? 이건 굉장히 심각한 일이었다. 물론 내 일이 아니라 OWIC의 일이었지만.
“확실히 시간이 얼마 안 남긴 했네요.”
순례단의 대표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촉박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를 권합니다. 거주민 중 엘프가 있다면 당장 숲에 가서 소통 의식을 치르시고, 그게 아니라면 근처에 있는 큰 동굴을 당장 찾아야…….”
내가 말한 촉박함은 저 뜻이 아니었다.
“아뇨. 시간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대피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네?”
순례단의 대표가 의문을 표했다. 나도 생각에 잠겨 있느라 미처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못했다.
촌장 역할의 중년은 약간의 희망을 표정으로 드러내며 내게 말했다.
“호, 혹시 방법이 있겠습니까?”
“두 개 정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한 번 쳤다. 딱—! 하는 소리는 신호탄의 역할을 했다.
“다들 부지런히 움직입시다. ‘촌장’님도 할 일이 있으시겠죠?”
“……빠른 시일 내에 저희 쪽에서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촌장 역할은 마을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리리는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리리.”
나도 리리의 의사를 묻고 싶은 순간이다.
“응.”
“우리 탈 것 필요하지 않아?”
“……?”
“두 마리 잡을까, 한 마리 잡을까?”
내가 너무 단계를 건너뛰고 말했나?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나도 계획을 진단하느라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 * *
순례자 집단을 잠시 구경했다. 그들은 내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캠프를 마련했다. 자신들은 신의 가호를 받아서 와일드 헌트로부터 안전하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겠다고 남았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그들은 일제히 밖으로 나와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서 무섭다고도 할 법한 장면이었다.
“……뭐 하는 거지. 기도하나?”
서지아가 대답했다.
“식사.”
“……?”
“별의 자손은 별의 기운을 에너지 삼아서 살아가는 종족이야. 우리 같은 식사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들 관점에서 음식은 생존이 아니라 그냥 여흥.”
“……진짜 살기 편한 종족이네.”
“대신에 종족 전체가 신에게 헌신하니까.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해.”
서지아는 동감한다며 웃었다. 나는 모자를 벗은 순례자들의 붉은 머리카락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결국, 해가 질 때까지 OWIC에서는 오지 않았다. 좀 급한 일 아닌가?
“아직도 그 회사는 여유가 있나?”
“너무 여유가 없어서 그럴걸. 어쩌면 자기한테 믿음이 있을지도? 후자일 수도 있겠네.”
서지아가 말을 이었다.
“자기, 돌아오고 서울 가 봤어?”
“아니.”
“엘 로크라 벨라의 종소리가 지구 전역에서 울려 퍼졌어. 어떻게 되었겠어? 그냥 완전 난리가 났지.”
“난리가 날 정도인가?”
“안 그래도 OWIC은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야. 그 와중에 서울 전체를 흔드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정부도 시민이 아니라 회사 감싸기에 급급하고.”
뭐, 아직 이틀이라는 시간이 남은 데다, 애초에 내 계획에 OWIC의 도움은 필요 없었으니 내 입장에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당신.”
리리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은 밝기가 부족한 조명 아래에서 그 드레스는 더욱 깊은 분위기를 풍겨 왔다.
단순히 복장이 바뀌었을 뿐인데, 이제 막 민증 나온 초년생은 온데간데없이 고귀한 흡혈귀의 귀족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아까 나한테 한 말 뭐야? 탈 것 필요하다니?”
“잠깐 와 볼래?”
리리는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로 다가왔다. 서지아도 내가 꺼내는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독서 등을 켠 뒤, 지도 위에 투명 종이를 올렸다.
선 두 개가 그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동쪽의 유적에서 시작되고 하나는 베이스캠프에서 시작된다.
“이 선이 뭔지 알겠어?”
리리는 대답을 보류하고 그저 바라보았다.
나는 황금 지침을 꺼냈다.
“각 위치에서 황금 지침이 바라보는 방향이야.”
그렇게 그은 두 선이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그 점이 바로…….
“다음 유물이 있는 곳이겠구나.”
리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복하면 년도가 바뀌어 있겠는데?”
바로 저게 문제였다. 동쪽의 유물도 도보로 두 달은 잡아야 방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유물을 가져 왔지만, 방문할 때마다 이렇게 수월하게 풀린다는 보장은 없었다.
두 선이 만나는 지점은 지도를 벗어나 있었다.
왕복에 삼사 개월, 아니 어쩌면 반년이 훌쩍 넘을 수도 있었다. 포장도로만 걷는 것도 아닌 데다 가다 보면 돌발 상황도 생기고, 피로는 누적될 테니까.
이 정도 거리를 도보로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도전을 하더라도 무모함의 정도를 구분하는 법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탈 것이 있으면 되지.”
자동차도, 이계에서 말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옥에서 올라온 불타는 말.
“와일드 헌트의 사냥마.”
“……미친놈.”
서지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악마의 행렬을 그렇게 부르나 보네. 어쨌든, 와일드 헌트의 사냥마를 포획하겠다고?”
“못할 거 같아?”
“진짜 해 버릴 거 같아서 더 무서운 거야. 자기야.”
“그럼 조만간 무서운 장면을 보겠네. 앞자리로 표 끊어놔.”
서지아가 크게 웃었고, 리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미소 지었다.
잘 시간은 없었다. 이틀은 부족하진 않으나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바로 준비에 들어가기로 했다. 가방을 들고 오두막 바깥으로 나왔다.
내가 앞에 늘어놓은 건 황금 지침과 두 개의 황금 유물, 그리고…….
“거울 방호벽.”
애초에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나?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유물을 보존해 온 방호벽인데. 서지아는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
“자기, 진짜 방법은 알고 있는 거야? 들이받는 거 아니지?”
“나 이계에서 살았던 거 너도 알지?”
서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계에서 살았을 때, 목숨 위험했던 적은 셀 수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날 정말로 죽일 뻔한 게 몇 개 있어.”
그중 하나가 바로 와일드 헌트.
“다른 것들은 터무니없었지만 결국에는 ‘생태계’의 일환이었거든. 물론 어거지인 데다 말도 안 되지만, 생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부분만 있던 건 아니라서.”
“……와일드 헌트는 다르긴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도 모를 놈들이 메뚜기 떼마냥 하늘 휩쓸면서 다 부수고 다니는 걸 어떻게 이해해? 그리고 스프리건이랑 싸우면서 알았는데, 그놈들은 생물이 아니었어. 꼭두각시 로봇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명계의 존재들이니까. 그들에겐 영혼이 없어.”
리리가 말했다. 순례자들은 지옥의 존재라고 했었지? 아마 종족별로 부르는 명칭이 다른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놈들은 룬 언어에 약해. 원리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신경 안 썼어. 내가 룬 언어 공부에 집착했던 계기가 와일드 헌트기도 했거든.”
서지아는 이 시점에서 목소리가 조금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그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데? 너, 오지에서 생존했다고 했잖아. 그럼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 텐데.”
“그놈들이랑 몇 번 부딪혀 보니까 알겠더라고. 몇 번이 뭐야…….”
이 시점에서 둘은 질문도, 반응도 멈췄다. 나도 그래서 조금 더 사냥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룬 문장을 몇 개 반지에 저장해 놨다. 그리고, 유성 펜을 꺼내서 방호벽에도 하나 그렸다. 이건 비상용. 플랜 B는 항상 중요하니까.
“…….”
그런데 이 시점에서 서지아와 리리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게 뒤를 돌아보니 리리도, 서지아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의문과 혼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그래? 갑자기 무섭게. 너네 둘이 그렇게 죽이 잘 맞았나?”
서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카.”
“응.”
“너, 와일드 헌트 몇 번 경험해 봤어?”
“……한 번도. 책으로 보기만 했어.”
“……?”
의문이 들었다.
한 번도라고? 20년은 넘게 산 듯한데, 한 번도?
“……방랑자. 당신은?”
이번엔 리리가 서지아에게 물었다.
“……나 두 번.”
“당신 몇 살인데?”
“몰라. 난 부모 없이 자랐거든. 음…….”
서지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제국 황제 시해 사건 당시에 그 소식을 직접 들었어.”
“……그거.”
리리의 말투가 신중해졌다. 마치 자신의 기억이 정확한지 돌이켜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백 년 전 일이잖아.”
“그럼 난 최소한 백 년은 살았던 거네.”
이제야 이 대화의 의미를 깨달았다. 서지아가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나도 터무니없어서 되게 조심스러운데 말이야. 내가 두 번 경험했거든? 물론 와일드 헌트는 지역마다 그 발생 빈도수가 달라. 라 시마는 지역마다 움직임이 다르게 보이니까.”
리리도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5년에 한 번씩, 세 번 연속으로 발생한 지역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어.”
서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들었어. 딱 한 번, 그것도 소문으로만. 어떤 지역은 100년이 넘도록 구경도 못하는 곳도 있어.”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는 나도 잘 알 것 같았다.
이다음에 나올 질문이 예상돼서 벌써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당신, 몇 번 경험해 봤는데?”
이 질문이 나오기 전부터, 계속 생각해 봤다.
몇 번이었지?
“최소…… 일곱 번 정도였나? 여덟 번인가.”
“정확히는? 당신이 직접 경험해 봤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장하자면, 이제까지 먹어 온 빵의 개수를 기억에 남길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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